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사회적기업’, ‘창조적 열정으로 여는 청년들의 도전’, ‘협동조합이 만드는 새로운 세상’, ‘사회적 경제가 답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듣게 되는 슬로건들이다.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둔 이들이라면 낯선 말들이 아닐 것이다. 듣고 있노라면, 당장에라도 희망찬 내일이 육박해 올 것만 같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사람들의 삶은 갈수록 궁핍해지고 있는데? 청년실업은 날로 증가해 가고, 빈부격차는 확대되고 경제는 언제나 불황이라는 불길한 소문은 거리에 가득하다. 사회적기업이 많아지면, 협동조합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 이 모든 문제들이 눈 녹듯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걸까.
일단, 자르고 가자.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이 도깨비 방망이는 아니다. 자본주의 실패를 사회적 경제로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는 미망에 가까울 거다. 그럼에도, 정부에서 사회적 경제 운운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 정부 초기, 청와대에서 작성되었다는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이라는 문건에서는 “좌파 예술인들을 지속적으로 척결”해야 한다고 명시해 놓았고, 현실에서도 그에 발맞춘 행보가 문화부 장관의 진두지휘 아래 진행되었다. 그런데, 사회적 경제라니? 시장의 효율성을 누구보다 신봉하는 정부가 ‘좌파정책’을 앞장서 홍보하고 있다니 어리둥절하다.
그래서다. 많은 이들이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을 포괄하는 사회적 경제에 대한 강조가 세계적인 트렌드에 뒤지지 않으려는 발버둥인 동시에 정부 단위에서는 경제정책 실패를 면피하기 위한 하나의 포즈에 가깝다고.
불황으로 인한 일자리 부족과 각종 사회적 불만을 달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일 거라고. SK, 삼성을 비롯한 국내 유수의 기업들이 사회적기업을 만들겠노라고 다투어 뛰어드는 것을 보면 이런 의심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의심이나 음모론도 여기까지 접고 가자. 이야기해야 할 것은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이라는 트렌드에 문화예술계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니. 사실, 문화예술계가 정부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트렌드에 빠르게 대응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느 시점에서 그것은 문화예술교육이었고, 문화복지였고, 착한 예술이었고, 다문화정책이었고, 지역문화정책이기도 했다. 사실, 변화에 대해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변화에 무감각하고 대응이 없다면 살아있다고 이야기할 수 없으니. 다만, 그 반응이 일률적이고 편향될 수 있다는 것은 늘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트렌드에는 이유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보이는 문화예술계의 사회적기업/협동조합 붐은 우려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이미 사회적기업에서 문화예술 분야의 비중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문화예술전문 사회적기업은 전체 인증 사회적기업 644개 중 96개(약15%, 2011년 12월 기준)로 2007년 3개, 2008년 8개, 2009년 7개 단체가 인증 받은 것에 비해 2010년 한 해에만 총 49개 단체가 인증 받았으며, 2011년에도 31개 단체가 인증 받는 등 꾸준히 증가세에 있다.
2011년 12월에 통과된 협동조합기본법이 발효되는 올해 12월 이후에는 무려 8,000여 개의 협동조합이 신설되거나 기존의 성격을 전환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중 문화예술 협동조합의 수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기업이 정부가 취업률 눈속임을 위해 마련한 싸구려 장치라는 냉소적인 시선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당연히 그런 속성이 있다. 이런저런 사회적기업들의 속내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 이미 많은 수의 문화예술 분야 사회적기업이 인건비 지원만을 보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호되게 수업료를 치렀다.
