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관계회의의 부활

2012년 3월 뉴델리에서 아시아관계회의(Asian Relations Conference: 이하 ARC)가 열렸다. 2009년 재개되어 이번으로 세 번째이다. 원조는 1947년이었다. 인도의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가 주도한 아시아 구상의 단초이기도 했다. 그 ARC가 반세기를 훌쩍 지나 부활한 것이다.

어째서인가. 21세기의 변화 때문이다. 서에서 동으로, 북에서 남으로, 강대국에서 신흥국으로, 세계질서의 지각변동이 ARC의 귀환을 낳았다. 그 실험들의 중심이 아시아일 것이며, 인도의 미래 또한 그 추세 속에 있으리라는 전망이다. 회의 주제도 이에 부합한다. 2009년에는 “부상하는 중국”이었고, 2010년에는 “인도와 GCCGulf Cooperation Council의 약어 국가”, 즉 걸프 연안의 아랍 국가들을 논했다. 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차례로 토론한 셈이다.

1947년에도 그러했다. 네루는 서아시아와 동아시아를 잇는 가교로 인도를 강조했다. 식민통치로 상호 분리되고 고립되었던 아시아의 재회에 인도가 일조하겠다는 다짐을 표명한 것이다. 인도는 일찍이 이슬람을 비롯한 서아시아 문명을 수용했던 바 있고, 동아시아에서는 수많은 학자들과 승려들이 깨달음을 구해 인도를 찾았다. 탈식민 인도의 향도는 그 동/서아시아와의 긴밀한 교류를 복원하는 데 있다고 여긴 것이다. 반둥회의(1955), 비동맹운동 등 이후 인도가 노정한 일련의 행보를 예고한 셈이다. 그 가시적 성과 가운데 하나가 아시안게임이기도 하다. 기존의 극동경기대회(Far Eastern Games)와 서아시아 대회(Western Asiatic Games)를 통합한 것이 바로 아시안게임이다. 1951년 뉴델리에서 네루의 개막사로 출범하여 현재에 이른 것이다.

올해 ARC의 화두는 “남아시아의 전환”이었다. 이전의 선언적 차원을 넘어서 실질적인 지역 통합으로 나아가자는 취지이다. 인도와 스리랑카는 자유무역협정을 맺었고, 파키스탄은 앙숙 인도를 최혜국으로 대우하기로 했다.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을 아우른 남아시아의 역내 교역도 부쩍 활발하다. 김에 남아시아경제연합(South Asian Economic Union)의 창설도 시야에 두고 있다. 문화 교류도 못지않다. 특히 남아시아 대학(South Asia University)의 창립이 돋보인다. 이미 2010년 8월부터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6개 과목에 200명 학생으로 그 출발은 단출하다. 허나 남아시아 통합의 문화적 초석이 되리라는 포부만큼은 당차고 커다랗다. ARC의 행보를 주목하는 까닭이다.

1947, 뉴델리

원조 ARC는 1947년 3월 23일부터 4월 2일까지 열흘간 진행되었다. 개막행사는 오후 다섯 시부터 열렸다. 마침 일요일이라 뉴델리 시민을 비롯해 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장소는 뿌라나 낄라(Purana Qila). 1538년 무굴제국 시기에 건설된 웅장한 고성이다. 행사장에는 아시아 전도가 내걸리고, 참가국들의 깃발이 휘날렸다. 마치 스포츠 대회처럼 각국 대표들이 퍼레이드를 펼치기도 했다. 일만 관객은 열렬한 박수로 환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에 걸쳐 참가국 대표들의 일장 연설이 이어졌다. 그리고 3일째부터는 사안별 심층 토론을 벌였다. 주제는 크게 일곱 개였다. 민족해방운동, 인종문제와 아시아 역내 이주, 경제발전, 농업재건과 산업발전, 노동문제와 사회복지, 문화 사업, 여성해방운동이다. 주제별 활달한 토론과 더불어 도심 곳곳에선 다채로운 문화 행사도 열렸다. 뉴델리는 ‘아시아 열기’로 한껏 고조되었다.

