난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를, 할리우드를 사랑해. 그들은 아름다워.
모든 것이 인조적/가짜(plastic)이지만, 난 그 가짜 같음을 사랑해.
나도 그냥 가짜였으면 좋겠어.
-앤디 워홀 (Andy Warhol)

내가 여기 사는 건 엘에이(LA)가 추해서야. 내가 아름다운 도시에 산다면,
내가 왜 예술을 하겠어?
-존 발데사리 (John Baldessari)
 

 로스앤젤레스, 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뉴욕(New York)과 엘에이 현대예술의 두 아이콘의 고백에 의하면, 로스앤젤레스는 진실하거나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유럽 출신의 몇몇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이 로스앤젤레스는 1945년 전후 미국 중산층의 삶을 전경화한다며 삐딱하게 봐 온 가운데, 정작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엘에이라고 부르는 이 도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할리우드, 유니버설 스튜디오, 디즈니랜드가 있는 꿈의 공장? 물질적 풍요를 약속하는 따뜻한 캘리포니안 드림의 일부? 한국인 이민자들과 그 다음 세대들이 정착하여 커다란 한인 커뮤니티를 형성한 도시? 작년 10월부터 시작된 <퍼시픽 스탠더드 타임Pacific Standard Time: Art in L.A. 1945~1980>(이하 PST)은 전후 로스앤젤레스의 문화적 생산과 그 담론의 역사성에 대해 고찰하는 방대한 프로젝트이다. PST는 장 폴 게티 센터의 주관하에 총 60여 개에 이르는 미술관과 예술학교 등을 중심으로 육 개월 간(2011.10~2012.3) 이어지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아우르는 이름이다. 십 년 전 처음으로 구상된 이 프로젝트는 그간 연구, 전시기관들이 수행한 방대한 조사와 아카이브 구축이 없었다면 결코 실현될 수 없었다. 이와 함께 영화 상영, 워크숍, 좌담회, 작은 가족 축제 등을 비롯한 약 삼백여 개의 부대행사를 기획해 지역주민의 관심과 지지도 이끌어내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야심 찬 기획은 캘리포니아를 관통하는 태평양의 표준시를 중심으로 미국 현대예술의 역사성을 재고하겠다는 욕망을 대변하고 있다. 말하자면, PST는 엘에이의 지역성을 바탕으로, 전후 미국의 역사와 예술의 교차점들을 직조해내고자 하는 자기기술지(autobiography)인 셈이다.

 왼쪽에 보이는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로스앤젤레스는 거대한 분산집합체에 가깝다. 고속도로는 분산된 각기 다른 커뮤니티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동맥이다. 이들이 하나의 유기체로 숨 쉰다는 것이 때론 경이롭다. PST는 그 지역성을 단순히 로스앤젤레스로 제한하지 않고 주변 도시들-샌디에고(San Diego), 산타바바라(Santa Barbara), 패서디나(Pasadena) 등-로 확장했다. 일단 전시공간들의 분포도를 보았을 때, 이 프로젝트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공식 카탈로그에서도 다 보겠다는 생각은 접고, 그냥 보고 싶은 것만 보라는 상당히 구체적인 가이드를 주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중심이 있으면서도 없는, 무언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으면서도 늘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 도시의 지도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엘에이는 보이는 것과 상당히 많은 것이 다르다. 정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언뜻 이 도시는 따뜻하고 상냥하게 다가오는 듯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차갑고 황량한 사막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는 분명 뉴욕이 갖고 있지 않은 즉물성, 캘리포니아 특유의 활기참, 어딘가 텅 빈 외로움이 공존하고 있다. 따뜻한 기후 아래 모든 것이 풍요로워 보이지만, 각기 다른 인종의 예민한 차이들이 도시를 직조해왔고, 집을 잃고 파산한 사람들은 자신의 몸보다 큰 가방을 끌며 햇볕을 쪼인다. 불황으로 인한 중산층의 몰락은 묘한 불안과 함께 도시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그 사이로 이 자동차 제국은 끊임없이 새로운 자동차 광고를 전파한다. 자동차가 보행자들을 손쉽게 압도해버리는 이 도시는, 진정 전후 미국인들이 원하는 표준적 삶의 무대였을까?

