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아버지는 청주에 사신다. 명절 때면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살고 있는 인천으로 올라오셔서 딱 하룻밤만 주무시고는 이내 청주로 내려가신다. 엄마와 아빠는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를 인천에서 모시고 싶다고 말씀드려 보지만, 할아버지는 손사래를 치곤하신다. 할아버지의 인생, 친구, 예쁜 할머니들 모두가 청주에 있다. 인천에 와 봤자 각자 살기 바쁜 우리들 틈에서 할아버지는 외로우실 것이다. 차라리 청주에 있는 노인정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 것이 할아버지에겐 더 현명한 선택이라 여기셨던 듯하다.

나는 대체 노인정에 뭐가 있기에 할아버지가 아침밥만 드시면 바로 청주로 가시겠다고 길을 나서시는 건지 내내 궁금했다. 하지만 이젠 조금 알 것도 같다. 내게도 노인정과 비슷한 ‘청년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인천에 갓 생긴 따끈따끈한 청년정, <청년플러스>에 대한 이야기다.

청년플러스란, "내가 살고 싶은 동네에서 함께 재미있게 살고 싶지만, 외로이 떨어져 있는 청년들이 모여서 지역과 사람을 만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마음껏 시도하는 오픈랩(Open Lab)"이라고 하는데, 내겐 너무 거창한 정의인 것 같다. 쉽게 말해서 청년플러스(이하 ‘청플’)란, ‘청주에 있는 할아버지의 노인정’의 ‘인천-청년’ 버전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할아버지에게 노인정이란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골인지점이라면, 나에게 청플이란 삶을 준비하는 스타트라인이란 것. 외로워서, 막막해서, 답답해서 찾던 발걸음이 청플까지 닿았고, 나는 그곳에서 꽃내 씨를 만났다.
새벽 4시. 나는 요즘 새벽 4시면 눈을 뜬다. 꽃내 씨는 내게 ‘새벽 4시는 절박함을 아는 사람들만이 깨어 있는 시간’이라 말해 주었다.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있는 나는 진로와 취업, 결혼과 주거 문제 등등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은 삶의 문제들 앞에서 당황하고 있었지만, 타인에게는 절대로 내색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그런데 꽃내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나의 속내를 한 번에 간파해 버렸다. 그렇다. 나는 절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절박함을 눈치 채 준 그녀가 고마웠고, 반가웠다. 청년플러스는 그런 ‘친구’들이 모인 곳이다.

후지지만 인천이 좋아 축제를 만들고 재미있게 놀아 보자는 문화기획자, 재래시장을 살려 보고 싶은 사회적 기업 CEO, 세상에 택견을 널리 알리고 싶은 택견 강사, 인천시민들에게 더 많은 공연을 보여주고 싶은 배우, 인생의 비전을 찾아 헤매는 대학생, 지역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논문을 쓰고 싶은 연구자, 40~50대가 되도록 2시간씩 삼화고속에 갇혀 출퇴근을 하기 싫은 직장인, 인천에서 김치라도 나눠 먹을 수 있는 노후연금을 보장받고 싶은 활동가, 아홉수에 눌려 결혼의 압박 속에 낮은 자존감으로 고생하는 여인네들, 버스를 타고 다니는 소박한 여행을 꿈꾸는 관광업자… 자, 자, 그러니까 이 다양한 사람들을 한 마디로 무엇이라 부를 것이냐? 바로 ‘청년’이다. 그것은 우리가 설렘과 불안이 교차하는 시기를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2012년 9월 24일. 아주 도발적인 제목의 포럼이 하나 열렸다. <인천에서?> ‘인천에서 뭐가 가능하기나 해?’ 이런 뉘앙스를 잔뜩 풍기는 제목에 약간 자존심이 상했지만, 인정할 건 해야 했다. 대학도, 직장도, 노는 곳도 ‘in 서울’만을 꿈꾸던 나에겐 <청년×인천=0>였다. 인천이 청년실업률 1위래요, 인천시 재정이 위기라면서요, 서울로 통학 혹은 출퇴근하기 너무 힘들어요, 등등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럼에서 만난 청년들에겐 ‘인천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이 친구들은 인천에 대한 무관심, 무기력, 무지함에서 벗어나 무한한 상상력을 키워 보기로 했고, <빌리지 디자인 스쿨>이라는 아카데미를 열어 어떻게 하면 인천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고 행복한 마을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한 발 더 나아가 청년들이 상시적으로 만나고 협업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무모한 도전을 감행, 드디어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 206-1번지에 <청년플러스>라는 공간을 오픈했다.
어쩌면 어른들에게는 답이 없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문제는 어른들의 그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청년플러스에는 어떤 뾰족한 해법이 있느냐? 물론 섣불리 그리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청플이 제안하는 것은 문제를 풀어 가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즉,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 해답을 찾아 가는 ‘과정’ 중에 발견되고 창조되는 수많은 해법들의 궤적. 바로 그것이 청년플러스가 그리고 제안하는 삶의 공식이다. ‘청년+청년, 실험, 이웃, 연애, 일자리, 집, 꿈, 노후계획…’ 인천에서, 청년으로, 재미있게, 의미 있게 살고 싶다면,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 보지 않겠냐는, 이제 더는 외롭게 혼자 버티고, 혼자 싸우지 말고 옆에 있는 이웃과 더불어 고민해 보지 않겠냐는 청년플러스의 제안을 나는, 받아들였다.

