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건물, 두 장의 엘피판…… 도보를 표류하는 구명보트. 정적과 절규로 ‘폐쇄된’ 공간들, 디트로이트 어느 노동자의 술집거리에서 케이프타운의 가정집 서재에 이르기까지. 대재난의 지옥에서 총부리를 겨누는 시선과 구호품을 건네는 몸들. 그리고 구원처럼 도착하는 사람의 사랑…… 새 소식. 소식은 이미 새롭다는 뜻을 내포하지만, 이 페이지에서 조우할 지난해의 기념비들은 우리를 더는 전과 같을 수 없도록 만들었으므로 새롭다는 말을 한 번 더 붙인다. 사실 지금은 2012년 12월, 나도 이 글을 2013년이 되어서야 책자로 보게 될 것이다. 그때는 대통령이 바뀌어 있을 테고……. 늘 그렇듯 기회를 희망하며, 속속들이 도착할 신상품 카탈로그처럼 화사한 현실을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미의 서열로 시간을 축적해 삶의 계열을 창조하는 것이 문화이고 비평이며, 인간의 자유임을 작품들에서 배운다. 그러니까 내일은 오늘의 폐허에서 시작해야 하리라. 그러니까 이 글은 가까운 미래의 망각을 대비하는 나의 비상식량이다.

영화 <피에타> :

출구 없는 폐허-철거촌의 악마와 가족신화

 청계천변 폐업한 철공소들 사이 듬성듬성 남은 가게들. 주인공 이강도의 구둣발이 침입한다. 허름한 공장 사장들은 그에게 대출을 받았고, 원금보다 이자가 주체인 빚을 갚지 못한 이들의 신체를 그는 거침없이 절단해 보험사기로 고용자의 금고를 충당한다. 그에게는 분노가 내재해 보이지만 그건 자기연민보다는 냉혈한의 공명정대함으로 발휘된다. 그를 살아가게 하는 건 대출과 수금 및 징계라는 경제활동, 동물 도살 취미(자기가 먹을 저녁거리를 직접 마련코자), 출근 전후에 여성나체화 표적에 칼을 던지는 의례, 그리고 침대에서의 자위행위라는 다섯 점을 통과하면서 서서히 죽음에 이르는 원형운동 같다. 그러다 고아인 그에게 엄마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나타나면서 심리상담사가 아니라도 개인의 트라우마를 죄인으로 지목할 만하게 상황이 조성된다. 그 끔찍한 단호함 탓에 그는 공포의 대상일 뿐 해석의 대상이 되지 못했지만 이제야 관객의 시선이 맺힐 여지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엄마라면 아들을 끝까지 견뎌보라며 자신의 살점을 먹이는 시험을 하고, 처벌하듯 출산 부위를 뚫고 들어가려 한다. 몹시도 슬픈 엄마-미선은 고문을 견뎠고 비로소 그에게서 받아들여진다. 이 여자의 태도를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너의 빈곳, 너의 망각, 너의 상처, 네 죄의 시초 즉 유일무이한 무엇이다. 마치 짐승보다 못한 하류인생을 한국적 휴머니즘―가족애의 세계로 포섭하겠다는 듯 영화는 신파적 방안으로 확산되어갔다. 모성을 소유하자 그는 타인의 절규를 듣기 시작한다. ‘고객’들이 아무리 울부짖고 매달려도 무감했던 그가 사연을 청해듣고 당장의 폭력을 모면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멈추지 않는다. 그의 극악한 처벌이었던 것이, 이제는 구조의 피해자 스스로 택한 삶의 도박으로 변환된다. 자살로서 마지막 희망을 놓아버리거나 스스로 신체를 절단해 가장으로서 위기 타개책을 마련코자 하는 것이다. 그 역시 더는 이전의 쳇바퀴를 돌지 못하게 된다. 불길한 기운이 눈 깜짝할 새 차오른다. 폭력을 멈추자 증오의 눈길이 덮쳐왔고 그것이 자신의 엄마를 위협한다고 느낀 그는 대응하더라도 방어할 뿐 공격하진 못한다. 한편 미선도 그를 불안의 심연에 가두려한다. 그녀는 자작 인질극을 벌이면서 엄마 잃는 공포에 그가 못 박히게 하고, 그러면서 그 자신의 자취를 더듬도록 유도한다. 그녀는 사실 그를 위한 마리아가 아니었고 복수의 화신이었다. 그녀는 결국 자살로서 계획한 복수를 완성한다. 그녀를 묻어주다가 그는 또 다른 시신을 통해 전모를 알게 된다. 미선의 진짜 아들의 자살에서 시작된 이 비극은, ‘가짜’ 아들의 정신적 죽음으로 정점을 친다.

