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단지 찰나의 순간만을 묘사하는데, 사진의 체감 시간felt duration은 한 장의 사진으로 얼어붙은,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는 순간의 양쪽으로, 어떤 일이 막 일어난 쪽과 어떤 일이 막 벌어지려고 하는 쪽으로 몇 초간 팽창한다.”

*

“지금 실제로 말해지고 있는 것들을 듣기 위해 이러한 사진 속 장면들 안으로 더 파고들어갈 수는 없었을까? 지금 막 말해진 것, 이제 막 말해지려는 순간 너머로, 가장 훌륭한 사진들은 사진에 묘사되어 있는 순간 너머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제프 다이어 지음, 『그러나 아름다운』<사진들에 관한 노트> 중에서

 스마트한 SNS 세상을 떠돌다 보면 심심찮게 ‘OO병신체’라는 용어를 보게 된다. (「보그^Vogue」로 대표되는) 패션잡지에 실린 기사들이 분야 특성상 외국어로 된 상표나 외래어 표현을 남발하면서 일반인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게 문장을 쓴 탓에 붙은 이름이다. 그런 관행을 비난하는 뜻에서 쓴 이 용어는 요즘 대부분의 비평 영역에도 적용된다. 영화평론은 물론이고 미술비평과 사진평론의 많은 글들이 이런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시작부터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현상을 언급하는 까닭은 여기서 다루려는 제프 다이어의 책이 가진 미덕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 ‘학문의 불청객^{Scholarly Gatecrasher’} 혹은 ‘지적 유목주의’

 책의 미덕은 차차 이야기하고 우선 저자가 누구인지-요즘처럼 인터넷이 전면적인 시대엔 사실 검색어만 넣으면 모든 정보를 구할 수 있을 테지만- 간략하게 살펴보자.

 영국의 픽션, 논픽션 작가 제프 다이어는 1986년 처음 존 버거^{John Berger}에 대한 비평적 연구서인 『말하기의 방법^{Ways of Telling: Work of John Berger}』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기억의 색^{The Colour of Memory}』(1989), 『탐색^{The Search}』(1993), 『파리 트랜스^{Paris Trance}』(1998), 『베니스의 제프, 바라나시에서 죽다 ^{Jeff in Venice, Death in Varanasi}』(2009) 등 5권의 소설과 에세이 모음집인『영국인의 태도^{Anglo-English Attitudes}』(1999)를 비롯하여 재즈를 다룬 『그러나 아름다운^{But Beautiful}』(1991), 기억에 관한 명상, 『솜므의 실종 용사^{The Missing of the Somme}』(1994), D. H. 로렌스에 관한 책 『순수한 분노를 넘어서^{Out of Sheer Rage}』(1997), 『요가를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요가^{Yoga for People Who Can't Be Bothered to Do It}』(2003), 그리고 사진에 관한 ‘색다른 역사’를 보여주는 『지속의 순간들^{The Ongoing Moment}』(2005) 등, 스무 권에 가까운 저작을 내놓고 거의 모든 저작이 수많은 상을 휩쓴 유럽과 영미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1월 『지속의 순간들^{The Ongoing Moment}』이 먼저 나오고, 4월 『그러나 아름다운^{But Beautiful}』이 작가 한효주의 번역으로 잇따라 출간되면서 다소 늦게 소개되었다. 『지속의 순간들』의 하얀 책표지에는 조엘 메이어로위츠^{Joel Meyerowitz}의 사진과 “사진 그리고 삶에 대한 경이로운 명상”이라는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찬사가 담겨 있다. 마치 반 양장본의 흰 속표지처럼 허전할 만큼 깨끗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그러나 아름다운』 역시 <뉴요커>지의 추천사가 앞에 인쇄되어 있다. 해서 누군가는 호객행위의 상술로 오해했다고도 한다. ‘오해’라고 하는 이유는 책장을 열고 몇 쪽만 읽어보아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제까지 전혀 모르고 있던 어떤 책을 만나 새롭게 관심을 가질 저자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는 게 얼마나 설레고 놀라운 일인지 잘 알 것이다. 게다가 그가 동시대 사람이라면 더욱 드문 경우가 된다. 제프 다이어는 우리가 여태 몰랐다는 사실이 의아할 만큼 흥미로운 작가였다.

 앞서 소개한 그의 저작들에서 알 수 있듯이 제프 다이어는 장르를 한쪽에 국한시킬 수 없는 작가이다. 아니 다루는 장르를 특정하지 않는 것 자체가 그의 전공인 것처럼 보인다. 실제 자칭 타칭 ‘학문의 불청객^{Scholarly Gatecrasher}’인 제프 다이어는 소위 ‘전공’, 혹은 ‘전문영역’이라는 구분에 도전하는 것을 즐기며, 전문가들 특유의 학문을 대하는 태도와 자신의 차이를 공공연하게 밝힌다. ‘소위 관습적 비평과는 거리를 두고’, ‘상상적 비평^{imaginative criticism}’을 하는 저자는 악기 하나 다룰 줄 모르면서 재즈 듣기를 좋아하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재즈에 관한 책을 쓰면서 무척이나 ‘겸손하고 당당하다.’ 왜냐하면 ‘책을 읽는 사람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책을 쓰는 사람도 배울 수 있고’,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만을 다룬다면 그것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이기 때문이란다. 또한 완결된 내용을 가지고 책을 시작하기보다는 써 나가는 과정에서 길을 발견하는 것에 더 흥미를 느낀다고 한다. 그런 자세가 얼핏 위험해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 그는 재즈에 관한 『그러나 아름다운』으로 영국의 대표적 문학상인 서머셋 몸 상을 수상한다. ‘카메라 한 대도 없는 사람’이 사진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이 책 『지속의 순간들』 역시 뉴욕에서 사진 관련 부문 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그가 추구하는 이런 ‘지적 유목주의^{intellectual nomadism}’는 한 저작에서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도 반영된다.