하여 지난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 간 열렸던 청년플러스 오픈위크 행사에도 참여했다. 나는 내가 졸업한 인천박문여자중•고등학교의 송도신도시 이전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동구 밖>을 청년플러스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너도 박문 나왔니?” 영화를 보다 말고 소규모 동창회가 열리지를 않나, “아 나 저기 아는데!” 동네에서 스치고 지나간 공간들을 영화로 보니 새삼 정겹고 좋더라는 이웃 분들의 뜨거운 반응, 그리고 이어지는 구도심과 신도시 간의 상생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이어진 다큐 토크쇼. 나의 작품이 지역사회에 건강한 질문을 던지고 담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랐던 기도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또 다른 청플 오픈위크 프로그램이었던 ‘드로잉 & 빌리지(Drawing & Village)’ 전시회. 골목길 산책을 즐겨하던 ‘하트랩(Heart Lab)’님은 인천 구도심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친구들에게 ‘이해받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서 묻어나는 소외감은 이내 ‘인천에 놀러 온 친구들에게 인천을 기억할 수 있는 기념품을 만들어 선물하자!’는 소박한 바람으로 진화했다. 그림엽서 프로젝트는 한 사람의 꿈에서 시작하여, 여러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소통의 구조를 만들어냄으로써 이뤄낸 공동창작의 한 모델을 제시했다. 그림을 못 그리는 나는 예쁜 엽서를 구매해,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하트랩 님의 꿈에 동참했다.
그 밖에도 재능 있는 친구들의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는 힙합, 현대무용, 뮤지컬, 택견 시범 등 공연예술부터, ‘동인천 올 로케이션’을 자랑하는 인천 사나이 백승기 감독의 <숫호구> 상영회까지. 청년플러스의 공간을 채운 다채로운 행사, 무엇보다도 그곳에 모인 청년들의 다양성에서 어떤 에너지가 느껴졌다(인천에 이런 재미난 청년들이 있다는 것을, 이제까지 왜 나는 알지 못했을까? 왜 우린 이제야 만나게 된 걸까?).
<포럼 : 달콤, 쌉싸름한 샐러드 마을 입주식>에서 청년들은 청플이란 공간이 우리(청년, 이웃들 그리고 인천)에게 왜 중요한지, 이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꿈꾸고, 앞으로 무엇을 하기 원하는지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택견 강사 차이크 님의 ‘씨실-날실 신소재론’이다. 각자의 개성과 재능과 꿈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전혀 다른 신소재로 탄생하듯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나도 “좋아요” 한 표를 꾹 누르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산적한 문제를 모르는 척 할 수만은 없다. 공간과 사람만 존재할 뿐, 공간 운영비, 사업진행비, 뭔가를 펼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이 우리 손에 없다는 ‘바로 그 문제’ 말이다. 앞으로 지속가능한 청플, 지역사회와 이웃들과 활발한 교류를 할 수 있는 청플이 되기 위해 이웃들의 조언을 구해 보았다. 헌데 이상하다. 청년플러스의 성공(?)이 운영비, 사업비 등 ‘돈’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한 분도 없으셨다. 삐걱삐걱, 공회전만 거듭하고 있는 것 같은 우리의 시시한(?) 모임들 속에 우리에게 필요한 신뢰와 관계를 풀어 가는 성숙함, 매너, 문화가 먼저 자라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우리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하기에 앞서 인천에서도 청년들과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이뤄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청플 안의 모두를 격려하고 싶다. 우리의 시작을 알게 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청년플러스에 초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