축제의 정점은 4월 2일 오후 6시부터 열린 폐막식이었다. 개막식의 두 배에 달하는 이만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특히 네루의 요청으로 인도의 정신적 스승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가 직접 연설을 했음이 각별하다. 그는 ARC가 아시아가 유럽을, 동방이 서구를 정복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세계’, 곧 아힘사(ahimsa, 비폭력)로 가는 방편이 되어야 함을 힘주어 역설했다. 아시아 르네상스란 곧 사랑과 평화라는 고대의 이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된 지혜를 빌려온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이어 베트남에서 보내온 호치민(胡志明, 1890~1969)의 전갈도 울려 퍼졌다. 그는 비록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직접 참가는 못했지만, 마음만은 그곳에 함께 있다며, 아시아의 독립과 통일을 염원했다. “어두운 밤은 지났다. 새벽을 향해 전진하자”는 하노이의 외침에 뉴델리는 환호와 박수갈채로 화답했다.

이처럼 ARC는 고무적인 분위기 속에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1949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재차 만나기를 약속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 사이에 전개할 사업 구상들도 야심찼다. 아시아 백과사전을 편찬하기로 했고, 이란, 태국, 인도, 중국은 과학기술 협력에도 뜻을 모았다. 특히 인도와 중국은 양국 간 대학 교류를 본격화하기로 합의했다. 아시아 문명의 양대 축이 솔선수범하여 그간 소원했던 문화 교류를 재개한다는 취지였다.(참고로 일본은 연합군최고사령부의 반대로 참가하지 못했다.)

이러한 네루의 정치적 기획의 뿌리에는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의 구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찍이 타고르는 서구의 대학과는 결이 다른 동방 대학을 설립하여 진정한 보편성(university)을 도모하기를 꿈꾸었다. 몸소 실천하기도 했다. 노벨문학상 상금을 밑천 삼아 1921년 설립한 비스바 바라띠(Visva Bharati)가 그것이다. “인도와 세계의 교감”을 뜻하는 벵골어라고 한다.

1924년, 타고르는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와 후스(胡適, 1891~1962) 등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불교 및 인도문화 연구자 탄윈산(譚雲山, 1898~1983)과 조우한다. 이후 15년간 이어지는 소중한 인연의 출발이었다. 인도문화에 대한 탄의 해박한 지식에 타고르는 깊이 감동했고, 비스바 바라띠(중국에서는 ‘인도국제대학’으로 통칭)의 교수로 탄을 공식 초청했다. 중국-인도 간 문류(文流)의 물꼬를 재차 틔워, 문화와 영성의 교류로 연결되는 아시아의 복원을 위해서였다. 탄윈산은 1937년 창설된 치나 바바나(Cheena Bhavana), 즉 중국학원 원장으로 취임한다. 공교롭게도 중일전쟁이 전면화된 해였다. 일본발 대동아를 대신하여 전후 (신)아시아를 준비하는 문화적 요람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1968년 은퇴할 때까지 인도에 머물며 자리를 지켰다. 1956년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총리는 직접 이 학교를 방문해 ‘현대의 현장법사’라며 탄의 노고를 치하하기도 했다. 명실상부 ‘중인대동’(中印大同)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담은 여기서 그친다. 정작 ARC는 두 번째 회합도 갖지 못한 채 유산되고 말았다. 2차 회의가 예정되었던 1949년, 중국은 한창 내전 중이었다. 그리고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냉전이 아시아를 뜨겁게 휘감기 시작한 것이다. 거꾸로 뉴델리를 감쌌던 아시아 열기는 급속히 식어갔다. 아시아는 다시 이념의 동과 서로 갈라지고 있었다.

돌아보면 비단 이념 대결 탓만은 아니었다. 국가 재건이라는 저마다의 화급한 과제가 지역 건설 구상을 압도했던 측면이 컸다. 탈식민이란 곧 정치의 독립이자, 경제의 자립을 의미했다. 식민경제를 대체하는 민족경제가 으뜸 과제였고, 그래서 ‘내재적 발전’이나 ‘자력갱생’이 강조되는 편향이 승했다. ‘주체’의 남다른 강조는 한 차례는 겪어야 할 통과의례였으되, 그 지나침이야말로 식민 경험의 부작용이 아니었나 싶다. 결국 아시아는 국가별로 각개 약진하거나, 미국 혹은 소련 일변도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인도는 꿋꿋하게 비동맹 노선을 견지했지만 아시아의 분열을 저지할만한 역량은 부족했다. 오히려 일국사회주의에 가까운 자립 경제를 고집하면서. 정작 남아시아의 이웃들과도 소원했음이 실상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21세기에 부활한 ARC의 기치가 독립(Independence)이 아니라 상호의존(Interdependence)으로 바뀌었음은 의미심장하다. 이웃 간의 협력과 연대야말로 독립과 자립의 튼튼한 기초이자 토대임을 자각한 것이다. 탈냉전이 선사한 각성의 효과라 하겠다. 아울러 인도는 (재차) 동방을 주시하고 있다. 이른바 동방정책(look east)을 20년째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동아시아도 눈길을 마주할 필요가 있겠다. 동과 서로 구획된 협소한 시야를 털어내고, 동남아 넘어 남방까지 내다볼 일이다.

