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도시’라는 별명을 들었지만 이토록 붉을 줄 몰랐다. 볼로냐(Bologna) 공항에서 도심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내려 처음으로 받은 인상이다. 숨이 차오르는 더위를 만들었을 태양도 붉었지만, 도시의 건물들, 빌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든 건물이 유물 같아 보이는 도시는 어쩐지 붉은 통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게 했다.내게는 ‘협동조합 도시’라는 수식어가 익숙한 볼로냐는 붉은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세계대전 중의 수많은 공습과 도시 재건축 계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세 도시 스타일을 간직한 볼로냐에 유난히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 많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하지만 붉은 도시라는 별명은 볼로냐의 좌파 성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볼로냐는 좌파가 오랜 시간 지방정부를 장악했었고 그 시기부터 시작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측면에서의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는 도시의 성향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볼로냐 대학이 도시 곳곳에 산재하고 있으며, 이탈리아 음식의 본고장, 세계에서 가장 긴 회랑을 보존하고 있는 도시, 어린이도서전 등 다양한 박람회가 열리는 도시 등 볼로냐의 역사와 문화, 전통에 대한 인식은 도시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볼로냐의 시청은 볼로냐의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도시 한가운데 광장과 마주하고 있는 시청 벽에는 자유와 정의를 위해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983~1945)의 파시즘 정부와 싸운 사람들의 사진과 이름이 붙어있다. 시청 건물의 일부이자 도서관인 ‘살라 보르사(Sala Borsa)’의 내부 바닥은 아래가 보이는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유적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도서관의 시설을 세우기 위한 그들의 방책이라고 한다. 도서관은 유아부터 노인까지 전 연령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단순히 그들이 읽을 법한 책을 보유하고 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도서관을 찾아 필요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고 또 도서관에 오는 것이 즐거운 경험이 되도록 곳곳에서 배려한 흔적이 보였다.
가치에 대한 그들의 정체성과 애정은 문화재를 활용하는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보통 문화재는 출입구를 만들고, 설명 팻말을 배치하고 팸플릿을 만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관광객 위주의 접근은 정작 그 지역의 사람들로부터 외면받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유적을 훼손하지 않으며 도서관을 세운 살라 보르사의 사례나(살라 보르사는 1200년대에 건축되기 시작하여 볼로냐 대학의 자연과학부로, 1800년대에는 증권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귀족들이 조각, 미술작품, 고서를 보관하던 건물을 활용한 고고학 박물관, 도서관과 볼로냐영화제, 국제아동도서전 등 야외 공연, 전시, 축제가 열리는 마지오레 광장(Piazza Maggiore)은 문화와 역사, 전통을 일상적인 삶에 녹여 시민들의 삶의 풍요를 높이는 그들의 높은 수준을 볼 수 있다.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특성은 유적과 문화 시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볼로냐의 문화적인 특성은 ‘협동조합’을 만나 경제 분야에서도 혁신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볼로냐는 협동조합의 비중이 전체 경제 생산의 45%를 차지하며 볼로냐가 속한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주를 보더라도 30%를 차지한다. 세계경제 위기로 많은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워졌던 2008년에도 볼로냐의 실업률은 자연 실업률에 근접하는 3%였는데 협동조합이 경제활동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그 원인으로 파악된다.
실제로 볼로냐에서 열흘간 머무르며 방문했던 식료품점이 코프(Coop, 코페라티브의 줄임말로, 협동조합이라는 의미) 매장이었다. 그 규모도 편의점 규모부터 대형마트 크기까지 아주 다양했다. 볼로냐의 주민들도 협동조합을 이용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는데, 코프 매장에서 판매하는 물품의 범위가 한국과 달리 농산품을 넘어 냄비, 커피 주전자부터 전구, 전자용품까지 다양한 공산품을 포함했다.

