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유학하다 보니 한국의 가족과 지인들로부터 걱정 어린 연락을 받는 일이 잦아졌다. 물론 해외에서 생활한다는 것 자체가 본의 아니게 주위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마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해 3월의 전례 없던 지진과 방사능 유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역사•지리적으로 다양한 이슈를 둘러싸고 민감한 대립의 각을 세우게 되는 것이 빈번한 한일 관계의 탓을 무시할 수 없다. 영토•외교 문제를 둘러싼 긴장 관계가 발생할 때마다, 그리고 뒤질세라 고조된 어투로 이를 보도하는 양국의 미디어 덕택에 본의 아니게 주위 사람들에게 신변의 위협, 혹은 불리한 처우를 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끼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필자는 사실, 실제로 그러한 긴장관계가 발생할 때마다 신 극우파를 만나 폭행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이나 혹시 일상생활에서 이런저런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특별히 하게 되지는 않는다.

외국에 사는 이상, 아니 설사 한국에 산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이유로든 갑작스럽게 폭행 혹은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는 태평함 혹은 극히 비관적인 태도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매번 괴롭게 하는 것은 단지 감정을 동반한 즉각적인 반응이 아닌 논리와 균형 잡힌 시각으로 현안을 해석하고 반응하기 위한 고민들이다. 때때로 저돌적으로 한일 이슈에 대한 의견을 물어오는 일본인들에 대한 대응은 물론, 보다 근본적으로는 일상생활에서 생각을 나누며 공부를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나름의 접점과 연대의 지점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일본에서 생활하는 외국인으로서 나름의 입장과 태도를 가지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고민인 것이다.

서로 다른 인식의 출발점

이러한 고민들은 물론 결코 수월하지 않다. 특히 날이 갈수록 곤란함을 느끼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역사에 대한 인식의 지점 자체가 다름을 확인하는 경험을 거듭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소한 좌절들이 근본적인 회의와 부정, 즉 인식과 입장의 근본적인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너무도 손쉽지만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결론으로 손을 내밀도록 강하게 유혹한다는 점이다.

일본에 와서 이른바 역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라는 것을 가장 즉각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던 것은 역시 8월이 되어서였던 것 같다. TV에서 8월을 기억하는 다양한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시작하였을 무렵, 가장 어색하고 또 놀라웠던 것은 이들의 서사가 8월 15일이 아닌 그 이전, 바로 히로시마(廣島)에 원자 폭탄이 투여된 8월 6일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껏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의 역사 교육을 받고 자란, 따라서 8월과 관련한 모든 역사적 기억은 이른바 해방과 독립의 날 15일을 기준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필자로서는 꽤나 생경할 수밖에 없는 8월의 시작이었다. 역사적 기억이라는 것이, 특히 전쟁과 같이 첨예한 이슈와 관련해서는 각자의 경험과 의도에 따라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는지, 이제껏 지식으로만 이해해온 사실을 실로 몸으로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머리로는 당연하다 치부했지만 사실은 하나도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너무도 당연하겠지만, 1945년 8월 15일은 일본과 한국에 정반대의 역사적 전개를 가져온 날이다. 한국에서는 해방의 날, 독립의 날로서 환희에 찬 성취의 순간으로 기억되는 그 날이, 일본에서는 종전의 날, 이른바 분함과 절망을 맛볼 수밖에 없었던 패배의 날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8월 15일이 히로시마 원폭이 있었던 8월 6일과 비교하여 미디어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 전반적으로도 훨씬 조용하고 소극적으로 다루어지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당시의 경험을 현재로 불러옴으로써 전쟁이라는 것 전반, 혹은 국가에 대해 고찰하는 특집 프로그램들은 습관처럼 매해 되풀이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여전히 어서 잊어버리고 싶은, 그래서 가능한 한 소란한 언급을 피한 채 조용히 8월 15일을 보내고픈 사회적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피해자 서사만으로는 부족한

그렇다면 8월과 전쟁을 테마로 일본 관동 지방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방송들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과 서사를 가지고 있을까. 일본에 와서 가장 먼저 보게 된 8월 특집 프로그램은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마주친 일본 TV(日テレ)의 밤 11시 뉴스의 한 특집 코너였다.

