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여름은 짧지만 또한 길다. 밤 열두 시가 넘어서도 환한 하늘은 이들의 짧은 여름을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길게 늘여준다.
핀란드 사람들에게 여름은 해를 3시간 밖에 가질 수 없는 겨울에 대한 보상이며,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해 삶의 에너지를 비축하는 시간이다. 핀란드인 대부분은 7월 한 달간 휴가를 떠난다.
3,000여 개가 넘는 호수와 훤칠한 키의 나무들로 우거진 숲에서 이들은 휴식하며, 삶의 여유를 누린다. 평균 5일의 분주한 여름휴가를 가지는 우리로서는 입이 쩍 벌어지는 기간과 환경이다. 잘 사는 나라, 복지국가 북유럽 국가들 중 하나임을 떠올리며, 이들의 여유로움을 당연히 받아들이게 된다.

핀란드는 북유럽 국가들의 환경과 삶을 하나로 묶어 현재를 이해하기에는 역사적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13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스웨덴의 속주였으며, 이후 100년 동안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핀란드인이 국가를 가지게 된 건 1917년에 와서다.
독립 후 핀란드는 내전과 2차 세계대전을 거쳤고, 신생 국가 핀란드는 가난한 유럽의 변방 국가일 뿐이었다. 하지만, 현재 핀란드는 북유럽의 타 국가들과 경제, 교육, 복지 수준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며, 핀란드인의 국가에 대한 자부심 또한 매우 높다. 어쩌면 그들의 역사는 20세기 타 국가의 지배와 전쟁을 겪은 우리와 닮아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눈부신 초고속 경제 성장의 화려한 꼬리표를 달고 있고, 그들은 복지국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핀란드가 복지국가로 안정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북유럽 타 국가들의 사회복지 제도와 이념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것과 핀란드 내부의 언어적,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뛰어넘는 강력한 시민운동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에서 보편주의, 평등주의, 연대성은 핵심적인 키워드로 사회복지 및 문화정책에 그대로 드러난다.
한반도 1.5배의 면적에 540만 인구로 유럽연합회원국 중 가장 낮은 인구 밀도를 보이고, 가장 높은 녹지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핀란드인의 집은 그들의 자연과 사람을 그대로 닮았다.

넉넉하고 편안한 공간, 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자연의 색을 담고 있는 몇몇 핀란드인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모두 예술가이거나, 예술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집 또는 여름 별장에서 가족들과 휴가를 보내고 있는 그들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면서 한국 예술가들의 삶이 오버랩 된다.
한국은 2011년 예술인 복지법이 예술계의 큰 화제가 되었으며, 정작 알맹이 없이 통과된 예술인 복지법의 개선 요구와 함께 2012년 시행에 대한 걱정과 기대가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
복지국가의 모범이 되고 있는 핀란드 예술가들은 어떤 복지 혜택을 받고 있고, 그들을 위한 특별한 복지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조심스레 핀란드 예술인의 삶과 복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본다. 예술인 복지법? 예술가를 위한 특별한 법안이 마련된다고?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핀란드는 일반 시민과 동일한 제도에 예술인을 포함시키는 노르딕 복지 모델을 따르고 있다. 한국처럼 예술인을 위한 특별한 복지제도를 운영하는 국가로 독일, 프랑스 등이 있으나 북유럽 국가의 포괄적인 복지제도와 비교한다면 일부 혜택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서유럽 및 미국과 차별되는 핀란드 사회복지 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주의와 평등주의적 관점이다. 예를 들어 핀란드인은 일정 나이가 되면, 과거의 납부금액과 상관없이 모두가 균일한 금액을 국민연금(National Pension)으로 받는다.

핀란드의 모든 국민은 평균적인 삶의 질을 보장받고 있다. 소득을 보장해주는 사회보험으로는 모든 국민이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급받는 국민연금과 고용 기간 및 급여에 따라 차등 지급받는 고용연금(Employee Pension), 질병보험(Sickness Insurence)과 산재보험(Workmen's Compensation)이 있다.