 PST는 이런 로스앤젤레스의 지역성과 역사성을 관통하는 첫 번째 시도이다. 기획자들이 밝히듯, 이들이 프로젝트를 통해 마주하고자 하는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로스앤젤레스의 ‘우리’는 단순히 지역성이나 주변성에 기반한 예술생산으로 우리의 위치를 제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지금-여기’를 사유할 것인가? 뉴욕에 비해 턱없이 변경으로 밀려나 있던 로스앤젤레스의 예술을, 단순히 ‘중요성’, ‘중심/주변’과 같은 낡은 언어들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역사화할 수 있는가? 이들은 로스앤젤레스를 토양으로 하여 자라온 예술생산과 그 공공영역이, 단순히 뉴욕이라는 상징적 장소에 견줄 만한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물론 작가들과 비평가들의 좌담회에서 한 참여자는 뉴욕의 현대미술을 생각할 때 앤디 워홀이나 누군가를 쉽게 떠올리지만, 엘에이에 과연 그런 것이 있느냐며 불균형성의 문제를 꼬집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 맥락상 그러한 질문은 뉴욕이라는 장소가 가지고 있는 위치를 의식하기보다는, 로스앤젤레스의 지역성을 미국의 현대미술이라는 커다란 지도 속에서 재고해보자는 제언에 가까웠다. 중심/주변을 해체하려는 시도가 새로운 보편성에 대한 욕망과 온전히 분리된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 프로젝트를 통해 드러나는 지역성의 강조는 단순히 특정 지역 출신의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을 재발견하려는 시도를 넘어서고자 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질문이 1945년, 즉 전쟁의 끝과 냉전체제의 시작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유럽 등지에서 이민자들이 건너오기 이전 이미 부흥과 쇠퇴를 거친 수도 뉴욕에 비해, 항공, 군수, 자동차산업 등으로 급격히 경제적 기반을 구축한 로스앤젤레스는 전후 미국의 불안과 성장에 대한 열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다양한 인종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찾아와 커뮤니티를 구성하며 정착해왔지만, 인종 간의 뿌리 깊은 차별과 갈등은 보이는 곳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도 늘 살아있다. 불안들의 복잡한 선들과 매카시즘(McCarthyism)^{1950~1945년 미국을 휩쓴 일련의 반(反)공산주의 선풍}의 압력은 이곳을 기반으로 한 많은 예술가들을 지하로, 학교라는 비교적 안전한 제도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들이 국가 권력의 시야 바깥에서 창작 활동을 계획하거나 학생들을 가르치며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을 택함으로써, 예술생산과 전시는 지역의 작은 개인 갤러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자연스럽게 지역을 중심으로 작가-후원자-제도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커뮤니티들이 형성되었다. 1950년대 초부터 상업적 전시공간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대안적인 방식의 예술생산, 전시, 분배를 실험해온 기존의 작은 공간들과 조금씩 접점을 찾게 되었다. 미술시장이 확장되면서 전시공간들이 급격히 늘어난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다. 대규모 전시공간인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은 동부가 아닌 서부의 지역성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공언하며 예술가들을 조금씩 지원하기 시작했고, 소위 ‘엘에이 팝 문화’라는 자동차, 필름, 공장 부품 등 다양한 재료들과 뒤섞인 독특한 문화양식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동시에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걸친 예술학교들의 재정비는 학교 안팎에 있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후속 세대의 양성에도 기여했다.1) 이 시기 로스앤젤레스 예술의 특징 중 하나는 예술가들이 본격적으로 전통적인 장르들과 미디어의 질료들에 도전하면서, 회화, 조각, 공연의 경계들을 허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로스앤젤레스라는 특정한 지역에만 국한된 변화는 아니다. 다만, 이 새로운 질료들 중 일부는 지역성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를 들어, 조명 등 제조업의 발전은 빛과 공간을 질료로 하는 독특한 양식을 만들었다.2) 또한 할리우드 영화와 텔레비전과의 교착점은 미디어 아트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PST가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는 이와 같이 로스앤젤레스 예술의 역사성을 말하면서 이 도시의 지형과 개인의 삶의 방식 사이의 관계를 함께 고찰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존 발데사리, 에드 루샤(Ed Ruscha), 크리스 버든(Chris Burden) 등 이곳을 기반으로 한 아티스트들은 자동차와 이 도시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발화한다. 