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말봉, 『찔레꽃』(1937, 인문사)
책의 사회사 : 욕망과 순결이 뒤섞인 식민지의 풍경
- 김말봉, 『찔레꽃』(1937, 인문사)
김은하

김말봉, 『찔레꽃』, 합동사서점, 1940년 7판, 한국근대문학관 소장
김말봉의 『찔레꽃』(1937.3.31-10.3)은 30년대 후반에 조선일보에 연재된 통속소설이다. 이 소설의 연재로 신문의 판매 부수가 두 배 늘고, 연재 후 출간된 단행본은 6판이나 찍은 것을 보면 소설가 김남천의 “김여사와 더부러 인기경주를 할 생각을 하면 어째 소설에 붓을 대였든가 하고 전생에 업원이 생각키인다”1)라는 말은 풍자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무엇이 이 소설에 대한 대중적 열광을 끌어냈을까? 그 이유를 아름다운 청춘남녀의 연애담이라는 데서 찾을 수 없다. 이 소설은 식민지 자본이 이룩한 풍요 속에서 돈의 위력을 경험한 가난한 남녀의 파혼기, 이별기이기 때문이다. 임화는 이 소설을 ‘조선에서 전례를 보지 못한 순통속소설’2)이라고 칭했다. 이는 그가 이 소설이 도덕과 관습 속에서 억눌려 있던 근대적 욕망의 징후를 포착한 모던한 계열임을 간파했다는 것을 뜻한다.
『찔레꽃』은 후끈한 반사열을 내뿜는 경성의 한복판에서 안정순이 현기증을 느끼는 것으로 시작한다. 보육학교를 나와 교사로 일하던 정순은 재정난으로 유치원이 폐업하자 실업자로 전락한다. 이곳저곳 돌아다녔지만 구직에 실패한 그녀는 낡은 인조견 양산을 쓴 채 전차값을 제하면 동전 한 닢 남지 않는 현실과 마주한다. 이는 현기증이 폭염의 열기가 아니라 더 이상 사람의 체면을 유지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공포의 감각임을 뜻한다. 그녀는 광인이 된 아버지의 치료비를 갚고 노모를 부양해야 할 처녀 가장이다. 초라한 정순의 모습은 대도시 경성의 풍요와 대비되어 식민지 대중의 소외와 불안을 암시한다. 정순의 약혼자인 이민수 역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경성제대 수학과에 재학 중인 그는 가계의 파산으로 당장 학비와 하숙비조차 아쉽다.
이렇게 볼 때 정순이 구직에 성공해 가정교사로 발을 내디딘 조만호의 저택은 금욕적인 처녀를 시험하는 유혹의 무대이다.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은행의 두취인 조만호의 대저택과 부르주아의 삶이다. 작가는 부자의 삶에 대한 독자의 관음증을 충족시키듯 으리으리한 솟을대문 너머 아름다운 화원을 품은 이층집을 개방한다. 체경이 달린 양복장에 전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등의자로 꾸민 안주인의 방, 흑단의 높은 책상과 금빛 나는 내외국 서적이 천장까지 쌓인 조만호의 서재, 경애의 화려한 아뜰리에는 부르주아 계급이 물질만이 아니라 지식과 예술마저 소유했음을 암시한다. ‘실로 만인이 우러러보는 행복에 전당’이라는 서술자의 표현은 검약과 절제 등 인간의 덕성을 상징하는 가치들이 위기에 처해있음을 역설한다. 조만호가 식민지 민중을 착취하는 타락한 부르주아라는 점에서 ‘행복’이 더 이상 영혼의 덕성스러운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찔레꽃』은 조만호의 저택이 위치한 인사동을 중심으로 민수와 정순 같은 가난한 이들의 거주지인 효자정을 교차시킴으로써 식민지 경제의 불평등성을 환기시킨다. 같은 경성에 있음에도 인사동이 풍요의 인공 낙원이라면, 효사정은 근대적 혜택이 닿지 않은 소외 지대이다. 공간은 비록 사람이 오가지만 자본은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별의 경계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공적 정의가 아니라 정념이라는 사적 경제를 통해 불평등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정순은 아내를 잃고 혼자 된 조만호와 그의 장남 경구 모두로부터 열렬한 구애를 받는다. 민수 역시 조만호의 맏딸 경애를 위험에서 구해 준 계기로 그녀의 구애를 받는다. 정순과 민수의 단단했던 애정 관계는 사소한 오해가 반복되면서 깨진다. 결국 정순은 경구와, 민수는 경애와 결합하게 된다. 그러나 이별은 삶을 무너뜨리는 상실의 아픔이 아니라 지혜로운 선택이다. 순정은 재난자본주의 하에서 저마다 표류 중인 이들을 구조하기에 무력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돈이 작중인물들의 관계를 지배하고 있음에도 이 소설은 마치 부자와 빈자가 각각 돈과 도덕을 교환하는 듯한 착각을 유도한다. 부르주아들은 한결같이 빈곤한 이들의 덕성에 끌린다. 조만호와 그의 아들 경구는 성격이 상이하지만 모두 정순의 정숙한 여성성에 매혹되어 그녀를 욕망한다. 오만한 경애 역시 민수의 금욕적 태도에 이끌려 독신주의를 폐기한다. 민수가 빈곤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노량진 승마 사고에서 자신을 구한 대가인 오천원의 거금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기실 터무니없는 환상임에도 불구하고 부자와 빈자의 결합은 서로의 필요 혹은 욕망을 만족시키는 정의로운 교환인 듯한 착각을 유발해 가난이라는 현실의 얼룩을 은폐한다. 가난은 부가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이지만 탈현실화, 탈맥락화된다.
