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아스트럽 펀리 현대미술관(Astrup Fearnley Museum of Modern Art), 1999년, 오드 너드럼(Odd Nerdrum)이라는 화가가 전시회 개막식에서 강연을 했다. 서울에서 오슬로까지의 거리만큼이나 멀고 낯선 이름의 이 화가는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추상미술의 두 대가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과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가 나란히 사망한 1944년, 스웨덴에서 태어나 노르웨이에서 성장하고 작업해 온 미술가다. 너드럼의 강연은 꽤 느닷없었다. 그가 자신을 키치(Kitsch) 화가라고 소개하면서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미술이 아니라 키치의 기준으로 해 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드럼의 이 발언은 그의 후속 작업에 의해 진담이 되었다.¹⁾ 너드럼은 키치에 관하여 여러 편의 글과 책을 썼으며, 그의 뜻에 동조하는 미술가들과 함께 키치 운동을 결성했고, 2000년대 초반부터 활발하게 전시회도 열고 있는데, 2008년과 2010년에는 뮌헨과 베니스에서 키치 비엔날레를 조직하기까지 했던 것이다.²⁾

키치 vs 미술
 키치를 미술(혹은 예술 혹은 고급문화)의 대립항으로 보는 것은 미학과 문화론을 지배하는 관점이다. 그리고 이 관점은 키치를 대부분 부정적으로 본다. 키치에 대한 가장 최근의 미학적 탐구를 봐도, 키치는 좋은 예술의 기준에 미달하기에 미학적으로 나쁜 작품이라고 정의되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다. 1) 키치는 상투적인 감정으로 가득 차 있는 대상이나 주제를 묘사한다(예컨대, 꽃을 들고 눈물을 글썽이는 예쁜 소녀, 슬픈 광대, 아기를 껴안고 있는 엄마, 명랑한 방랑자, 민속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금발의 알프스 소녀, 바다를 가로지르는 돌고래 무리의 경쾌한 점프 등)  2) 키치는 수고 없이 곧바로 알아볼 수 있는 소재를 사용한다(키치는 애매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키치를 명확하게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예술적 능력이 필요하지만 키치에서 양식적 혁신은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혁신이 일으키는 독창성을 알아보는 데에는 수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3) 키치는 묘사된 대상이나 주제에 관해 풍부한 연상을 발전시키지 않는다(묘사되는 대상도, 유발되는 감정도 명확하므로).³⁾ 흥미롭게도, 너드럼 역시 키치와 미술을 대립시키지만, 키치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와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것 같다. 그가 최근에 펴낸 책 제목 Kitsch, More than Art(2011)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키치를 예술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능가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미학적 반전의 시도인가? 즉, 너드럼은 키치에 대한 미학적 복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실망스럽게도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는 너드럼이 옹호하는 키치라는 것이 현대미술 이전의 대가들, 특히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와 카라밧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1610)가 구사했던 기법과 감정을 일으키는 서사를 복원시키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너드럼의 키치는 명백히혼성모방의 일종이고, 그러므로 미술을 넘어서기는커녕 노르웨이에 뒤늦게 상륙한 포스트모더니즘, 그것도 보수적인 종류의 포스트모더니즘⁴⁾에 속하는 미술일 뿐이다. 그런데 왜 하필‘키치일까? 이 명명은 너드럼의 또 다른 오해와 관계가 있다. 혼성모방 미술가답게, 18세기 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정초한 현대적‘순수 미술 개념을 반대하고 그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는 키치를 고대 그리스의 테크네(techne) 개념과 동의어로 보는 것이다.⁵⁾ 아마도 이 말은 현대 이후 모더니즘 미술과 진보적인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 작당을 해서 망쳐버린(적어도 너드럼은 그렇게 보는) 위대한 화가들의 기막힌 솜씨에 대한 동경과 열망을 담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너드럼의 키치 회화는 서로 무관한 시대와 양식을 뒤섞는 혼성모방에 이어 다시 한 번 시대착오를 일으킨다. 키치는 고대가 아니라 현대, 정확히는 19세기 후반 새로운 사회 집단으로 등장한 대중을 상대로 해서 나타난 문화 현상이고, ‘테크네’개념이 함축하는 수공업이 아니라 기계산업으로 생산되는 대량문화의 상품이기 때문이다.⁶⁾