일본 TV는 요미우리(讀賣)신문의 계열사 방송국이기 때문에 같은 시간대의 아사히(朝日) TV 등에 비교하면 그 어조나 입장이 보수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거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뉴스 리포터에 연예인을 고용하거나 다양한 방식의 뉴스 구성을 시도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어서, ‘연성화’라는 일본 뉴스 프로그램의 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방송국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날 보았던 뉴스의 특집 코너 또한, 히로시마 원폭을 되새기기 위해 전쟁에 대한 기억도 관심도 전무하다 할 수 있는-이른바 요즘 세대의 일본 젊은이의 일반적인 특성을 대변하는-20대 초반의 여배우가 히로시마 원폭을 직접 경험한 여성 피해자를 방문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를 듣는 형식의 코너였다.

방송은 그녀가 히로시마를 직접 방문해 원폭 피해와 관련한 다양한 기념 시설들을 방문하며 원폭의 피해를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원폭 피해를 직접 경험하고 당시의 고통을 평생 안고 갈 수밖에 없는 한 일본 여성을 만나 그녀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며 당시의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공유하였다. 그리고 방송이 후반으로 갈수록 리포터 여배우는 이토록 참혹한 고통을 동반해야 했던 전쟁에 대해 이제까지 별다른 관심도 의식도 없었음에 대한 후회와, 원폭의 경험과 그 이후의 삶이 얼마나 혹독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애도의 눈물을 흘리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리고 방송의 마무리는 원폭은, 전쟁은 절대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스튜디오 앵커들의 코멘트로 끝이 났다.

사실 이 방송의 구성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억과 당시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요구하는 방송이 가지는 (이미 너무도 익숙한) 전형성을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더욱이 기본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같은 여성으로서 화면 속 그녀들의 감정과 공감에 동조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을 보는 내내 어떠한 곤란함, 혹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개운하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한 어떠한 감정이 더해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과연 이 불편한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 단순한 해석은 과연 일본의 전쟁 경험이 이른바 이와 같은 피해자 서사만으로 이야기되어도 되는가 하는 물음일 것이다. 이 방송뿐만 아니라 다른 일본의 전쟁 관련 특집 방송들 또한 너무도 손쉽게 되풀이 하는 서사, 일본이라는 가해자로서의 국가와 일본 국민이라는 피해자로서의 개인이라는 대립항 구도가 어딘지 모르게 계속 불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고통을 부정하는 것도, 그로 인해 미국을 비롯한 전쟁 참여국가의 민간인 학살을 지지하는 것 또한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전쟁과 국가라는 거대 서사에 의해 모든 것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로서의 일본 국민에 대한 강조와 서사는 여기저기 산재하는 반면, 또 다른 피해자들, 즉 당시 일본의 국가/국민에 의해 동일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한국을 비롯한 다양한 아시아의 국민/개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너무도 명쾌하게 분리하여 국가에게 전적인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오히려 국가를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는 허상으로 만듦으로써 과거를 회피하고 망각하기 위해 동원되는 서사는 아닐까?

하지만 국가와 국민, 피폭을 경험한 그녀와 일본 국가는 어디까지 동일시 될 수 있으며, 그녀와 아시아의 또 다른 피해자들의 연대의 지점은 진정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일본 국민의 피해와 고통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고통의 경중을 따지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전쟁으로 인해 동일한 경험과 고통을 겪어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 또한 함께 해주기 바라는 것은, 단지 나라는, 이른바 피해자로 위치 지어진 국가에서 나고 자라 그곳의 서사가 자기도 모르게 익숙해져 버린 이가 떨쳐버릴 수 없는 피해의식 같은 것일까?

지식으로서의 전쟁

올해 8월의 방송 가운데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저널리스트 이케가미 아키라(池上彰)가 출연하는 세 시간의 특집 방송 <이케가미 아키라의 전쟁을 생각한다-전쟁을 일으킨 독재자와 열광(池上彰の戰爭を考えるSP-戰爭を起こした獨裁者と熱狂)>(도쿄 TV, 2012.8.12)였다. 이케가미 아키라는 일본의 유명 인기 저널리스트로서, 특히 프리랜서로의 전업 후 사회•문화•역사•경제 등에 관한 전문 지식을 누구나 알기 쉽게 대중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송과 서적 출판으로 큰 인기와 신뢰를 얻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 방송에서 이제까지와 다르지 않은 ‘지식 전도•해설자’의 위치에서 사람들이 미처 몰랐던 전쟁에 관한 지식들을 함께 출연한 몇 명의 연예인 게스트들과 함께 밝혀 나갔다. 이를테면 일본을 비롯한 전쟁 참여 국가들이 ‘종전’ 기념일과 그에 대한 의미 부여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서부터, 일본의 전쟁 의지가 만주사변 등 당시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 간의 패권 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내용, 그리고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며 일본이 겪었던 다양한 전투에 관한 자세한 설명과 당시의 군 지도부의 성격,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무수한 전쟁의 현실에 관한 소개가 그 주된 내용이었다.