 
가격도 저렴한 편이었는데, 협동조합의 경영 원칙이 ‘주주에게 최대 이익’이 아닌 ‘조합원에게 값싸고 질 좋은 물품을 공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커피, 파스타 등 코프 매장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물품이 협동조합 또는 공정무역 조직에서 생산된 것이었으며 매장 입구에는 환경과 지역사회, 그리고 윤리를 고려한다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볼로냐, 이탈리아의 협동조합은 생활, 농업, 공산품 생산 분야를 넘어 은행,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조합원이 3명인 곳에서부터 수만 명에 이르기까지 구성도 다양하다. 이런 다양한 협동조합은 ‘레가(Lega)’라는 조직의 지원 아래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설립과 운영 전반에 걸쳐 지원을 받으며 함께 성장하고 있다. ‘협동조합의 협동조합’격인 레가는 협동조합기금을 만들어 협동조합들이 설립되고 운영이 정상궤도에 이르기까지 회계, 금융, 네트워크 등 다방면에서 지원을 한다.
우리가 만난 레가의 국제담당 로베르타는 청년들이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실행하는 사업에는 고등학교 수업의 한 과목으로 들어가 학생들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협동조합의 설립을 구상하고, 경쟁하여 실행에 옮기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있었다. 2년 전 그녀가 담당했던 협동조합 중에는 죄수들에게 연극을 보여주는 것도 있었고, 거지들이 일반인들은 모르는 자신만의 세계를 보여주는 잡지를 제작해 판매하는 거지들의 협동조합도 있었다.
이들 협동조합이 자신의 사업에 접근하는 방식은 매우 기업적이면서도 독특했다. 사회적 약자를 고용하여 마피아에게 몰수한 토지에서 농산물을 생산해 파스타, 와인 등을 판매하는 리베라 테라(Libera Terra)는 자신의 활동이 기업적인 모습을 갖추고 성과를 내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포장지에서 점차 윤리적 가치, 사회적 의미를 알리는 내용을 줄이고, 품질향상을 위해 노력해 지금은 일반 제품보다 고가이면서 좋은 품질을 자랑하는 제품을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의 활동을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소개했다.

 
볼로냐를 지역 기반으로 지역 신문, 라디오, 영화제 등 다양한 지역 문화 활동을 전개하는 미디어 그룹 볼리(Voli)는 직원 모두가 조합원이고 조합원 각자가 대표인 특수한 형태를 띈 협동조합이었다. 미디어를 매개로 지역 사람들이 소통하고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볼리의 사무실은 창의적인 기업을 떠오르게 했는데, 볼리의 디렉터는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협동조합의 방법으로 일을 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고 이야기했다.
볼리는 그들의 활동에 필요하고 협동조합의 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기업을 인수하며 운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볼로냐가 경제위기의 어려움을 이겨낸 비결로 흔히 협동조합을 꼽는다. 실제로 그 위기는 협동조합이 그들의 정신으로 볼로냐의 경제적 기반을 탄탄하게 받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겪어 본 볼로냐의 힘은 협동조합뿐만 아니라 역사와 전통, 문화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도시의 행정적인 시스템을 포함하는 보이지 않는 무엇이었다. 아마도 그 힘은 볼로냐의 시민들이 일구어온 어떤 분위기가 아닐까?
어린이를 위한 연극을 만드는 라 바라카(La Baraka)를 만나 함께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그들은 매일 극단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먹는다고 한다. 맛있는 파스타와 와인을 나누며 그들이 말하길 3세 아래의 어린이들은 박수를 잘 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도 감동을 받으면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는데, 그들은 그 순간 큰 행복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렇게 단원 모두가 세상에 좋은 사례를 만들며 일을 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또 덕분에 자신의 삶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은 이야기했다.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고 그 삶에 자부심과 행복을 느끼는 삶. 다양한 가치가 살아 숨쉬고, 그 가치를 도시의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볼로냐에서라면 그런 삶이 가능하고 또 행복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