자동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방식의 감각과 보는 행위를 요구하며, 이는 단순히 보행자로 사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도시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방식의 신체와 도시의 관계를 기술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영국 출신의 건축사가 레이너 번햄(Reyner Banham)의 성찰과 크게 공명한다. 외부에서 온 이 관찰자는, 고속도로, 끝없이 이어지는 납작납작한 집들, 교외의 분산된 접점들(nodes)이 엘에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도시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번햄의 이러한 시선은 PST를 통해서 종종 교차되며, 수많은 비평가들과 예술가들에 의해 여전히 회자된다. 이러한 엘에이적 요소들은 이 도시의 리듬에 발을 조금이라도 맞춰본다면 분명 쉽게 식별할 수 있다. 그러나 토박이 예술가들은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강조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단순히 예술 ‘내부’의 것이 아닌, 예술가들의 삶과 그들의 관계를 오랫동안 직조했다고. 지나치게 넓게 분산된 네트워크는 “그냥 거리를 걷다가 동료들을 만나서 놀 수 있는” (뉴욕 식의) 수많은 우연들을 앗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스앤젤레스라는 토양은 이들에게 새로운 질료들을 실험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주었다. 할리우드 영화와 텔레비전이란 거대한 광맥은 이들에게 필름, 비디오, 사운드 등을 자유롭게 붙이고 해체하며, 회화, 조각 등 기존의 전통적인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항공우주산업과 군수산업 등은 이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뿐 아니라 물질적인 배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는 인종, 젠더, 디아스포라와 같은 정치적 화두들과 만나며 액티비즘(activism), 저항을 키워드로 한 예술생산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970년대는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이 확장하고, 서로 경합하면서 좀 더 넓은 계층에게 발화의 장을 연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자기기술지로서의 미디어 아트, 구체적인 지역성에 대한 성찰, 신체에 대한 새로운 고민은 그간 엘에이 아트에서 볼 수 없었던 공공성(과 그에 대한 담론의 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PST의 일부인 필름 프로젝트들, 특히 실험영화를 중심으로 한 <얼터너티브 프로젝션즈Alternative Projections: Experimental Film in LA 1945~1980>와 아프리칸-아메리칸 감독들이 만든 흑인영화들을 중심으로 한 <엘에이 리벨리언LA Rebellion: Creating a New Black Cinema>은 확장된 미디어들의 가능성과 소수자들의 발화 가능성을 대표하는 생산물들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미디어 아트들을 중심으로 한 전시들은, 지배적인 대중문화에 대항할 수 있으면서도 생산주체의 정체성-특히 종족성, 인종, 젠더-을 반영할 수 있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PST는 단순히 이것들을 전시하는 것을 넘어, 그간 급증한 작은 미디어들의 생산물들을 (디지털) 아카이빙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공공성을 개념적, 제도적 차원에서 재고하는 시도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구술사를 기반으로 한 대안적 지역 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한 예비적 단계를 실행한 것이다.

 이 자기기술지의 마지막 장은 1979년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이하 MOCA)의 설립이다. 현대미술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없었던 시점의 MOCA는 분명 로스앤젤레스 예술의 어떤 새로운 기폭제였을지 모른다. 이후 근 삼십 년에 대한 추기는 언제, 누구에 의해 쓰여질까? 지역을 기반으로 한 역사화의 지표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PST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가 스스로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은 1980년 ‘이후’를 재고할 수 있는 여지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은 것 같다. 제도적 장치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제도들이 뿌리를 내린 이후, 동시대성과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그 활력을 잃지 않는 것에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다음이 더욱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