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드윅Hedwig And The Angry Inch>(2000)의 주인공 헤드윅^{존 캐머런 미(John Cameron Mitchell)} 분은 베를린 장벽 앞에서 나체로 일광욕을 하다가 미군 병사의 눈에 띄게 되어 성전환 수술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냉전이라는 거대한 세력이자 한 시대를 상징했던 베를린 장벽은 1989년 붕괴를 맞이하지만, 그것은 남자이지도 여자이지도 않은 헤드윅이 1인치의 수술 자국을 안은 채 미국사회의 뒷골목 세계를 이루는 이민자들의 세계로 들어갔던 것처럼 장벽을 둘러싼 사람들의 삶을 짓누르거나, 혹은 바닥으로 잡아당긴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벽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 후,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어리석고도 비극적인, 그리고 역사적인(즉, 이미 지나간) 교훈일 것이라 믿고 살아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2012년 3월의 나(그리고 일행)는 눈부신 햇살 아래 서 있는 예루살렘 근교의 분리 장벽(혹은 고립 장벽)을 마주했다. 이스라엘 답사 두 번째 날의 오전이었다.

 2012년 3월 20일, 나는 일행과 함께 약 한 시간 동안 인천국제공항의 지면을 밟았다. 오사카(大阪)에서 출발한 비행기에서 국내 항공사의 직행 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서였다. 성지를 향하는 중/노년의 단체 관광객들과 함께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딴 벤구리온(Ben Gurion)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초 긴장상태로 입국 심사를 마치고(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 공항의 악명을 확인할 수 있다), 해가 진 공항에서 7인승 택시를 타고 예루살렘의 숙소로 직행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지금까지 봐온 어떤 풍경과도 다른 것들이 거무스름한 빛을 통해 눈으로 들어왔다.

 그 실체를 확인한 것은 이튿날 이번 여행의 목적 중 하나인 팔레스타인의 알 꾸드스 대학(Al Quds University)에 방문하기 위해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숙소를 나서면서였다. 석조로 이루어진 고풍스런 도시 경관을 압도하는 이색적인 교외의 풍경이 차창 넘어 눈앞에 펼쳐졌다. 분쇄된 듯 퍼석퍼석하게 가루가 날리는 사막의 자갈들 사이에 짧은 풀들이 듬성듬성 솟은 완만한 구릉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그곳은 예루살렘의 동쪽 부분, 즉 서안지구로 이어지는 길이다.

 1947년 국제연합의 이스라엘에 의한 분할 통치 승인과 이듬해 아랍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 이 땅에는 아랍인들과 일부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의 국토를 빼앗기고 남은 땅이 바로 이집트에 접한 가자 지구, 요르단과 접한 서안지구, 그리고 그에 접한 ‘모두의 성스러운 땅’인 예루살렘의 올드 시티와 접한 동쪽 부분이다. 혹시 ‘국토를 빼앗기고’라는 말을 상상력을 가지고 곱씹어본 적이 있는지. 아마도 역사가 기록되던 시기부터 그곳에 당연하게 살아온 팔레스타인인들은 가자와 서안지구로 내몰렸고, 삶터인 마을들이 1967년에 끝난 네 차례의 전쟁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그들이 쌓아 올린 유서 깊은 도시와 자원들은 강탈당했다. 그들은 자치정부를 수립할 권리를 부정당한 채 분할통치 지역들과 그에 접한 외국으로 내쫓겼다. 1998년 국제연합이 마침내 그들의 자치정부를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지구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통치하에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대 민족과 다른 취급을 받고 있다. 곧 노동, 교육, 보건, 복지 등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권리를 차등 분배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삶을 이끈다.

 말하자면, 팔레스타인 땅은 이스라엘로 건너온 유대인들에 의해 식민지로 점령되었다. 그러한 점령의 역사는 우리가 찾아간 수많은 풍경 속에 잠들어 있었다. 젊은 실업자들과 수거될 법적 근거가 없는 쓰레기들이 대낮의 거리를 떠도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난민 캠프(난민 캠프라 불리지만, 반세기 이상을 지나며 만들어진 삶의 흔적은 완연한 도시의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네 산동네처럼 삐뚤빼뚤하게 증식한 집과 골목들, 말 그대로 ‘파괴된’ 농촌마을의 돌아갈 수 없는 흔적들, 수백 년을 이어오던 교역이 끊긴 어두운 시장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곳에서 ‘살아가던 대로’ 살고자 독립 운동을 위해 싸워 왔고, 여성들은 자주적인 교육/복지시설을 운영하며, 옛 가옥의 수복을 위해 전 세계에 호소하고, 독립 미디어를 설립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은 쉬이 우리들의 눈과 손에 와 닿지 않는다. 무수하게 바쁜 일과와 기호를 소화해 나가는 우리들의 귀를 겨우 스쳐가는 그들의 소식은, 날아오르는 미사일이나 흉악한 무슬림 단체의 테러와 같은 사건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점령하고 있는 주체는, 게토와 홀로코스트로 표현되는 인종 분리의 피해자였던 유대인들이다.