또한 사회보장으로 가족수당, 아동수당, 군인수당 등이 있으며, 임산부와 아동을 위한 복지센터가 마련되어 있다. 또한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모든 교육이 무료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모든 복지 혜택은 핀란드 국민이라면 모두가 받을 수 있는 권리이다.
한국의 상황에서 이러한 복지 시스템을 이해할 때 대부분의 예술가가 프리랜서로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작업하는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단기 고용의 법적 장치 및 실업급여 수급 과정에서의 행정적인 절차 및 문제들이 떠오르게 된다. 예를 들어, 실업급여 수혜자는 국가에 구직 활동에 대한 보고를 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예술가의 경우 구직 활동 외 창작준비 과정 또한 포함되어야 한다. 핀란드에서는 예술가라는 직업군의 특수성을 사회에서 수용하는데 조합(union)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예술 관련 종사자들은 조합에 가입되어 있으며, 무용의 경우 댄스인포핀란드(Dance Info Finland)의 통계에 따르면 무용인의 약 85%가 조합에 가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술가 조합 중 하나인 핀란드연극미디어종사자노동조합(Theatre and Media Employees in Finland)은 연극, 무용, 영화, TV 등 각 종사자에 대한 7개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분야의 전문가, 학생, 프리랜서, 개인 사업자 등 예술가, 기술 스태프, 예술교사, 행정가를 포함하여 현재 약 4,400여 명이 가입되어 있다.
조합은 관련 분야의 표준 규약을 만들고, 회원들의 복지를 보장하고, 회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정부에 전달하고 예술가의 사회적 가치와 지위를 높이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단체교섭을 통한 임금, 근로조건, 보험 등 고용 기준 및 권리에 대한 표준 규약을 담고 있는 떼아 리아란(TEATTERIALAN) 내에는 최소 임금기준 및 리허설 시간 등 근로조건을 분야별, 작업별로 세세하게 구분하고 명시해, 계약 시 제시된 기준을 따르도록 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예술 분야에서의 계약 관련 연구결과를 보면 공연 분야의 경우 서면계약은 18%, 구두계약은 30% 정도이며, 나머지는 계약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술 활동을 노동과 구별하고자 하는 인식과 미미한 공연료, 인정에 따른 작업 참가, 표준계약서 부재 및 표준 근로조건의 이해 부재 등이 계약의 필요성을 높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핀란드에서는 프리랜서 예술가의 단기 프로젝트 참가 등 모든 예술 활동에서 표준계약 지침에 따라 계약이 이루어지며, 이에 따라 작업에 대한 법적인 권리와 혜택을 누리게 된다.
또한 예술가들은 조합 가입과 동시에 실업급여협회(Unemployment Benefit Society)에 가입하게 되며, 일정 기간 일이 없는 동안 국민연금 외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 그 밖의 혜택으로는 고용관계 등 문제 발생 시 무료 법률 서비스, 저작권 문제 해결 및 관리, 무료 보험 가입, 파리 및 베를린의 조합 소유 스튜디오 사용, 공연 티켓 할인 구매 등이 있다. 회원들을 위한 재교육 및 워크숍 프로그램과 젊은 연출 및 예술가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홍보, 마케팅, 교육 프로그램 등도 분야별 조합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예술인 복지를 이야기하자면, 기초생활보장 및 사회지위 구축 외 또 하나의 축을 이루는 것이 창작 활성화이다. 핀란드의 예술창작 지원제도는 어떠할까? 1968년에 설립된 핀란드예술위원회(The Arts Council of Finland)는 타 국가 예술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예술지원 및 예술창작 활성화를 미션으로 삼고 있다. 기금 구조를 보면 크게 예술가 기금, 프로젝트 기금, 특별 기금, 운영 기금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중 가장 눈을 끄는 것은 바로 예술가 기금이다. 1개월에서 11개월까지 매월 지급하는 월별 기금과 1, 3, 5년간 지원하는 연 기금으로 나누어지며, 예술가들은 계획에 따라 기간별 기금을 신청할 수 있다.