사회적기업은 특히, 청년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있다고 속삭인다. 부천문화재단에서도 사회적기업진흥원의 위탁을 받아 문화예술 분야 사회적기업의 예비 창업팀을 인큐베이팅하고 있다. 지역의 청년 기획자를 양성하는 팀에서부터 공연기획, 대중음악 밴드, 만화교육, 여행잡지, 영화인협동조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모델을 실험 중이다. 물론, 창업팀에 선정되었다고 해서 앞날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건비 지원 없이 사업을 진행해야 하는데다 각종 제약이 많아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아마도 사회적기업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청년들은 대략 비슷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청년들은 왜 사회적기업에 뛰어드는가. 다른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정규직 노동이라는 안정적인 미래가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살풍경한 경쟁의 틈바구니에 끼어들기 싫은 이들에게 사회적기업은 어쨌든 기회를 제공한다. 사회적기업에 대한 열광은 한편으로 사회적 가능성이 닫혀간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 역시 읽어내야 한다.
현실이 강요하는 지배적인 삶과 다른 가치를 찾아나서는 모험을 배척할 이유가 있는가? 오히려 지배적 가치가 몰락한 자리에서 그러한 시도들을 독려하고 북돋아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청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사회적기업에 대한 열광이 인건비 지원의 한계선을 크게 넘어서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계가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은 취지와 성격, 존립방식에서 차이가 있는 만큼 하나로 묶어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곤란한 지점이 있다.
하지만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에 대한 열기는 결국 문화예술계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건드리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고 봐야 한다. 사회적 경제가 기존의 방식들이 한계에 부딪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어렵지만 돌파구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는 거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사회적 경제는 위기를 확인하는 방식인 동시에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는 형식이기도 하다.
첫째는 역시 ‘먹고 사는’ 문제다. 문화예술 분야의 경제적 현실은 새삼 강조하기가 무안할 정도다. 최근에는 조각가 구본주 소송사건,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죽음 등으로 촉발된 사회적 관심이 예술인 복지법 제정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최고은 법’이라는 별칭이 무색하게 ‘최고은은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내용’이라는 빈축을 사기도 하지만, 문화예술계의 현실에 대해 지속적으로 개선의 필요성이 있다는 데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가 모아진 것만은 사실이다.
‘예술 하면 밥 굶기 딱 좋다’라는 지긋지긋한 속설이 증명하듯 문화예술인들의 경제적 여건은 불안정 그 자체다. 기본적인 생활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문화예술 활동이 안정적이기는 어렵다.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은 지속가능성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문화예술계의 요구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발행한 『2011 문화예술전문 사회적기업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사회적기업의 핵심요소로 인증 사회적기업이 가장 많이 꼽은 것은 ‘공공성과 수익성의 동시 추구’(65.4%)였으며, 다음으로 ‘문화예술 분야의 실직자 고용보장 및 소득 보전’(15.4%)을 꼽았다.
공공성은 사회적 파급력으로, 수익성과 고용보장은 지속가능성으로 대치가 가능한 어휘들이다. 그러나 설문 문항으로 볼 때, 사실에 근접하기보다는 사회적 시선을 의식해 명분을 고려한 답변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는 고용보장과 소득 보전이 더 우선일 개연성이 충분하다.
다음은 앞의 문항에서 확인된 공공성의 추구, 다시 말해 사회적 파급력의 문제다. 예술가들은 너무 오랫동안 골방에 갇혀 자신만의 예술 활동에 골몰해 있는 자들이라고 비아냥대는 것을 두루 들어왔다.
문화예술계가 자의든 타의든 사회적 경제 분야에 관심을 쏟는 것은, 예술의 사회적 쓰임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형성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최근 ‘착한 예술’이 강조된 흐름 역시 이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예술이 고독한 천재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유통되며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치들을 전파하고 확산하는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함정은 있다. 예술가가 자신의 역량을 공공근로에 투입하는 것처럼 소진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술가도 역시 시민이고, 예술도 사회적 서비스의 일종이지만, 예술가를 기계적인 활동의 틀로 규정지으려는 것마저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예술이 사회적으로 가치를 확산하고 쓰임새를 새롭게 비추어본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이들과 그 가치를 나누는 방식을 고민한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예술의 근원에 대해 꾸준히 성찰하고 동시대 예술의 흐름에 무감각하지 않으며 새로운 가치와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에게 주어진 숙명이자 책무다.