대중문화와 키치
 대중을 상대로 한 문화? 대중? 요즘 쓰이는‘다중’이라는 말에 비하면 ‘대중’은 좀 케케묵은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다중’ 역시 ‘대중’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대중’이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현대 사회를 구성하게 된 다수의 성원, 즉 노동계급을 가리키는 의미⁷⁾라면, ‘다중’은 오늘날에도 사회의 다수 성원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대중과 같은 계급의식으로 한 데 결속되기 어려운 개별적이고 다양한 주체들을 주목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농민이 절대 비중을 차지했던 구체제의 ‘신민’과 달리 산업화된 도시 노동자가 절대 비중을 차지하게 된 현대의 ‘대중’은 과거와 다르게 지배계급의 직접적인 간섭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공간을 갖게 된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산업 시설을 중심으로 오로지 노동자들만 거주하는 지역을 형성시키면서 계급 간 주거 분리를 발생시켰기 때문이다.⁸⁾ 말할 수 없이 비참한 형편이었으나, 그럼에도 도심의 노동자 거주지역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냈거나 아니면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해서 만들어진 문화가 생산, 소비되는 새로운 공간이 되었는데, 이 공간을 채워 넣은 것은 크게 두 가지 문화였다. 도시의 노동자들을 새로운 수요자로 삼아 등장한 문화업자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공급한 상업 문화와, 급진적인 기능공, 새로운 노동계급 그리고 부르주아 개혁론자들이 근본개혁적으로 만들어낸 정치적인 문화가 그것이다.⁹⁾ 이렇게 현대 산업사회의 새로운 문화 공간을 채운 대중문화의 두 원천은 성격도 목적도 상이했다. 그러나 양자의 발전은 공히 기존 사회가 유지해 오던 권위의 약화와 질서의 교란이라는 동일한 결과를 촉진했다. 상업 문화가 지배계급의 엘리트 문화를 노동계급이 접근할 수 있는 문화상품, 즉 이윤의 대상으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그 문화의 권위를 떨어뜨렸다면, 정치 문화는 이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기성의 모든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이다(예컨대, 남성 노동자 계급이 의회에 직접 선거권을 요구하며 1838년에 시작된 차티스트운동).

 이러한 맥락에서, 대중문화론은 도시의 노동대중이 계급적 각성에 돌입하여 사회 전 분야에서 제기하는 당돌한 도전들의 온상, 즉 대중들의 문화를 진압하기 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대중문화에 대한 최초의 관점으로 꼽히는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의「문화와 무정부」(1869)에서 노골적일 정도로 분명하다. 문화란“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생각되고 말해진 최선의 것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의 전체적인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아놀드는 기계적이고 외면적이며 질서와 권위를 위협하는 현대사회의 무정부 상태를 인간의 사고와 표현의 정수로써 억제하는 것이 문화의 기능이라고 보았던 것이다.¹⁰⁾ 이것이 이른바‘문화와 문명’의 전통이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대중문화론의 첫 100년을 지배한 이 전통의 특징은 문화에 대한 특수하고 배타적인 정의와 이항대립, 위계적이고 부정적인 평가, 그리고 고급문화 위기론이다. 즉 이 전통에서‘문화’는 미학적으로 탁월한 예술을 주로 의미했던 고급문화’의 줄임말이고, 이 문화는 대중들의 저급한 문화와 이항대립의 구조로 대치하며, 인간의 탁월한 정신적 성취를 이룩하고 제공하기에 소수의 엘리트에 국한될 수밖에 없는 고급문화와 달리“싸디싼 정서적 반응들을 이용해 먹고…가장 저급한 차원의 만족을 제공하며 가장 적은 노력으로 얻어지는 가장 즉각적인 쾌락을 선택하라고 가르치는” 대중들의 문화는 한없이 낮고 나쁜 것인데, 걱정스럽게도 현대는 나쁜 문화가 점점 더 많이 양산되어 좋은 문화를 위기에 빠뜨리는 시대라는 것이다.¹¹⁾

 키치를 다룬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미국의 미술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의「아방가르드와 키치」도 여전히 이‘문화와 문명’의 전통에 속한다. 1939년, 그를 무명의 세관원에서 뉴욕 인텔리겐차의 일원으로 단박 환골탈태시켜 준 이 유명한 에세이에서도‘문화 대 무질서’(아놀드),‘소수문화 대 대량문명’(리비스)의 대립구도와 고급문화 위기론은‘아방가르드 대 키치’의 대립구도 안으로 고스란히 이어졌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는‘전위’(avant-guard),‘진정한’(genuine),‘정격’(formal),‘탁월한’(superior) 등의 수식어와 함께 하는 엘리트의 참된 문화인 반면, 키치는‘후위’(rear-guard),‘대용’(ersatz),‘관제’(official),‘미숙한’(rudimentary) 등의 수식어와 함께 하는 대중들의 가짜 문화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뉴욕 지식인들처럼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그린버그는 대중문화의 발생을 아놀드처럼 전통적인 권위의 붕괴로 개탄하거나 리비스처럼 대량생산체제의 폐해로 치부하지 않고, 현대 사회의 정치경제적 배경과 연관시켜 대단히 정확하게 분석했다.