예술가 기금은 쉽게 말해 예술가에게 월급을 짧게는 1개월, 길게는 5년까지 지급하는 것으로 월별로는 매월 1,626.99유로(약 230만 원), 연간 19,444.88유로(약 2천 8백만 원)를 지급한다. 또한, 이 기금은 한번 받은 수혜자라 해도 과거 활동 수행 실적 및 계획에 따라 여러 차례 받을 수 있다. 핀란드에서도 제한된 재원이기에 예술가들이 이 기금을 수혜받기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예술가에게 작품 제작비가 아닌 월급의 개념으로 최장 5년까지 지원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놀라울 따름이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운영 기금으로 단체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연간으로 지원하는 기금이다.
예를 들어 핀란드의 글림스앤글롬스(Glims & Gloms) 무용 단체의 경우 연간 130,000유로(약 1억 8천만 원)를 운영 기금으로 지원받고 있으며, 이는 월급, 공간 임대비, 작품 제작비 등 단체 운영 관련 모든 항목에 사용가능하다. 단체는 지난 3년간 계속해서 기금을 수혜 받아 왔으며, 향후 지속적인 지원 여부에 대한 질문에 단체의 프로듀서는 단체가 창작 활동을 충실히 수행하는 한 지속 지원은 문제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또한 지원을 중단할 때에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사전 통보를 해 단체가 다른 방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게 한다고 한다. 운영 기금을 받는 단체는 프로젝트 기금 및 예술가 기금도 신청할 수 있다.
기금 수혜자 선정 기준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술가 및 단체의 과거 활동, 현황 및 계획의 충실성, 참신성, 예술가의 모험성 및 창의성 등을 기본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모든 기준에는 지역적, 언어적, 성별 평등주의를 고려한다는 사회 전체의 이념이 함께 언급되어 있다.
핀란드는 국가와 지방정부가 함께 재정적 책임을 맡는 것이 문화정책의 기본 방침 중 하나로,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단체들은 예술위원회 기금 외 각 시에서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지방정부는 지역 예술 활성화를 위해 예술단체에 공간(사무실, 극장 등)을 무료로 임대하는 경우가 많다.
예술가를 위한 월급 지원, 단체 운영 기금 지원, 무료 공간 임대, 중앙과 지방정부의 중복 지원 등 핀란드의 지원제도는 우리에 비해 좀 더 포괄적이며, 작품 중심이 아닌, 예술가와 창작과정 중심의 지원제도를 갖추고 있다는 인상이다.
또한, 기금 지원에 따른 정산 방식은 간단한 명세 목록만을 제출하게 되어 있고, 기금 사용 항목에 대해 최대한 열려 있어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지원 구조임을 엿볼 수 있다.
물론, 핀란드의 예술가 및 프로듀서들은 한정된 재원과 넘치는 예술가(단체)를 이야기하며, 여전히 많은 예술가가 공적 지원금의 테두리 밖에 놓여있음을 언급한다.

핀란드도 예술 분야의 임금기준은 타 분야와 비교해 훨씬 낮게 책정되어 있어, 핀란드 예술가도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의 고민의 시작점은 기초 생활을 넘어선 예술가로서 창작 영역에서부터이다.
사회적으로 예술가의 지위를 인정받고, 그 행위가 정당한 노동으로 인식되고, 그에 따라 합법적인 권리 주장을 할 수 있으며, 국민의 평균적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그들의 삶과 비교해 겨우 예술가의 기본 생존권 정도를 보장받고자 첫 발을 뗀 한국의 현 실정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고민을 하게 한다.
생존권 보장 및 삶의 질 향상의 문제는 예술가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핀란드는 보편주의, 평등주의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소득에 따른 세금 분배 등 사회적 연대성을 가지고 신뢰를 바탕으로 공동의 책임으로 사회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예술가를 특수화하지 않아도 보편적 복지 영역에서 평균적인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 장기적인 관점에서라면 현재의 예술인 복지법과 함께 사회 전체의 구조 변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