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원전으로 하는 최근의 영화들

투, 포, 식스, 오, 원(24601)! 영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2012)>로 친숙해진 장발장의 수인 번호. 일반적으로 영화의 20 내지 25퍼센트 정도가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만들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59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레미제라블>의 대대적인 흥행성공으로 각색영화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레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의 원작을 읽지 않았다 해도 많은 사람들이 대강의 줄거리를 알고 있고, 영화로도 이미 여러 번 만들어졌다. 1912년 판 <레미제라블>은 동명의 뮤지컬을 충실하게 영화로 옮긴 작품이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1985년, 영국 런던에서 처음 선보인 후 지금까지 장기 공연을 계속하고 있고,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토니상, 그래미상 등 권위 있는 주요 뮤지컬 상을 석권했다. 한국에서도 1996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팀의 내한 공연이 있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성공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다른 무엇보다 캐릭터의 특성을 잘 살리고 극중 상황과 잘 어우러진 노래들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원작을 각색하기보다 뮤지컬을 영화로 만들기로 했을 때, 스타의 목소리를 통해 아름답고 애절하고 감동적인 주제곡들을 접하게 될 관객들의 열광을 기대했을 것이다. 연출을 맡은 톰 후퍼(Tom Hooper)는 영화 전체를 대사 대신 노래로 하는‘송 스루(Song-Through)’를 과감하게 밀어붙였고,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었다.

<레미제라블>의 제작사‘워킹 타이틀’은 2012년에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 2012)>도 제작했다. <안나 카레니나> 역시 너무나 유명한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의 소설이 원작이다. 또한 소설의 명성에 걸맞게 이미 여러 번 영화화되었다. 조 라이트(Joe Wright)가 연출한 이번 <안나 카레니나>가 이전 영화들과 가장 큰 차이점은 연극무대를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낸 것처럼 찍은 것이다. 연극무대의 막이 오르면 카메라가 점점 무대 가까이 다가가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거리 장면의 경우, 배경의 건물들은 세트가 아니라 그림이다. 연극무대의 천장이 카메라에 잡히고, 진짜 기차 대신 장난감 기차가 설원을 달린다. 이런 방식의 영화는 영화사 초기에도 있었다. 1908년에 설립된 프랑스 영화사‘필름 다르(Film D'art)’에서는 새로운 매체인 영화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역사, 연극, 소설 등에서 소재를 가져와 연극을 녹화한 것 같은 영화를 만들었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그러니까 무성영화 시대의 영화 방법이 컴퓨터 그래픽의 첨단 영화기술 시대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레미제라블>과 <안나 카레니나>는 각각 송 스루 뮤지컬 영화, 2012년 판 필름 다르라는 아이디어를 통해 널리 알려진 문학작품을 새롭게 선보였다. 이밖에 작년과 올해 고전을 각색해 개봉했거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로는 기 드 모파상(Henri Rene Albert Guy de Maupassant, 1850~1893)의 <벨아미(Bel Ami, 2012)>,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The Man Who Laughs, 2012)>,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 1896~1940)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2013)> 등이 있다. 이 세 편의 영화가 <레미제라블>이나 <안나 카레니나> 같은 독특한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제작되지는 않았지만, 모두‘시대극’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레미제라블>은 1832년, 프랑스의‘6월 봉기’를 주요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이후, 왕정복고를 반대하며 일어난 이 항쟁은 실패로 끝났으나, 1848년,‘2월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이 혁명을 통해 프랑스의 군주제는 막을 내리고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이 영화는 시대극의 가장 큰 볼거리인 화려한 귀족사회를 재현하는 장면은 없지만, 6월 봉기 장면을 통해 강렬한 정서적 울림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2012년, 한국의 대선 결과와 맞물리면서, 흥행에 크게 일조했다.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 역사에서‘빛의 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장 화려했던 1870년대를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젊고 아름답고 총명한 여주인공 안나(키라 나이틀리(Keira Christina Knightley))를 보는 재미뿐만 아니라, 안나가 속한 귀족사회를 재현한 장면들이 흥미를 자아낸다. 당시 귀족들의 화려한 의상과 스펙터클한 무도회 장면, 안나의 미모를 더욱 빛내는 보석 등이 풍부한 볼거리가 된다. 이와 비슷하게 <벨아미>의 시대배경은 80년 동안의 정치적 격동기를 겪은 이후,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던 프랑스의‘벨 에포크(Belle Epoque; 1890~1914년에 이르는 아름다운 시절_편집자 주)’이다. 가난한 군인이었던 조르주가 자신의 외모를 무기로 상류사회에 진입하면서, <안나 카레니나>에서처럼 그 시대의 화려한 볼거리가 펼쳐진다.