가난한 자의 자질로 강제된 도덕은 억압적인 식민지 자본주의가 사회적으로 배제된 자들의 분노와 절망을 관리하는 통치의 이데올로기이다. 통속소설의 장르 법칙은 부자들은 열렬히 빈자에게 구애하지만 빈자는 부자를 향한 이렇다 할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도 연애 게임의 최종 승리자가 된다는 것이다. 연애 경제에서 빈자는 자신의 도덕성을 증명해야만 부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만약 빈자가 자신의 욕망 실현을 위해 계략을 짜고 실행한다면 처벌을 면하지 못한다. 기생 옥란은 조만호의 본처가 되어 사생아인 아들에게 어엿한 호적을 만들어주고 호화롭게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범죄를 저지르지만 텍스트 바깥으로 추방당한다. 그러나 정순은 시종일관 우아함을 잃지 않고도 부를 거머쥔다. 경구는 조만호의 막대한 재산의 적법한 상속자이고, 정순의 가난, 즉 도덕에 매혹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는 그녀가 경구를 사랑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나 기실 그녀의 고결함은 넘실대는 욕망을 역설한다. 백화점 옥상 장면은 이러한 판단을 암시한다. 정순은 조만호 부녀를 따라 간 백화점에서 부르주아의 삶을 체험한다. 부자의 과시적 쇼핑과 호화로운 식사는 그녀의 빈곤을 재차 확인시켜준다. 백화점의 옥상에서 대 경성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위로를 구하듯 효사정의 자취를 찾으려 하지만 실패한다. 북촌은 “빛의 혜택이 가장 얇은”곳이기 때문이다. “콩 섬을 흩트려 놓은 듯한 불들”을 응시하던 그녀는 “이 장안 천지에는 가지가지의 범죄와 덕행과 미신과 질병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을 것”3)이라는 뜻밖의 발견에 이른다. 이 장면은 발전의 불균형 속에 드리운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예고하는 한편으로 도덕이 그러한 균열을 봉합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것을 암시한다.
이렇듯 통속소설가로서 김말봉은 ‘각자도생’하기 위해 이별하는 청춘 남녀의 실연기를 통해 만주사변으로 일제의 수탈이 가혹해지는 한편으로 정치적 전망마저 사라져버린 30년대 후반기 대중적 정동을 담아낸다. 그리고 독자는 이 소설을 열렬히 소비함으로써 현실의 실감을 붙잡는 한편으로 가짜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1) 김남천, 「작금의 신문소설=통속소설을 위한 감상」, 『비판』,1938,12, 66쪽.
2) 임화, 「통속소설론」,『문학의 논리』, 학예사,1940.
3) 김말봉, 『찔레꽃』, 소명출판, 2014, p.54.
#저자 약력
金銀河 1969년 군산생. 문학평론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강의교수
최근 논문(저서), 「여성의 교양화 과정과 젠더화된 글쓰기의 이중 전략-60년대 여성잡지」, 「살아남은 자의 죄책과 애도의 글쓰기: 80년대 여성문학」, 「애증 속의 공생, 우울증적 모녀관계-박완서의 『나목』론」 등. amilesto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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