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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다른, 그리고 다양한
통권 : 36 / 년월 : 2012년 9,10월 / 조회수 : 1489
드라마 <즈칭> 논쟁에 관하여 말하다

중국인에게 일반적인 ‘즈칭(知靑)’지식청년이라는 뜻은 도시에서는 혁명을 한답시고 싸우거나 동네에서 소란을 피우던 무법천지의 홍위병(紅衛兵)이었다가, 상산샤샹(上山下鄕)1) 이후에 시골로 보내져 재교육을 받을 기회를 상실한, 소중한 청춘을 헛되이 낭비한 피해자였다. 이런 즈칭들은 당시 죽을힘을 다해 도시로 돌아오면서 모두들 “종이 한 가득 황당한 말뿐이고, 한줌의 쓰린 눈물을 흘린다.”(‘황당’은 그 시절을 표현, ‘쓰린’-혹은 더 적합한 단어는 ‘상흔’-은 자기 자신의 처지를 묘사)라는 말로 자신들의 처지를 표현했다.

즈칭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관념을 근거해 생각해보면, 2012년 중국 대륙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즈칭>(중국 CCTV1, 2012.5.29~6.24, 방영 당시 시청률이 가장 높았음)을 둘러싸고 일어난 비난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즈칭>의 1회는 즈칭들이 베이다황(北大荒)에 도착하여 기차에서 내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기세등등한 분위기로 신이 나서 크게 외친다. “베이다황 우리가 왔다!”, “베이다황을 향해 경례!” 등. 늙은 즈칭 세대는 이러한 장면에 불만을 표시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 생각에 즈칭의 상산샤샹은 유배와 다름없었고, 평소에 떠들썩한 도시생활에 익숙한 즈칭들이 빈궁한 시골, 심지어 황량한 변경지역에 도착했을 때, 기차에서 내린 그 순간은 ‘처참’이라는 단어 외에 자신들의 처지를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드라마 <즈칭> 전반에 흐르고 있는 분위기는 오히려 ‘온정’이다. 극 중 인물인 장징옌(張靖儼)의 말을 인용해보면, ‘이러한 황당한 시절에 우리는 서로 미워하거나 원망하기보다는 온정과 우애로 사람들 사이에 존재했던 미움과 원망을 최대한 녹여내 보자’라고 하고 있다. 이는 드라마 작가와 감독이 현재의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실제 즈칭 세대는 이런 ‘질박하고 자연스러운 진정한 서사시’ 형식의, ‘특수한 시기에 대한 온정의 표현’이라는 내용이 모두 즈칭의 실제생활의 비극적인 본질을 숨기고 미화하는 것이며, 이는 곧 과거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자 조소, 또한 후대 사람들에 대한 기만이고 우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즈칭>이 확실히 즈칭을 다룬 기존의 작품들과는 다른 양상을 가졌다는 점을 드러낸다. <즈칭>은 특수한 시절을 집중적으로 비추고는 있지만, 이전의 늙은 간부들과 지식인들이 구구절절이 풀어놓던 그 시절의 고단함과 비정함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시절 특유의 비판투쟁 혹은 무력투쟁에 관해서도 이전보다 훨씬 담담하게 묘사하거나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 시절에 일반적으로 해체되었다고 생각했던 각종 온정(소위 부모님보다도 마오 주석이 더 가깝다)이 드라마 <즈칭> 안에서는 가장 보호해야 하고, 키워나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물론 <즈칭> 안에도 급좌파 세력은 존재한다. 베이다황의 우민(吳敏)이나, 산베이(陜北)현 혁명위원회의 두(杜) 주임, 공사(公社)의 뉴(牛) 주임이 극좌파 세력으로 파괴의 역량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파괴의 역량이 도리어 온정 자체를 더 공고하게 만들고 위대해 보이게 하는 반대급부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즈칭>에서는 이 시절 대부분의 책을 금지서적으로 지정하고 홍색서적만 허용하여 즈칭의 지식욕을 탄압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 지식욕 대신에 부대의 군인들이 베이다황을 개간한다거나, 농촌생산대 소속의 즈칭과 산베이의 농민들이 힘을 합쳐 생활로를 개척하고, 산동(山東) 농촌생산대 소속 즈칭이 생활의 곤란을 겪으면서도 진심을 다해 농민들을 재교육시키는 활동 등을 보여줌으로써, 즈칭들이 자신의 귀중한 청춘 세월을 허비한 것이 아님을 묘사한다.

