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의 범람 시대다. 예전 같으면 대부분 50부작의 길이로 각 방송사별로 1년에 한두 편 겨우 방영할 수 있었던 것이 사극이었지만 이젠 그 분량이 긴 미니시리즈 정도로 줄어들며 세 방송사의 주 중 어느 한 꼭지 이상 꼭 사극을 방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역사, 이미 일어난 사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소재의 고갈이 현실이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이른바, ‘퓨전’이라는 이름을 걸고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를 뒤틀고, 비집고 들어간 ‘퓨전 사극’ 그 의도만큼 성과를 이루어 내고 있는 것일까?

시간을 거스르다

 2012년 한 해에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타임슬립’을 다룬 드라마가 네 편이나 방영되었다. 그 중, <옥탑방 왕세자>(SBS)와 <인현왕후의 남자>(tvN)는 과거에서 온 인물이 현대의 여인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 설정이라, 엄밀히 ‘사극’의 범주에 넣기는 무리이다. 반면, <닥터 진> (MBC)과 <신의>(SBS)는 현대의 인물이 과거로 넘어가 그 시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니 말 그대로 현대를 과거에 ‘퓨전’한 사극의 전형적인 구도다.

 <닥터 진>에서 현대의 진혁이 흥선대원군이 생존해 있는 구한말 시대로 넘어가고, <신의>에서 현대의 유은수가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시기로 넘어간 것처럼, 이미 역사적 결과를 인지하고 있는 인물의 과거로의 회귀는 그 인물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알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죽어가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진혁에게 달려오지만 후에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이 될 그 아이가 사는 건 당연지사이듯, ‘패’를 하나 더 쥔 듯한 재미를 안겨 준다. 하지만 동시에 과거로 간 인물이 생살여탈권을 쥔 의사인 만큼 그의 의학적 행위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 변용을 가져올 수도 있어 그로 인한 극적 긴장감은 배가 된다.

 그렇다면 역사의 훼손을 가져올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과거로 간 인물은 그걸 통해 무엇을 얻어냈을까?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무라카미 모토카(村上もとか)의 만화 『타임슬립 닥터 진(仁)』이란 작품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일본에서도 드라마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현대의 의사 진이 막부 말기 에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를 거스를지도 모를 것을 감수하며 인술을 펼치며 일본 근대 메이지 유신의 선각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1867)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휴머니즘 스토리이다. 그리고 저작권 소송에 휘말렸던 <신의>와 아예 판권을 산 <닥터 진> 모두 기본적 설정에서 이 작품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좀 더 욕심을 부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주변 사람들을 믿고 설득하며 성장하는 리더와 그런 리더를 만들어내는 킹메이커를 그리겠다는 야심은 수포로 돌아간 채, 남녀 간의 사랑을 위해서는 중복 타임 슬립도 불사하는 러브 스토리로 <신의>가 막을 내리고, <닥터 진> 역시 인술보다는 원작에도 없는 캐릭터로 인해 삼각관계 멜로물에 더 방점을 찍고 말았다.

 물론 그것은 봉황을 그리려다 참새를 그려버린 작가의 어설픈 필력과 시청자 반응에 솔깃한 연출의 탓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근대의 시조라기보다는 쇄국의 상징으로 더 기억되는 ‘대원군 이하응’에, 개혁 군주라기엔 치정으로 얼룩진 말년의 패착이 너무 큰 공민왕 시대를 어설프게 이상적 근대화나 개혁의 상징으로 내걸은 데서 비롯된 역사적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바가 크다. 무리한 ‘타임슬립’을 하느니 <해를 품은 달>(MBC)처럼 가상의 시대를 설정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익숙한 이야기를 뒤틀다

 새로 부임한 사또 앞에 밤마다 귀신이 나타나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이야기나, 의로운 주인공이 도술을 써서 탐관오리를 벌주고, 그 재물을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 준다는 이야기는 우리나라 고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서사이다. 바로 그 익숙한 서사의 틀이 드라마로 옮겨지며 새로운 버전으로 거듭난다. 드라마의 아랑은 죽음의 원한을 풀기 위해 옥황상제와 ‘딜’을 하고, 전우치는 고전 속 도술을 쓰는 의인보다는 일본 만화 <나루토(ナルト-)>의 주인공과 더 흡사하다.

 조선 명종 때 밀양 태수의 딸 아랑의 원령 설화(원한을 품고 죽은 귀신이 등장하는 설화)를 모티브로 한 <아랑사또전>(MBC)은 여주인공이 귀신이다. 뿐만 아니라 멀쩡한 대갓집 도령인 줄 알았던 남자 주인공도 귀신을 알아보는데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니, 결국은 귀신과 귀신의 사랑이 되는 셈이다. 익숙한 이야기에서 끌어낸 파격적 캐릭터는 주인공뿐만이 아니다. 귀신이 된 여주인공이 허구한 날 종주먹을 들이대는 대상은 ‘영감탱이’ 옥황상제에,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의 궁극적 주구는 불로장생의 천상이 매력 없다며 욕망이 넘치는 인간 세상을 흠모해 탈출한 선녀란다. 게다가 매번 도련님 뒤만 쫓아다니던 종은 그 불뚝거리는 정의감에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민의에 의해 선출된 신임 현감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이처럼 <아랑사또전>은 인간과, 귀신, 그리고 신의 경계를 무색하게 만들며, 양반과 노비의 신분 따위도 별 의미가 없다는 혁명적(?) 세계관을 논하고자 한다.