 즉 키치는 서유럽과 미국의 대중을 도시화하고 보편적 문해력을 확립한 산업혁명의 산물로서, 도시로 이주하여 프롤레타리아와 소부르주아로 정착한 새로운 대중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대중은 직업을 얻기 위해 읽고 쓰는 것을 배웠으나, 고급문화를 즐기는 데 필요한 여가와 안락은 얻지 못했고, 도시로 오기 전 그들이 즐겼던 민속 문화도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취를 감추어 갔다. 노동과 분리되어 새로 생겨난 여가, 짧고 충분치 않았지만 이 여가를 달래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새로운 상품이 고안되었다. 진정한 문화의 가치는 알지 못하나 기분전환은 갈망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대용 문화가 등장했다. 키치가 탄생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키치의 전제조건은 완전히 성숙한 문화 전통이 바로 곁에 있는 것이다. 성숙한 문화에서 단물만 속 뽑아 겉모습만 그럴 듯한 상품으로 빨리 찍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화를 약탈해서 기계적으로 만들어지는 키치는 예컨대, 피카소의‘난해한’ 그림을 알아보고 즐기는 데 필요한 훈련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 훈련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비로소 허락되는 여가와 에너지, 안락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생산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고 따라서 진정한 문화의 조건은 미비한, 그 틈에서 번성하는 것이 키치다. 키치는 돈 말고는 아무것도, 노력은 물론 시간조차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애쓰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이 키치에 열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키치는 진정한 문화의 생존을 위협하는 나쁜 것이 된다.¹²⁾

키치의 문화적 복권?
 최근 영국의「가디언(Guardian) 지에 키치에 관한 글이 하나 실렸다.「키치 미술: 애호하던가 아니면 혐오하던가? (2013년 1월 28일자)라는 제목의 이 글은 미술비평가이자 터너상(Turner Prize) 심사위원이기도 했던 조나선 존스(Jonathan Jones)가 쓴 것이다. 미학적 측면에서도, 대중문화론의 측면에서도 심각한 고민은 이 글에서 조금도 엿보이지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키치에 대한 편견을 버리라는 메시지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감정적이라서 키치라면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의 조각상도, 차이코프스키(Peter Il’yich Tchaikovsky, 1840~1893)의 음악도 키치이며, 따라서 키치도 심오할 수 있다는 것이다.¹³⁾ 서두에서 살펴본 너드럼의 키치 운동에서 별로 멀지 않은 주장이지만, 미술은 취향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글의 결론은 너드럼과도 달리 취향이라는 말에 함축된 문화의 엘리트주의를 오히려 편협하고 속물적이라고 비난하는 문화적 민주주의의 대담한 반격처럼 보인다.

 문제는 이런 개방적인 입장이 대중문화에 대한 고급문화의‘압제’를 당연시 한‘문화와 문명’의 전통이 끝나고, 후일 문화연구로 발전하는 문화주의(Culturalism)가 1960년대 이후 등장하면서 비로소 이루어진 대중문화에 대한 긍정적 전환과 별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문화주의에서는 문화의 의미가 사회학적으로 크게 확장(문화란 모든 인간의 삶의 방식을 포괄하는 것)되었고, 뒤를 이은 문화연구에서는 대중문화(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이 나름의 의미와 가치들을 표현하는 일상생활의 텍스트와 실천행위)를 문화의 중심으로 삼고 탐구한다. 이 자체가 대단한 전환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전환은 단지 고급문화-대중문화의 상하 위계를 정반대로 뒤집거나 키치도 고급문화만큼이나 의미가 있다는 주장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전환의 중요성은 현대 이후 점진적으로 성장해 간 대중들의 문화 생산 능력과 그 산물을 긍정한다는 점에 있다. 이 새로운 문화주의 전통에서 대중은 그저 무늬만 문화인 키치나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문화적 피지배자 집단이 아니다. 이제 대중은 지배 질서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생각과 목소리를 자발적으로 또 성찰적으로 생산하는 능동적인 주체다. 대중에 대한 이 새로운 이해와 더불어 대중문화, 아니 문화의 전 영역은 지배와 저항의 힘이 역동적으로 교차하는 문화정치학의 장이 된다. 그렇다면 키치의 문화정치학은? 당연히 그것은 자동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예컨대, 잡지 화보나 통조림 상표 같은 싸구려 대량생산물과 실크스크린이라는 기계적 생산방식을 작업실에 드나드는 아무에게나 맡겨 제작한 워홀(Andy Warhol, 1928~1987)의 <마릴린>이나 <캠벨 스프> 연작은 인간이나 자연이 아니라 상품에 둘러싸여 사는 산업시대 삶의 조건에 대해 말한다. 키치를 통한 문화적 성찰이다. 반면, 기념비 같은 투명한 사각 기둥 안에 형광등으로 각광을 깔고 최고가 청소기를 올려 밀봉한 제프 쿤스(Jeff Koons, 1955~)의 <더블 데커> 연작은 어떤가? 일반인으로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고가의 상품을 미술품으로 둔갑시킨 이 작품은 미술품이란 곧 사치품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어떻게? 사치품에 대한 선망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여기에서 키치는 결코 싸구려가 아니지만, 아주 고가의 키치, 물신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