그러나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즈칭>이 완전히 다른 양상만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즈칭>의 ‘특수한 시절에 대한 온정의 표현’이라는 주제는 근본적으로는 동질화된 시대에 대한 평범한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즈칭>이 세상 사람들이 또 속을까 걱정하는 늙은 즈칭 세대와 의분에 가득 찬 지식인들도 충분히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민의 아버지는 편지를 통해 우민에게 ‘즈칭의 상산샤샹은 계속해서 배출되는 졸업생들의 취업난을 해결하기 위한 위대한 영수의 임시방편이었다’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즈칭>은 즈칭의 ‘국가적 사명’에 관해서 최대한 약화시켜 묘사한다. 물론 드문드문 언급하기는 한다. 국가가 외화로 바꾸기 위해 베이다황에 여러 종류의 콩을 심던 일이 그 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사명의 신성성에 대해서 과장하지는 않는다. 그저 앞으로 닥칠 고난을 대비해서 스스로를 안위하기 위해서 한 활동처럼 묘사한다. 결정적으로, <즈칭>은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을 부정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감독인 장신 (張新建)은 거듭해서 문혁을 부정하는 원칙 하에서 드라마를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극 중 인물 사이에 존재하는 온정은 그 시대가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개인의 인성에서 발휘된 것이다. 이러한 ‘인성의 발휘’에 대한 강조를 통해 그 시대에 끊임없이 주장되던 ‘계급투쟁이 최고’라는 생각을 부정하고 있다.

<즈칭>은 ‘문혁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였는지’, ‘어떻게 젊은이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상산샤샹 정책 시행 원인에 관해서 간단히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저 ‘그 시대는 비정상적인 시대’였고, ‘그 시대의 중국은 체호프(Anton Chekhov, 1860~1904)의 <제6병실Palata No.6>과 같았다’는 사실이다. 빠르게 지나가버린 이 비정상적인 시기에, 인성의 발휘만이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선사해줄 수 있었고,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해주었고, 사람들을 새로운 광명의 미래로 향하게 하였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장신은 상흔문학과 반사문학은 이미 너무 많이 나왔고, 때문에 상흔에 대해서 거듭 말하는 것은 더 이상 재미없다 하였다. 이것이 바로 <즈칭>이 즈칭에 관해 다룬 기존의 작품들과 다른 양상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러나 더 이상 상처를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다른 드라마에서도 일상적으로 다루고 있는 온정이라는 주제를 다룬 점에서 <즈칭> 또한 다른 드라마와 차이 없이 ‘세속적이고 평범한 경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즈칭>의 배경은 문혁 시기지만, 이 드라마는 절대 역사적 맥락 안으로는 들어가지도 않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끌어내지도 않는다. 그저 인성, 생명, 적극적 정신, 이런 미사여구로 스스로를 채워 넣는다. 만약 문혁이 막 끝난 1980년대였다면 이러한 미사여구가 계급투쟁이라는 단어보다 더 내재적인 진실성을 갖추었다고 판단할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이미 현실은 완전히 변화했고, 농민이란 직업은 사회의 한 계층에 속하는 직업의 하나일 뿐이다. 즉, 계급담론 자체가 자취를 감춘 오늘날, 여전히 이런 천편일률적인 미사여구를 남발하는 것은 드라마 <즈칭> 자체의 공허함과 평범함을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즈칭>의 다르면서도 평범하다는 특징은 극 중 인물인 자오수광(趙曙光)에게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생각을 끌어내는 인물이자 산베이 농촌생산대에 참여한 즈칭으로, 뿌리 깊이 홍색사상에 물들어 있고, 대대의 당위원회 서기까지 맡은 경험이 있었다. 그는 지역의 농민들과 어울리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고, 동시에 그들과 같은 운명이라고 여기며 함께 호흡하며, 적극적으로 빈곤함을 극복하기 위한 생활로를 개척했다. 또한 영원히 포디춘(坡底村)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는 그 자체가 혁명적인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 인물을 통해 표현하는 것은 중국이 병들었었고, 추구해야 할 것은 ‘생명, 자유와 사상의 권리’라는 것이다. 그는 각 영역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이야기하고자 했다면 비교적 전형적인 시골인 포디춘 안에 당시 존재하던 구체적인 문제들을 가장 잘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인물을 매우 애매하게 처리함으로써, 이와 관련된 모든 문제의식을 막연하고 모호하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문혁과 즈칭에 관해서, 권력담론으로 인하여 우리는 타도 당한 늙은 간부와 상처받은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만 치중하여, 농민의 목소리는 거의 듣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상, 즈칭의 상산샤샹의 핵심은 지식인과 농민의 만남과 결합이고, 이는 문혁만이 가진 독특한 특성이 아니라, 일종의 역사적 요구이고 기대라고 할 수 있다. 소위 현대화, 공업화와 도시화의 내재적인 압력하에서, 지식인과 농민의 결합은 줄곧 소외된 세력이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이었다. 근대 중국에서는 특히 민국(民國, 1911) 이래로 장스자오(章士釗, 1881~1973)의 농업으로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주장을 시작으로, 민국혁명 안에서의 농민운동, 1930년대 국민당통치구의 향촌건설과 홍색근거지의 토지혁명 사이의 상호경쟁, 마지막으로 공산당 영도하의 농민해방운동이 역사적 승리를 거두는 과정이 존재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 안에서 일부 혁명사상을 가진 사람들-마오저둥(毛澤東, 1893~1976)과 량수밍(梁漱溟, 1893~1988이 가장 전형적 인물들이다-은 본래 서로 다르게 나아가야 할 길을 설정해 놓았다가, 후에 같은 방향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곧 중국문제가 농촌문제이고, 지식인과 농민의 결합이라는 방식으로 중국의 혁명성 문제를 해결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줄곧 향촌에 대한 내재적인 식민화 방식을 통해서 활로를 개척해왔고, 선진국은 후진국에 대한 식민화를 시행하여 후진국 전체를 원료공급지이면서도 시장의 판매장소인 향촌사회로 삼으면서 발전해왔다. 자본의 원시 집적 과정 안에서, 식민자들은 종족을 학살하고 피 비린내 나는 진압을 자행했다. 이때 농민들의 숨겨진 고통과 소리 없는 아우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현대 중국의 혁명성 문제는 본래 역사적 사명으로 농민의 정치주체성을 키우는 것이 목표였고, 농민이 단순히 생산노예의 자격으로 자본주의의 한 계급 안에 속하게 되는 대신 현대 생활 세계 안에서 평등하게 각종 권리를 향유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53년 이후에, 6•25전쟁이 중국에 외적 내적 압박으로 작용하면서, 국가공업화, 특히 중공업화는 최고의 역사적 지위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마오저둥은 량수밍에게 이것이 바로 대인정(大仁政)이고, 농민에게 작은 선심을 베푸는 것은 소인정(小仁政)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때부터 중국에는 장기적으로 역설적인 현상이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일련의 제도(예로 농촌 집체화, 양식 통일 구매 소비, 도시와 향촌 이원화 체제의 확립, 농공산품 협상가격차 형성)를 통해 자본의 원시 집적을 완성하였는데, 이는 선진 자본주의의 발전과정과 비교해보면, 사실 외재적인 식민지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외에 이데올로기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각종 반등하려는 역량에 대해서는 무조건 자본주의의 커다란 독초로 보았다.