이는 새로운 역사적 사료를 발굴하여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주장하거나 전쟁 경험자들의 경험을 통해 전쟁을 감정•감각적인 방식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이제까지의 타 방송들과는 또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는 방송이었다.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의 서술을 마주하는 것, 따라서 전쟁의 기억과 관련한 구체적인 역사 교육을 회피하는 현대 일본의 상황을 떠올려본다면, 오히려 이렇게 정색하고 전쟁을 ‘알아야 하는 지식’으로 구성해가는 형식의 프로그램은 일면 고무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어떠한 논의를 전개하기 이전의 가장 기본적인 정보조차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의 반증인 동시에, 그들의 경험을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그저 책에 나오는 건조한 ‘지식’으로 재구성해낸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들이 역사를 여전히 ‘경험’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실제로 방송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사실 이제껏 되풀이되어온 다른 방송들의 서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피해자로서의 일본 국민 이외의 다른 피해자들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이 방송은 당시 일본이 만주국을 건설했던 중국의 만주 지방에 취재를 떠나 일본의 건물이나 당시 생활의 흔적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거나, 거리의 중국 시민들을 취재하여 대일 감정을 묻고, 당시 전쟁을 경험했던 중국인 노인에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본에 대한 감정이 호감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인터뷰를 내보냄으로써, 결국에는 전쟁의 다른 피해자들을 동원하여 식민지 근대화론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게 하였다.

게다가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일본의 전쟁 몰두가 시작되었음을 조명하지만 그 이전에 이루어졌던 조선에의 식민지화, 그리고 그 이후의 전쟁 동원 등에 관한 언급과 문제 제기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 또한  방송을 보는 내내 계속 불편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었다. 그렇게 무려 3시간 동안 지속된 방송은 지금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 멈추지 않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는 이들의 고통을 조명하며 전쟁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을 파괴하는지, 따라서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를 역설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맺었다. 하지만 역사적 경험에의 적극적인 개입 없이 단순한 지식의 나열, 누구나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일반론만을 나열하는 끝맺음은 그저 공허한 외침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연대의 지점을 찾기 위해

일본의 유명한 프랑스 문학 연구자인 스즈키 미치히코(鈴木道彦)는 그의 저서 『월경하는 시기-1960년대와 재일(越境の時 1960年代と在日)』에서 우리, 혹은, 자신 그리고 일본인으로서 재일조선인 문제란 무엇인가에 관해 사고한다. 여기서 그는 이른바 “민족책임”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아프리카 알제리의 독립 투쟁에 대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를 비롯한 여러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프랑스/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특정 국가에 대한 탄압과 부정이 이루어질 때 이에 대해 반발하지 않는 것은 결국 식민 체제의 존속에 기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며 알제리 독립 투쟁을 지원했던 것처럼, 자신도 재일조선인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사고하기 시작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물론 여기서 다시 ‘민족’을 규정하는 것, 즉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그럴 수 없는 이들-이를테면 앞에서 살펴본 피폭 피해자 여성은 과연 어디까지 국가와 동일시하여 자신을 ‘국민’이라 말할 수 있을까-의 문제를 비롯하여 “민족책임”이라는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에는 더욱 섬세하게 살펴보아야 할 지점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 입장의 위치는 각자 세밀하게 다르다 할지라도, 일정 수의 일본인 학자들이 일본의 전쟁 경험과 재일조선인 문제 등을 매우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태도를 가지고 연구해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의 성과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적 경험을 성찰적으로 해석하고 그를 바탕으로 단순한 대립 구도, 혹은 국민/국가 경계를 벗어난 연대의 지점을 찾기 위한 노력들이 보다 대중적인 담론으로 유통되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낀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대중적인 담론의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미디어, 단지 이제껏 살펴본 일본의 미디어뿐만 아니라 한국의 미디어들이 말 그대로 ‘제3의 비판적 기구’로서의 역할을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