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피난 화단이 형성된 것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수도가 임시 이전하면서이었다. 적정 인구 30만 명의 도시 부산에 피난민을 합한 인구가 120만에 달했고, 이들 중에는 홍종명, 박항섭, 황염수, 이중섭, 김형구, 박창돈, 최영림, 장리석, 강용인 등 피난민 미술가와 월남 미술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낯선 피난지의 곤궁한 삶 앞에서 예술가이기 이전에 생활인이어야 했던 이들은 미군 부대에서 배에 기름칠을 하는 부두노동자, 도넛과 과일을 파는 노점상, 도자기 공장에서 화병과 접시에 그림을 그리는 노동자로 생을 연명해 나갔다. 불안정하고 궁핍한 상황만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부산 지역의 피난 화단 미술인은 창작과 단체의 결성 그리고 발표를 부산 소재 다방을 거점으로 계속해 나가고자 했다.

1902년 정동의 손탁호텔 내에 다방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다방으로 개설되고, 1923년 충무로에 금강산 다방이 독립 다방으로 문을 연 국내에서 다방 문화가 전성기를 맞은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에 접어들어서이었다. 문인, 감독, 배우, 음악가 등 예술가들이 운영의 주체였던 다방 운영의 목적은 단순히 차를 팔아 이윤을 남기는 데 있지 않았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1930년대 다방은 ‘무기력한 인텔리들의 집합소’로 비난받기도 했지만, 이색적인 실내 장식과 해외 음악을 접할 수 있는 이곳은 잡지의 발행과 문화제 개최, 전시 발표 등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던 문화 공간으로 기능했다.

피난 화단의 예술가들이 임시 수도 부산에서 주목한 공간 또한 광복동, 남포동, 대청동, 중앙동 일대에 소재해 있던 밀다원, 금강, 춘추, 녹원, 천구, 스타아, 청원, 휘가로, 태백, 파도, 산유화, 온달, 7다방, 루네쌍스와 같은 다방들이었다. 당시『문예지』의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던 광복동의 금강 다방에는 김환기, 손재형, 배렴 등이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고, 금잔디 다방에는 한묵, 이중섭, 유병희, 정규가 포진해 있었다. 피난지 부산의 다방은 오갈 데 없는 미술인들이 차를 주문하지 않은 채 종일토록 앉아 스케치를 하거나 동료를 만나며 폐허가 된 현재의 삶에 대한 재생을 계획하고, 또 실천하는 회합의 공간이자 발표의 장이기도 했다.

1952년은 임시 수도 부산의 다방에서 미술가들의 개인전과 단체전이 잇따랐던 해이었다. <김환기 개인展>(뉴서울 다방), <제4회 종군화가미술展>(대도회 다원), <문신개인展> 김환기, 이준, 한묵, 문신이 참여한 <후반기동인展>(루네쌍스 다방), <도상봉 소품展>(늘봄 다방)을 비롯하여 백영수, 이준, 김은호, 허백력, 전혁림 등의 개인전과 함께 “제작은 우리들에게 부과된 지상명령이다.”로 전시 서문에 비장함을 담았던 <토벽동인展>, 김인승, 박영선, 박득순, 서성찬, 임호, 백영주가 함께 한 <6인展>이 열리기도 하였다.

1952년의 다방에서 개최된 피난 화단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대청동 루네쌍스 다방에서 개최된 <기조전(基潮展)>이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SP판 크리스마스 캐럴이 피난지 부산에 울려 퍼지던 그 해 손응성, 한묵, 박고석, 이중섭, 이봉상이 참여한 동인전은 12월 22일에서 28일까지 일주일 동안 개최되었다. 이중섭의 〈완월동 풍경>을 비롯한 두 점과, 손응성의 〈추제(秋題)>를 비롯하여 당시 전시에는 이봉상과 한묵이 각각 6점씩 그리고 박고석이 5점을 출품한 것으로 전해진다.

주변 예술인들의 관심 속에서 전시의 의미와 성과는 뚜렷했지만, <기조전>은 확고한 예술의 지향에 의한 확고한 결속의 이유를 갖지 못한 채 단명한 당시 여타 미술 단체들처럼 활동이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한국의 화단의 개별적 성취가 뚜렷한 미술가들이 동인으로 참석한 <기조전>은 한국전쟁 당시 우리 미술의 생산 조건들에 대한 이해와 극한의 상황에서조차 전념의 대상으로 엄존했던 당대 미술가들의 예술에 대한 태도를 엿보게 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의미를 지닌다.

<둥섭, 르네상스로 가세!-이중섭과 르네상스 다방의 화가들>은 <기조전> 개최 60주년에 즈음한 서울미술관의 개관 기념전이다. 이번 전시에는 부산에서 동인전이 열렸던 1952년 당시뿐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 동인들의 유화와 드로잉들을 전시에 포함시키고 있다. <기조전>의 의미를 1952년 당대의 것으로 제한하지 않고, 단체전을 전후 한 시기 동인들의 예술 세계의 변화와 전개 과정까지로 그 의미를 확장하고자 하는 기획의 취지로 생각된다.

“회화 행동의 길이 지극히 준엄한 것이며 무한히 요원한 길이라는 것을 잘 안다. 만일 아직도 우리들의 생존이 조금이라도 의의가 있다 친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일에 대한 자각성이어야 할 것이다. 진지하고도 유효한 훈련과 동시에 우리들은 먼저 한 장이라도 더 그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유의하고 싶다.”

-박고석, <기조전> 서문- 

물질적으로는 부족했으나 예술을 디딤돌 삼아 삶 전체의 재생을 꿈꾸었기에 ‘풍요로웠던 결핍’의 시대의 <기조전> 동인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한 장이라도 더 그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지금의 시점 우리가 집중해야 될 문제는 무엇일까. ‘지극히 준엄하며, 무한히 요원하다는 회화 행동의 길’과 관련된 질문이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후대의 평가가 우리 시대의 미술이 풍요로운 결핍의 상태로 기록하기를 원치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