Look South

기실 ARC는 한국과도 무연하지 않았다. 1947년 일정상 개막식에 미처 참석하지 못했던 세 나라가 있었다. 필리핀과 몽골, 그리고 한국이다. 한국의 대표는 백낙준(白樂濬, 1895~1985)이었다. 그는 폐막식의 기조연설을 통해 지난날 한국과 아시아 간의 자유로운 문화 교류를 되새겼다. 지금은 비록 미·소 점령으로 정치적, 경제적으로 불구인 상태이지만, 곧 통일국가가 되어 완전한 독립을 실현할 것임을 약속하기도 했다. 통일한국이 아시아와 세계 전체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피력했다. 이어 그와 동행한 고황경(高凰京, 1909~2000)이 네루에게 조선의 전통 인형을 선물하기도 했다.

헌데 그 뒷얘기가 실로 간단치 않다. 본디 한국의 수석대표는 백낙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북의 김일성(金日成, 1912~1994)도, 남의 이승만(李承晩, 1875~1965)도 아니었다.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이었다. 여운형이 광복 이후 최초의 아시아 단위 회의에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초청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출국 당일 새벽에 그의 집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난다. 그 사태로 여운형의 뉴델리행은 취소되고, 백낙준이 연설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4개월 후 여운형이 암살되었다는 곡절까지 감안한다면, 그의 뉴델리행 무산은 도래하는 한반도와 아시아의 격렬한 냉/열전의 전조처럼 다가온다. 식민통치로 분절되고 단절되었던 아시아의 재회가 끝내 미루어지고, 재차 냉전이라는 분열과 분단이 지속되는 역풍이 몰아치고 있던 것이다.

특히나 남북 분단은 한국이 남아시아와 뜸해지는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중립 노선과 비동맹운동 등 인도의 행보와는 도통 무관했던 것이다. 아니 저강도의 적대감이 주조였다고도 할 법하다. 인도는 도쿄(東京)재판에서 (식민지 조선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판단을 내린 바 있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지한데다, 한국전쟁에서 UN 결의안에 반대하는 등 독자적 노선을 견지했던 탓이다. 1973년 인도와의 수교조차도 닉슨쇼크 이후 제3세계 국가를 둘러싼 북조선과의 치열한 외교 경쟁의 소산이었을 따름이다. 결국 냉전기 한국에서 인도를 포함한 남아시아는 사실상 부재했던 셈이다. 인도는 불교의 탄생지로, 종교와 철학에서나 관심을 두는 무시간성의 장소가 되고 만 것이다. 식민지 조선 때,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동시대의 타고르와 간디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보다도 한층 후퇴한 꼴이다.

그 여파는 오래 지속되었다. 지금껏 독립 이후 인도의 초석을 다진 네루에 대한 연구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이래서는 ‘친디아의 세기’를 맞이하는 기초 공사가 영 부실한 것이다. 그나마 탈냉전과 더불어 한국인도학회가 발진했다는 점이 위안이다. 1992년에 학회를 세우고, 다음 해 기관지 <인도연구>를 창간했다. 1995년에는 한국외대에 남아시아연구소도 설립되었다. 이제 얼추 20년의 역사가 쌓인 셈이다. 동아시아론이 약진하던 시기, 남아시아 연구도 기지개를 켜고 있던 셈이다. 이를 여운형의 못다 이룬 뉴델리행을 복원하는 사업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당시 그가 ‘가지 못한 길’은 한반도에서도, 아시아에서도 더없이 소중하다. 나아가 1,200년 전, 혜초(慧超, 704~787)의 걸작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727)의 대업을 잇는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무릇 일본이 가깝고도 먼 나라라면, ‘천축’(天竺) 인도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이지 않았던가.

지난 20세기의 ‘예외상태’를 지나, 물류(物流)와 문류(文流) 양면에서 아시아 네트워크는 끝내 복원 중이다. 동아시아도, 남아시아도, 서아시아도 미래를 향해 되돌아가고 있다.(Back to the Future) 허나 돌아온 길만큼이나, 갈 길도 아득하다. ARC의 부활을 그 먼 길의 동반자로 삼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