 ‘나는 한다. 그리고 한다. 그리고 또 한다.’ 그는 생애 처음 ‘감정’을 품게 되었지만 충분히 음미할 새가 없이 외부로부터 암시된 욕구의 논리에 따르듯 매순간 무언가를 결행한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 바로 옆에서 지시하는 것처럼, 정지버튼 고장 난 기계처럼. 그러나 그가 과연 가족애를 몰랐기에 ‘악마새끼’였던가? 죽기 전 그는 버림받은 아들로 ‘가장’하는데, 애초에 그가 받아들인 것은 엄마인가 아니면 이 사회의 통속적 가치인가. 그는 악마적 순교자인가? 피해자의 트럭 밑에 갈고리로 자신을 매단 그는 무엇으로 산화했는가. 이 영화에서 특히 가족관계는 절망적인 세상을 견디는 모순적인 힘이다. 엄마에게 효도해야 한다, 아들을 번듯하게 키워야 한다, 이 가련한 강박들은 생활을 버티는 방편이지만 그 속에는 도망쳐야 할 끔찍한 고통이 존재한다. 자본주의가 낙오자에게 가하는 심판은 비물질적 가치들을 왜곡시킨다. 추락 혹은 절규. 그러니 이런 공간에서 대체 사랑이나 죽음이 무슨 의미인가. 풍선이벤트에 참여하는, 노골적으로 진부한 시퀀스를 주인공 모자가 사랑을 누리는 장면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연인처럼 거리를 활보하고 서로 먹여주고 풍선으로 장난을 치고, ‘내 엄마야’, ‘내 아들이야’ 해가며 타인에 대한 공동방어로서 정을 확인해간다는 전개는 이 영화의 기괴한 풍자였다. 그리고 미선이 이강도의 살점을 먹은 것, 자위를 도운 것, 자살에 앞서 진짜 아들의 시체를 다시 보러 간 것 중 엄마인 그녀에게 가장 통렬한 자각을 불러온 것은 두 번째였다. 모욕의 한계를 넘어선 육체경험보다 그녀에게 고통을 준 것은 복수를 위하여 수행한 절대적인 모성논리로서, 그 일을 한 뒤, 거울에 비친 자기의 환멸과 분열을 보는 일이다. 상징적인 역할에 몰입한 인간의 자기혐오다. 모든 현실논리가 깨져버린 순간, 생과 사의 경계가 흐릿해져 도리어 지금 이 순간만이 강렬해지는 때, 사람들은 대체 자기 안에서 어떤 힘을 느끼는 걸까. 일찍이 볼테르는 외쳤다. “이 세상의 폐허를 응시하라/ 당신 종족의 파편들과 재를 보라.”

영화 <서칭 포 슈가맨> :

