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올해 5월에 개봉한 한국 영화 <써니>가 흥행 롱런을 이어가고 있다. 트위터 등 인터넷을 통해 입소문이 퍼지면서 상영일이 연장되었고, 도쿄뿐만 아니라 몇몇 지방도시에서도 추가 상영이 결정되었다. ‘써니 현상’의 특징으로는 온라인상의 입소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인기를 끌었다는 점은 물론이고, ‘옷싸니(おっサニ一)’ ^{<써니>에 감동한 아저씨(おっさん)라는 뜻}라는 명칭이 생겨날 정도로 중년 남성들에게 어필하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일본 여성들이 한류 드라마 및 케이팝을 받아들인 것은 오래이지만, 일본 남성, 특히 중년 남성을 사로잡은 것은 아마도 이 영화가 최초가 아닐까 싶다.
이 영화가 일본인들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는 것은 아마 “정치의 계절을 ‘하위문화를 통해’ 상대화하는” ¹⁾ 그 이야기 방식일 것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떠올리게 하는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대학생들과 기동대의 충돌에 맞짱을 뜨는 ‘써니’파와 ‘소녀시대’파가 겹쳐지는 장면은 말할 것도 없고, 주인공 임나미^{유호정/심은경 분}의 가족 설정 자체가 정치의 계절에 대한 시니컬한 시선을 나타낸다. 민주화 운동에 몸을 바치는 대학생이었던 오빠는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를 짓밟는 악덕사장이 되어 곤경에 빠지는 한편, 젊은 시절 능력 없는 듯 했던 나미의 남편은 경제적으로 성공했다.
25년이라는 시간은 ‘정치의 계절’을 객관적으로 보게 하는 충분한 거리가 되었다. 거리를 가지고 바라본 정치와 사상과 운동에서는 소비사회의 하위문화를 읽을 수 있다(팝 뮤직). 대문자로 쓰인 단일한, 남자의, 금욕적인 이상(언론)의 그림자에 가려져 왔던, 소문자로 쓰인 잡다한, 여자애들의, 향락적인 현실(일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러한 원근법은 1980년대의 구미 및 일본에서도 이미 경험해 왔던 것이다. <써니>는 과거 구미 및 일본이 1980년대의 렌즈를 통해서 1960년대를 바라본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2010년대의 렌즈를 통해 1980년대를 바라본다. 확실히, 그때 그 노래를 추억하는 것과 같이 그때 그 정치투쟁을 추억한다는 식의 가치 상대화는, 소비사회를 현상유지 시킬 뿐이라는 비판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야기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198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은 예전의 친구들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분리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정을 회복시키는 것은 이 영화에서는 돈이다. 창녀 비슷하게 전락한 자나 시어머니에게 억압받는 며느리인 자에게, 이념이나 친절을 제시하는 것은 오히려 기만이며 솔직하게 건네는 몇 장의 지폐가 진짜 우정을 전달하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돈으로 해결하는 실용적인 경제주의가 도덕적인 정치주의보다 더 나은 점은, 옛 친구에게 자기의 궂은 상황에 대한 고백을 종용하지 않고, 잘못 끼워진(졌을) 가치관 및 생활양식에 파고들지 않고도 그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부가 바꾸어 버린 사회 연대의 형태가 바로 하위문화에 의한 상대화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치의 계절의 하위문화를 통한 상대화’가 일본에서는 약간 복잡한 경위를 거쳤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1980년대의 일본에서는, 이미 인습의 질곡에 빠지기 시작한 ‘일본형 복지사회’의 성적 역할 분업(가족의식)으로부터의 여성의 자립, 경제성장과 노동력 부족으로부터 예측된 이민 수용과 다문화사회로의 전환, 체르노빌 사고의 충격에서 시작된 탈원전 운동과 에콜로지 등의 가치가 대문자로 쓰인 정치의 상대화 및 하위문화의 성숙 속에서 광범위한 사회의식 수준으로 부상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일상성 및 사회를 향해 싹트기 시작한 움직임은 1990년대 중반에 이르는 동안 그 태반이 좌절되거나 혹은 정체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하위문화의 변질과 그것을 주도하는 사람들의 보수화가 이러한 사회 상황의 문제 제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현대 일본의 ‘사브카루(サブカル)’ 2)는 우리끼리의 ‘끝나지 않는 여름방학’ 3)과 같은 틀 속에 일본 사회를 끼워 맞추려고 하는 편협한 보수성으로 그 특징을 말할 수 있다. 사브카루 민족주의자만큼 1980년대에 싹튼 가능성과 배치되는 존재도 없다.
사브카루는 정치를 상대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사회 변동을 정체시키고 또 좌절하게 만드는 정치를 절대에 가까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일본인들에게 ‘잃어버린 10년’은 장기간에 걸친 경제 불황이었지만 그보다 더 얼어붙은 것은 사회 변동이었다. 민주당 정권의 실패와 동일본대지진 및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이러한 좌절, 정체, 동결이 일본 사회가 짊어진 부채가 얼마나 거대한 것이었는가를 실감하게 한다. 사브카루로 대표되는 일상성의 가치관은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변화를 견뎌낼 수 없는 것이다.
현재 원전 재가동에 반대하기 위해 10만 명 이상이 그것도 매주 도쿄 수상관저 앞을 비롯한 주요 각 도시에서 집결하여 시위를 벌이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여러 곳에서 동시에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 일본인들은 2010년대의 상황에서 1980년대와 1960년대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이, 사브카루 소비자로서의 존재조건을 되돌아보고, 다가올 ‘생활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모색하기 시작하고 있다. 사브카루 속에서 망각해버린 1980년대의 약속, 소문자로 쓰일, 잡다한, 여자애들의, 향락적인 ‘사회’의 정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써니>에서 그려진 1980년대는 향수(노스탤지어)의 그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의 일본을 알고 있는 남성들은(그리고 여성들도), 추억의 팝 뮤직을 매개로 하여 1980년대의 한국으로부터 동세대의 일본을 겹쳐 본다. 잊히고 있었던 것들이 깨어나, 얼어붙어버린 1980년대를 땡하고 녹여서 현재에 되살려 보라는, 1980년대에 안녕을 고하라는 메시지를 누군가가 눈앞에 갖다 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해석일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많이 흘려보낸 25년 전의 약속을 지키고, 자기의 인생을 되찾는다는 이야기는 현재 일본 사회의 과제와 우연히 일치한다. 1980년대의 향수가, 2010년대를 걸어가야 할 일본인들을 미래를 향해 이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