마오저둥의 개인 특성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필요성으로 인해서, 농민은 경제 구조 안에서는 수탈을 당하는 위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존엄한 위치를 점했다. 그러나 이 정치적 위치 또한 개혁개방과 함께 점차적으로 약화되었다. 대신에 농가생산청부제2)의 개혁과정에서 농민은 부분적인 경제적 이익은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러,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다른 제도가 결합하면서, 샹전(鄕鎭)기업3)이 줄줄이 도산하였고, 이에 따라 농민공4)들도 시골을 떠나 도시로 유입되었다. 이에 자연스럽게 농민들이 그간 누리던 소소한 경제적 이익들도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그 후 21세기에 이르러, 또 신농촌건설이 유행하게 되고, 대학생 촌민위원회 간부 또한 재현되었다. 장신졘은 상산샤샹은 반드시 부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대학생이 시골에 가서 촌민위원회 간부 맡는 것 또한 격려해서는 안 된다. 이 또한 청춘을 허비하게 만드는 역사가 재현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즈칭의 연이은 고통의 호소 안에 이제껏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은 전제가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농촌은 비천한 곳’이고, ‘그들이 기대하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확실히 도시가 취업의 기회도 많고, 공공위생도 잘 갖추어져 있으며, 생활보장도 되어 있고, 오락시설도 더 많고, 현대문명이 한 곳에 모여 있다. 상대적으로, 농촌은 당연히 모든 면에서 이보다 떨어진다. 이런 곳에 누가 굳이 살기를 원하고 기대하겠는가?만약 누군가가 농촌의 장기적인 발전과 평등 원칙의 실현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면, 문제는, 어떤 방식을 통해서 누가 그곳에 가서 고생을 하겠냐는 것이다. 방안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지원이다. 둘째, 정치와 행정기획이다. 셋째, 도시취업 스트레스의 해소이다. 문혁 안에서 실행되었던 이 상산샤샹 정책은 위의 세 가지 방안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곧 이 거대한 정치운동이 가진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복잡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오늘날에 이르러, 아직까지 같은 목소리만 계속해서 듣기를 원하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각종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장신졘은 <즈칭>의 방영이 기존 즈칭이라는 소재의 역사적 견고함을 깨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실 근본적으로 문혁(또는 상산샤샹)을 부정하는 원칙에 따라서 문혁을 분석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는 <즈칭>이 완전히 주류를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즈칭>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른 목소리가 많아진다면, 역사의 복잡성과 생활의 다양성을 형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즈칭>이 이러한 다양성의 역사적 견고함을 깨는 하나의 시도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저자 약력
王悅之필명 1980년 중국 후난(湖南)성생. 칭화(淸華)대학교 역사학과 박사과정. wangyz622@gmail.com

#주석
1) 도시의 학생이나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들어가서 농촌 대중과 함께 대중을 위한 문화를 구축하려고 하는 운동 2) 국가가 개별 농가와 계약을 맺어 초과 생산된 농작물은 시장에 내다팔 수 있게 한 제도 3) 중국의 개혁개방운동에 따라 1978년부터 각 지역 특색에 맞게 육성되기 시작한 소규모 농촌기업 4) 중국에서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는 하급 이주 노동자

번역_ 金仙暎 칭화대학교 중문과 박사과정
글쓴이 : 왕위에즈
작성일 : 201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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