발굴된 폐허-개인과 집단의 공명으로서의 대중음악

 또 지난 가을에는 <서칭 포 슈가맨Searching for Sugar Man>이 제천음악영화제에서 예술영화상영관으로 자리를 옮겨 개봉되었다. 정처 없는 기타소리에 ‘슈가 맨sugar man~’하고 도시의 슬픔이 호명되고, 나지막한 베이스 연주는 낡은 코트를 입은 남자의 걸음걸이처럼 나타난다. 음악은 낮과 밤의 길목처럼 이따금씩 갈라지고 구부러져, 양쪽 스피커에서 서로 다른 파트가 비어져 나오고, 중간 중간 새 울음이나 기계음을 닮은 효과음이 사람들 모습을 담은 가사에 빛을 점점이 찍는다. 이 빼어난 곡들의 주인은 누구인가. 다분히 음악영화다운 질문에서, 전설적 뮤지션을 회고하는 기행처럼 영화는 출발했다. 종적이 묘연한 그. 가장 유력한 설은 ‘슈가맨’ 시스토 로드리게즈(Sixto Rodriguez)가 히피세대의 몇몇 아티스트들처럼 요절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기적을 맞을 준비가 된 보통 사람들이 있고, 막다른 길 바깥―‘여기’에 희망이 흐른다. 하나는 미국에서 상업적으로 완전히 실패한 음반 두 장이, 1970년대 당시 인종분리정책의 고립에의 강요와 착취로 신음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우연히’ 재발견됨으로써, 당사자도 모르게, 저항운동의 테마음악이 되어준 일이다. “해방의 제스처가 억압을 만나 더 많은 해방의 제스처들과 진정한 개방을 촉발했다.”(267면) 게다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슈가맨’이 디트로이트에서 평범하나 각성된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왔다니.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음악을 통해서 현실을 직시하고 주체적인 삶에 대한 열망을 키운 바로 그 방식으로, 자신들의 외침도 사랑했던 그들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성사된 특별한 만남이 낳은 기쁨이다.

 만약 고난을 겪고 그것과 싸웠으며 그것에서 나온 소망으로 설레었던 당신의 과거가 지금, 매일의 호흡으로 어딘가에서 꿋꿋이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감정과 행동을 불러내게 될까. 삶은 어떻게 재정의할 수 있을까. 개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서 사회적 봉기로, 때늦은 성공담이 될 만도 했건만 이 다큐멘터리는 삶의 먹먹한 기쁨을 관객에게도 나누어주었다. 인간과 음악, 팬과 뮤지션, 관객과 등장인물 사이 구분선은 이음선이 되었다. 70세가 된 로드리게즈가 겨울햇살에 창문을 열고 멋지게 닳은 옷을 입은 채 눈밭을 산책하는 현재진행형 장면들에서, 정체성을 자기 아닌 다른 곳에 비추어서 확인하는 이들의 시간집합을 생각했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 :

재난의 두 얼굴-지옥에서의 섬광

 이 글에 인용된 볼테르의 시구와 따옴표 표시된 문장은 2012년의 사회과학서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발견한 글귀들이다. 저자는 지진이나 홍수 등 대재난의 예에서 자연재해가 실상 인재(人災)이며, 그 사회의 기존 제도와 시민사회의 상호부조에 따라 결과가 극단적으로 달라짐을 역설한다. 위기 앞에서 ‘평범한’ 인간은 이웃을 향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결국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란 물음에 이 책은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을 전달한다. 가장 놀라운 것은 재난 시에 평범한 사람들은 (일반적인 믿음과 다르게) 패닉을 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현실논리를 정지시켜 서로의 차이를 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은 폐허에서 사회가 재건되기까지의 과도기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한편엔 상호구제의 유토피아를 즉흥적으로 마련하는 혁명적 움직임이, 다른 한편엔 권력체계의 독점이 깨질까봐 하위계층에 대한 소문과 편견, 폭력을 조장하는 제도가 있었다. 재난을 겪은 사회는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거의 없으며 지역문화가 극적으로 발전하거나 역행하게 된다 한다. 그리고 혁명에서 테러까지, 거리의 역사를 살피면 살아있는 자들의 연대가 사랑과 죽음의 성격까지도 바꾸어놓는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

 만약 내가 타인의 작품을 만나 개인적 불안과 상실의 맥락을 재창조할 수 있다면 이는 곧 단절감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작품은 그 자체로 공동체일 것이다. 대개의 작품은 시간의 폐허에서 돋아나는 풀포기를 보여준다. 한동안 나는 이러한 감수성으로 문화의 생산물들을 보려 한다. 마지막으로 이 멋진 책의 결말에서 한 구절을 옮긴다.

 이러한 낙원은 늘 문제와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타나며,…… 지옥에 세워지는 이런 낙원들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46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