17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웃는 남자>는 <배트맨>의 악당‘조커’의 모델로 알려진 주인공의 기이한 모습이 흥미를 자아낸다. 여기에 하층민의 비참한 삶과 귀족사회의 화려한 생활의 대비가 시대극의 재미를 주는 동시에 주제를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5월에 개봉될 <위대한 개츠비>는‘재즈시대’로 불린 192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Romeo+Juliet, 1996)> <물랑 루즈(Moulin Rouge, 2001)> 같은 영화를 통해 현란한 안무와 번쩍거리는 화면으로 각광을 받았던 바즈 루어만(Baz Luhrmann)이 연출을 맡았다. 그러므로 1차 대전 이후, 염세적 분위기 속에서 쾌락에 휩쓸려가는 미국 상류사회가 화려하면서도 퇴폐적 분위기로 펼쳐질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o DiCaprio)가 안나 카레니나만큼이나 매력적인 주인공 개츠비를 연기해 더욱 관심이 간다.
이렇게 최근 각색영화들은 관객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시대극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들 가운데 형식적인 면에서 다양한 변주를 한 경우에도, 원작의 기본 줄거리는 큰 변형 없이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반면, 너무나 유명한‘동화’를 원작으로 한 최근 영화들은 원작을 변형한 각색이 대세인 것 같다. 먼저 그림형제(The Brothers Grimm)의 동화‘백설공주’를 원작으로 한 2012년의 <백설공주(Mirror Mirror)>와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Snow White and the Huntsman)>을 보자.
타샘 싱(Tarsem Singh)의 <백설공주>에서, 백설공주는 더 이상 사악한 왕비의 속임수에 넘어가 독사과를 먹고 쓰러지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왕비의 폭정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목격하고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검술을 배운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가는 진취적인 현대 여성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녀의 활약으로 행방이 묘연했던 아버지까지 살아 돌아오게 되니,‘엄친딸’(유명가수 필 콜린스(Phil Collins)의‘엄친딸’릴리 콜린스(Lily Collins)가 백설공주 역을 했다)이라고 할 만하다. 그녀를 돕는 일곱 난쟁이는 산적이었다가 의적으로 변신한다. 원작에서 마지막에 등장했던 왕자는 왕비의 구애와 백설공주의 매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물로 바뀌었다. 줄리아 로버츠(Julia Roberts)가 연기한 왕비는 사악한 마녀의 면모보다 세월과 함께 시들어 가는 미모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아줌마처럼 보인다. <백설공주>는 원작의 내용을 변형하면서,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화면으로 환상적인 동화의 세계를 접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백설공주>가 유머를 섞어가며 전 연령층이 즐길 수 있는‘발랄한 영화’로 자리매김 했다면,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은 원작의 어둡고 잔인한 고딕적 요소를 부각한‘판타지 영화’로 탈바꿈했다. 나약한 공주로 살아가던 백설공주는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을 겪고 일곱 난쟁이와 요정 종족을 만나면서 자신의 영웅적 면모를 자각하게 된다. 강력한 여성 전사로 거듭난 그녀는 갑옷을 입고 왕비와 맞서 싸운다. 그리고 마침내 여왕으로 등극한다. 따라서 그녀를 돕는 인물인 사냥꾼과 공작의 아들은 등장하지만, 왕자는 등장할 필요가 없어진다.
올해 개봉한 <헨젤과 그레텔: 마녀 사냥꾼(Hansel and Gretel: Witch Hunters, 2013)>은 그림형제의 동화를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각색했다. 헨젤과 그레텔이 과자로 만든 집에서 마녀를 물리치는 설정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그들이 뛰어난 마녀 사냥꾼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 그 결과 어른이 된 남매가 각각 사랑에 빠지고, 마녀들을 잔혹하게 처치하는 장면 등으로 동화가 원작임에도 이례적으로 19금의 성인 영화가 되었다.
이렇게 널리 알려진 소설과 동화를 각색한 영화가 다시 제작되는 이유는 이전에 이미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소비되었고,‘스토리텔링’이 넘쳐나는 시대에 새로운 이야기가 고갈되어 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관객의 관심을 끌만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누구나 아는 원작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주하는 편이 흥행에 더 효과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배트맨>, <스파이더맨>, <X맨> 같은 할리우드‘히어로 무비’가 영웅 탄생 이전의 이야기 등으로 끊임없이 변주되면서 계속 속편을 만들어내는 현상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SF 영화와 액션 영화가 주류인 시대에 찾아온 시대극과 동화가 관객들에게 어필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관객들이 옛날 옛적의 이야기와 이미지에서 흥미와 재미를 느낀다면, 그것은 한편으로 아날로그 시대의 향수와 디지털 시대의 피로 때문일 것이다.
#저자 약력
金京昱 1964년 서울 생. 영화평론가, 세종대 강사. 최근 저서로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 등.
nivana1895@hanafos.com
#주석
이미지 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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