 완만한 경사의 언덕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언덕들의 꼭대기에는 크림색의 신축으로 보이는 아파트들이 요새와 같은 모습으로 군데군데 세워져 있다. 바로 이스라엘인의 정착촌이다. 정착촌은 전쟁 후에 ‘토지 매수’라는 극히 적법한 방법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땅을 잠식하고 있다. 점점이 이어진 정착촌을 넘으면 그 완만한 경사의 언덕들을 타고 수직으로 늘어선 회색 물체가 끝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가이드가 우리를 향해 말한다. “여권을 꺼내세요.”

 그 회색 물체 분리 장벽은 이스라엘인의 정착촌을 테러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2002년부터 만들어졌다. 높이 약 8m, 총 길이 약 730km에 달하는 이 물체가 국제 뉴스를 어지럽히는 ‘미사일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건 사진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계가 가로지르는 양 쪽의 ‘사람’들을 차단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유대인 거주지구와 서안 지구를 넘나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도로 위의 체크 포인트에서 ‘신분증명서’를 제시해야 한다. 이는 총 4종의 분류를 가진 증명서 중에서, 녹색 카드(서안 지구 출신)를 가진 사람들은 서안 지구에서 나갈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동의 자유 박탈’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혀끝에 맴돈다. 경제발전이 집중된 이스라엘의 유대인 거주지에서 일하고 있던 서안 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먹을 것은? 애들 교육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지? 벽은 대답이 없다. 알 꾸드스 대학의 삼분의 일은 이 장벽에 의해 분리되었고, 장벽이 관통한 어느 팔레스타인인의 마을의 한 쪽 사람들은 하나밖에 없는 장벽 너머의 병원을 이용하기 위해 체크 포인트를 향해 꾸역꾸역 길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그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법적 책임을 방기한 채, 유대인 거주지에 취업한 증명서가 있는 경우(그것도 지정된 수의)에 장벽을 통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노동력으로 활용할 의사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해 두자면, 현재 분리 장벽은 국제법상 위법이다¹⁾.

 이는 영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Banksy)의 말 그대로 “세계 최대의 야외 형무소”임에 틀림없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피티 아티스트의 최적의 휴가지”라고. 그렇다. 알 꾸드스 대학에서 내려다보이는 분리 장벽, 그리고 병원이 가로막힌 어느 마을, 그리고 이번 여행에 들르지 못한 베들레햄의 분리 장벽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그래피티의 성지가 되었다. 주로 밤에 ‘몰래’ 그려지는 그래피티는 항상 지워질 위험에 처해지면서도 그 생명이 끝날 때까지 공개적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이곳에 그려진 그래피티들이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는, 사진을 통해 직접 판단해주길 바란다. 대신에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는, 다소 잔혹한 체험담이다.

 예루살렘의 교외에 위치하며 세례자 요한이 태어났다는 에인 카렘(Ein Karem)은 싱그러운 자연과 유서 깊고 아름다운 사원, 그리고 옛 고택들의 풍경이 어우러진 ‘브런치 하기 좋은’ 장소이다. 이전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적이 있는 일행 중 한 명이 들려준 건물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굳은 표정이 되었다. 그곳은 무력으로 쫓아낸 아랍인들의 초등학교였던 건물에 개업한 이탈리안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일행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약자에 대한 인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사람을 강제로 쫓아내고, 마치 그 세월이 없었다는 것 마냥 예쁘고 성스러운 포장지를 덧씌운 곳은 이스라엘의 도처에 있었다. 야파(Jaffa)의 그 사랑스러운 항구의 예술인 마을이, 바다 바람이 불어오는 푸른 언덕이 원래는 강제로 쫓겨난 누군가의 보금자리였을 줄이야.

 물론 쫓아낸 자에게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천 몇 백 년 정도 전에 그들과 그들의 신성한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다는 그들의 믿음 혹은 진실. 하나의 진실 이면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송두리째 짓눌려 있다는 사실들이 감춰진다. 그리고 누군가가 부활한 지 2005년 째 되는 해, 뱅크시라는 이름과 얼굴을 보이지 않는 선지자는 그 ‘진실과 사실의 촘촘한 경계’에 그래피티를 그렸다. 그래피티의 어원은 이탈리아어인 graffito, 벽이나 기둥 따위에 금을 긋는다는 뜻이다. 국적 불문의 작은 스파크들은 지금 현재, ‘팔레스타인 지구에 면한’ 분리 장벽을 다채롭고 떠들썩하게 메우고 있다. 장벽의 반대편과는 대조적으로 그 모습이 찍힌 사진을 정리하면서 나는 생각해 보는 것이다. 정말로 분리=고립되어 있는 쪽이 어느 쪽인지를.

추신
본 답사는 오사카시립대학교 문학연구과 지리학교실 야마자키 타카시 교수, 박사과정 이마노 타이조 씨가 기획하여 알 꾸드스 대학교 인문과학부 지리학 도시연구 전공, 그리고 복지협회의 협력 하에 오사카시립대학교 문학연구과 ‘인터내셔널 스쿨 청년 연구자 파견 프로그램’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