 <전우치>(KBS)도 마찬가지다. 작자와 연대 미상의 『전우치전』은 고전에서 『홍길동전』의 유사 소설로 분류되지만, 드라마에서 전우치는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의 도술사로 등장하며 협잡을 일삼는 하층 벼슬아치 ‘이치’로 둔갑하여 조선에서 활동한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에 대한 자책에 시달리며, 현실에 무심한 채 오로지 개인적 복수에 목말라하던 전우치가 피치 못하게 백성들의 일을 해결해주며 성장하여 사회적 영웅이 되어가는 방식이나 허허실실 행동 양식에, 개그에 가까운 말솜씨를 부리는 만화 캐릭터 같은 모습은 오늘날 사람들 취향에 맞춰 ‘업그레이드’된 버전인 셈이다.

 그러나 캐릭터는 변했으되 율도국을 무너뜨리고, 조선에 들어와 불의를 일삼는 마강림이라는 적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전 『전우치』의 부패한 양반을 징벌하고 백성의 편에 서게 되는, 의로운 영웅의 길이라는 주제의식은 동일하게 지향된다. 도술을 통한 해결 방식 또한 공통적이다. <아랑사또전> 역시 귀신 아랑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풀어낸다는 기본적 서사의 틀을 지키며 가고 있다.

 귀신이 주인공이라는 색다른 설정이나, 공중 부양을 하며 도술을 쏘아대는 만화와 같은 설정에도 불구하고, 한번쯤은 들어봤을 아랑과 전우치 서사의 익숙함은 드라마가 보여주는 생경함을 상당 부분 덜어내어 시청자의 접근을 용이하게 한다. 하지만, 야무진 기획 의도이든, 진지한 주제이든 결국 드라마를 꾸려가는 것은 화려한 볼거리나, 색다른 설정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스토리텔링’인데, 그런 의미에서 <아랑사또전>은 4회 정도라도 충분한 이야깃거리를 20회에 걸쳐서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해 야심차게 시도했던 전복적 주제 의식이나, 하다못해 남녀 간의 사랑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시청자의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전우치> 역시 추리에 코믹까지 곁들이며 고군분투하지만, 도술이 난무하는 화면의 생뚱맞음을 온전히 넘어서지 못해, 스토리와 형식의 조화를 성취해 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선한 시도라는 토핑만 잔뜩 얹은 부실한 내용물의 요리가 되어버린 셈이랄까.

역사 속에서 길어낸 인물

 엄밀하게 형식적인 면에서 <마의>(MBC)나 <대풍수>(SBS)를 ‘퓨전 사극’이라고 정의내리기는 힘들다. 하지만 어의에 오르는 미천한 신분의 수의사라던가, 왕이 된 태조 이성계(李成桂, 재위 1392~1398)가 아니라, 그를 왕이 되게 만드는 킹메이커, 그것도 사주, 풍수, 관상에 도통한 명리학자의 관점으로 풀어내는, 역사 속 단 몇 줄에 그쳤던 인물을 길어 올려 그의 삶을 통해 그 시대를 말하고자 하는 방식은 사극의 또 다른 변형된 양식으로 규정해 볼만 하다.

 이병훈 감독표 <마의>는 여전히 이 감독 특유의 끊임없는 고난과 그 고난을 겪으며 성장하는 주인공이라는 RPG게임(Role Playing Game)^{플레이어들이 가상의 인물의 역할을 맡아 정해진 규칙을 따라 즐기는 놀이}과도 같은 클리셰를 답보한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싫증에 대비해 2012년판 이병훈 사극은 그 전형성에 트렌디함을 곁들였다. 항상 진지하고 올곧기만 하던 남자 주인공은 밝고 명랑하다 못해 이게 수작인지, 다정함인지 헷갈릴 정도로 모든 여성들에게 친절해 공주에서부터 과부까지 앓이를 노골적으로 하게 만들고, 또한 지금까지 사극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낮에는 정숙하고 밤에는 놀 줄 아는”이라는 싸이의 <강남 스타일> 가사가 튀어나오는가 하면, “궁금하면 다섯 냥”이라며 개그 콘서트의 개그를 도용하며 전형성을 포장한다.

 반면, 이병훈 사극의 주인공과 다르지 않은 RPG식 성장 과정을 택한 <대풍수>가 택한 방식은 노출이나 폭력 등의 자극적 방식이다. 하지만 이는 관심은커녕 오히려 애초의 좋은 기획 의도조차 폄하시킨 악수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아직은 풍수쟁이라는 주인공이 시기상조인지, 주인공의 정체성은 모호하고 성장담은 늘어진 채, 여전히 왕실 주변의 암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새로운 지도자상도, 그를 도와주는 조선판 킹메이커의 매력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건 당연지사.

 대선을 거치며 여전히 ‘문제는 정치야!’라는 대한민국에서 사극의 형식적 혹은 내용적 변형을 통해 여러 작품들이 사회를 비판하고, 바람직한 지도자상, 혹은 킹메이킹에 대한 자신만의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지만 2011년의 <뿌리깊은 나무>(SBS)가 정치 사극으로써 깊은 인상을 남긴 것과 달리, 2012년에서 2013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사극들은 다양한 ‘퓨전’을 통해 자신만의 담론을 제시하고자 하나 그마저도 어설펐고 당연히 시청자의 호응을 얻어내지도 못했다. 역설적으로 그나마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잠시나마 붐을 이뤘던 ‘안철수 현상’처럼 사람 냄새 나는 성실하고 소박한 마의의 입지전적 성공기니 역시 드라마는 현실의 반영, 맞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