 
지역에서 출발하고, 새로운 수요를 만들자
이런저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이 열어줄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이 있다. 이는 문화예술에 대한 수요를 어떻게 확인하고, 새롭게 만들어낼 것인가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각종 조사를 통해 본 한국인들의 여가생활은 참으로 보잘 것 없다. TV 시청은 지금까지 한국인의 여가생활에서 첫 번째 자리를 내어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지금은 90 대 10을 넘어 99% 대 1%라는 구호가 세계를 설명하는 강력한 어휘로 자리 잡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80 대 20의 사회라는 말이 준 충격은 상당했었다. 1997년 출간된 『세계화의 덫』에서는 20%가 80%를 지배하기 위한 방편으로 ‘티티테인먼트’(엄마 젖을 의미하는 ‘tits’란 미국 속어에 엔터테인먼트를 붙여 만든 조어)를 이야기했다.
이는 ‘기막힌 오락물과 적당한 먹을거리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 이 세상의 좌절한 사람을 기분 나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사회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구조를 은폐하고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게 하는 마약과도 같은 싸구려 유흥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문화예술의 사회적 효과가 말초신경만을 자극하는 가짜 위로만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곤란하다. 값싼 위로로 사람들을 다시 노동에 투입하기까지 자기 삶에 그저 주저앉히는 문화적 산물들은 분명 사회적인 효과를 내긴 하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
대중문화 역시 현실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 ‘반영의 현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압도적인 것은 거짓 위로다.
자신을 돌이켜 보고 세상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문화예술의 본령이고 역할이다. 사회적 경제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문화예술은 사실 존재 자체로 사회적이다.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을 포함한 문화예술 분야의 사회적 경제활동은 새롭게 문화예술의 수요를 확인하고 확대하는 일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이는 자신들의 존립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사회적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지역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필수적이다. 지역 단위의 활동을 조직하지 않는다면, 사회적기업도 협동조합도 그 근거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당연히 이는 문화예술 분야에도 적용되는 사실이다.
문화예술 분야 사회적기업의 60%가 서울경기 지역을 근거로 활동한다는 것은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결국, 시장이 없이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지역에서 새로운 수요를 끊임없이 창출하고, 지역에서 인정받아 새로운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문화예술교육이 창의성과 연계되어 강조되고 주5일 수업이 본격화되고 있는 지금의 환경은 문화예술 분야의 새로운 기회가 열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회적 자본을 확대해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이야 말로 사회적 경제의 중요한 축이다. 지역 내에서 다양한 집단과 연계하여 지역공동체의 활성화에 기여하고 그 결과가 다시 사회적 경제의 활성화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

핵심은 자립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립을 위한 노력이다. 일부 단체들은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 정부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싶다.
물론, 법인격을 가지게 되면 일부 세제혜택을 받는다. 때때로 이것은 사단법인보다 더 유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기업이 매력적인 것은 사회적 문제해결을 위한 활동을 기업의 방식으로 진행한다는 것이고, 협동조합이 매력적인 것은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길드로부터, 우리에게는 향약, 두레, 계에서부터 시작된 자조와 협동의 전통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새롭게 출범할 협동조합의 모델로 호쾌한 기획을 하나 소개한다. 만화평론가 박인하 선생이 주도하고 있는 가칭 ‘은하만화동맹협동조합’이다. 기획은 간단하다. 어떠한 표현의 한계도 없는 만화잡지를 갖고 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는 다들 난색을 표한다. 그렇다면 조합원을 모아 우리가 잡지를 만들어 보자. 출판만화가 빈사상태에 이른 것을 관망하거나 섣부르게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돌파구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잡지가 안정되면 공동구매와 특강, 신인작가 발굴과 만화가들의 생활조건 개선까지 꿈꾼다는 이 장쾌한 계획은 아직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여러 시사점을 준다.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은 분명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트렌드가 아니다. 사회적 문제에 대해(혹은 본인의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가 핵심이다.
이런저런 우려와 한계가 있겠으나 사회적 경제라는 지렛대를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문화예술 활동이 왕성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