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맛의 깊이는 숙성 기간에 좌우된다. 막걸리와 와인을 절묘하게 섞어 놓은 듯한 창작 뮤지컬 <콩칠팔 새삼륙>은 3년간의 숙성 과정을 거쳤다. 2010년 창작팩토리 대본 공모, 2011년 창작팩토리 쇼케이스 공모에 차례로 당선되며 수정과 보완을 이어갔고, 2011년 창작팩토리 뮤지컬 부문 우수작품제작지원 선정작으로 무대의 내실을 다졌다. <콩칠팔 새삼륙>은 한 해 100여 편의 창작 뮤지컬이 공연되는 현 뮤지컬 시장에서 한 단계 한 단계 무대를 완성해나가는 성실한 인큐베이팅 시간의 중요성을 증명한다. 열악한 제작 환경, 대본과 음악의 낮은 완성도 등 많은 창작 뮤지컬이 떠안고 있는 문제들 앞에 하나의 전환점을 제시한 것이다.
작가 이수진·작곡가 이나오·연출가 주지희, 여성 창작자 3인방이 탄생시킨 <콩칠팔 새삼륙>은 경성시대 여성의 동성애를 다룸으로써 국내 창작 뮤지컬의 소재 확장을 이루고, 뮤지컬 무대에서 보기 드문 여성 투톱의 구도를 시도하는 도전을 감행했다. 작품의 배경은 1930년대 경성, 막걸리와 와인을 뒤섞은 듯 동·서양의 문물과 사상들이 혼재된 어지러운 시대 속에서 <콩칠팔 새삼육>이 주목한 것은 바로 여성의 자아였다. 1931년 영등포역 기차선로에 뛰어든 두 여인의 실화가 모티프가 되었다. 조선 최초로 의사 면허를 획득한 홍석후 박사의 고명딸 홍옥임과 부유한 사업가 김동진의 장녀이자 마포 부자 심정택의 맏며느리 김용주.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금지된 사랑이었다.
무대 위 옥임과 용주는 다른 듯 닮아있다. 고운 한복을 입고 곱게 머리를 쪽진 용주는 원치 않은 결혼생활로 불행하고, 세련된 양장을 갖추고 단발머리를 한 옥임은 신여성임에도 약혼을 강요받는다. 사상의 개혁이 시작되었음에도 누구를 막론하고 여전히 여성의 삶은 남성의 선택권 속에 종속되어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머리를 자르고 가출한 용주, 약혼자 류를 끊임없이 거절하는 옥임,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반기를 들지만 끝내 자신의 진짜 사랑을 인정받지 못한다. 작품의 제목처럼 콩칠팔 새삼륙(남의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고 떠든다는 뜻)해대는 세상 앞에 개인은 무력하다. 소수자의 사랑, 더욱이 여성 간의 사랑의 종착역이 기차선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작품은 인물과 음악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 소극장 뮤지컬의 매력을 한층 끌어올린다. 무대세트는 간결하고 효율적으로 구성됐다. 뒤쪽 무대는 여닫음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차역, 극장 등으로 변화되고, 무대 양 옆 기둥처럼 세워진 벽들은 원근감을 살리는 동시에 조명의 활용으로 모던시대의 화려함을 비춰준다. 벽들 곳곳에 새겨진 한옥의 창문 문양은 과도기적 시대에 자신의 출구를 찾고자 하는 모던 걸들의 내면을 떠올리게 한다.

 
더블캐스팅이 일반화된 뮤지컬 시장에서 이 작품은 배우들이 원캐스팅으로 무대에 오르는 만큼 배역에 대한 몰입도가 높다. 용주 역의 신의정과 옥임 역의 최미소가 이루는 자연스러운 앙상블과 화동 역의 정연과 류씨 역의 조휘의 강열한 인상이 작품의 강약을 적절히 조절한다. 반면 다소 빠른 전개에 각 인물들이 지닌 사랑의 감정선이 뭉개지는 부분이 있지만, 음악이 극의 개연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도맡는다. 우선, 아코디언을 비롯해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기타, 색소폰 등으로 구성된 소규모 밴드가 시대적인 색채감을 살려낸다. 용주의 강인함을 드러내는 <거울 속의 너>, 여리지만 밝은 빛을 지닌 옥임의 내면을 부각하는 <내 안에 스며든 그림자>, 속세에 물들어 버린 여배우 화동의 욕망과 한이 동시에 서려있는 <여자로 태어나> 등의 뮤지컬 넘버는 인물들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 작품의 외연을 확장시킨다.
가부장적인 사회구조가 지닌 아픔은 기차선로 아래로 사라졌지만, 두 여인의 비극적인 삶은 8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투영되며, 사회란 거대한 담론에 희생되는 개인의 행복을 조명해준다. 혼재된 세상 속에 부정되는 자아는 방향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포기한 용주와 옥임은 다시 <경성의 봄>을 노래한다.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지만, 기다리면 봄이 온다는 절실함은 다시금 척박한 땅 위에 사랑을 재생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