* 다채로운 시간의 색깔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방법

 180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42명의 사진가들과 그들의 사진에 관해 이야기하는 『지속의 순간들』을 놓고 수잔 손탁^{Susan Sontag}의 『사진에 관하여』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카메라 루시다』등이 거론되기도 하는데 제프 다이어는 자신만의 새로운 서술과 전개 방식을 보여준다. 사진이란 매체 자체의 본질적 특성이자 전제 조건인 ‘시간’을 해석하는 데에서 흔히 취해 왔던 연대기적 서술은 간단히 무시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비전문가’인 자신의 발언권을 보르헤스의 ‘어느 중국 백과사전’ 서술로 정당화하면서 시작하는 이 독창적이고 탁월한 사진 에세이는 한편, 예전 사진가들의 무작위적인 사진 배열 방식을 차용한다면서 연도, 장르, 서술 대상, 시점, 화자를 마구 뒤섞어 놓으면서도 작정한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는 법이 없다. 다시 말하면 작가(시인, 소설가 등)와 사진가들을 서로 교차시키고, 시와 사진과 영화와 음악을 어우러지게 한다. 그런가 하면 책 전체로 보면 <시작하며>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장의 구분 없이 한 덩어리로 되어 있다. 그저 짤막한 인용문으로 내용의 전환을 꾀하거나, 시^詩로 한 작가의 사진을 설명하기 시작하여 그 사진 속 대상으로 화제가 바뀌고, 그것이 다시 어떤 사건으로, 그 사건으로 만나는 다른 사진가로… 하는 식으로 글이 전개되는 형태이다. 거기에 적절하게 사진의 여러 개념들, 사진을 찍는 행위, 혹은 ‘사건’과 사진가라는 ‘인간’ 혹은 ‘삶’에 대한 저자 나름의 예민하지만 따뜻한 통찰이 슬쩍, 그러나 단정하게, 유려하나 단단하게 드러난다.

 그렇게 시나 문학적 서술(보르헤스, 월트 휘트먼, 워즈워스, 조지 시어테스, 필립 라킨, 존 치버, 이탈로 칼비노, 릴케, D. H. 로렌스…비슬라바 쉼보르스카 등)이 물리적 특성을 지닌 사진 오브제들(맹인, 아코디언, 등, 손, 모자, 벤치, 구름, 문…등)과 만나고, 거기서 사건(만남, 사랑, 집착, 행복, 슬픔, 열정, 좌절, 명성, 실망, 권위, 야심, 우정 등)이 일어나며 그것을 주도하거나 살아내는 사진가들의 인생과 각 캐릭터들이 파노라마처럼 명멸한다. 사진가들 각자의 고유한 기질과 작업 특성이 그들의 작품 자체에 대한 해석과 더불어 시대를 초월한 맥락 안에서 다른 사진(가)과 만나고, 인생에 관한 문학작품들의 언급과 영화 스틸 등 다른 시점으로 조명을 받는다.

 이를테면 월트 휘트먼의 광고 카탈로그 같은 시가 워커 에반스만의 ‘아이러니가 깃든’ 사진 찍을 목록으로, 그것이 로버트 프랭크의 사적인 목록으로 이어지는 책의 전개 양식을 서두에 보여준다. 이런 방식을 취하는 까닭은 저자 자신이 사진에서 “새로운 지식들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그 사진들과 관련된 오래된 지식들을 상당량 동원해야 할 것이다. 또한 나는 몇몇 사진가들 사이의 차이를 알고 싶고, 그들 각각의 스타일을 예민하게 체감하고도 싶다.” 이를 위해 ‘같은 것을 찍은 여러 작가들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식적으로 예를 들면, 본문의 시작은 워커 에반스의 눈길을 ‘제대로’ 사로잡은 폴 스트랜드의 <눈먼 여인> 사진이다. 이 사진은 저자가 어린 시절 읽었던 워즈워스의 시로 넘어가고, 그것은 스트랜드의 사진찍기 방식에 관한 설명으로 갔다가, 루이스 하인의 맹인 사진으로, 다음은 게리 위노그랜드의 사진으로 넘어간다. 이것이 사진 자체에 대한 서술을 통해 워커 에반스의 같은 소재를 다룬 사진 설명으로 이어지고, 자연스럽게 눈먼 사람의 또 다른 표상처럼 아코디언을 다루면서 벤 샨이란 사진가의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란 주제로 안드레 케르테스를 등장시키며 사진가로서의 그의 삶을 자신의 해석을 담아 스케치―“그의 비전은 날카롭고, 미묘하며, 선율적이고, 인도적이었지만, 그 자신은 마치 눈먼 사람처럼 취급받았다.” 그의 초기 사진들은 이미 원숙하고, ‘혈기왕성한 청년이었을 때조차 그의 일부는 좀 더 나이들고 슬픈 자아의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았’으며 훗날 “다가올 상실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해 준다.

 다시 ‘눈먼 아코디언 주자’는 장례식 장면으로 이어지고, 기차의 차창은 경로의 진행 방향으로 바뀌고, 이탈로 칼비노의 글쓰기에 관한 인용글을 통해 에반스의 ‘자기 지시적 이미지’이라는 개념으로 나아간다.

 즉 계단은 의자로 바뀌고, 의자는 침대에 자리를 내어주며, 침대는 다시 벤치로 넘어가는 식이다. 맹인의 시선이 사람의 뒷모습인 등과 엉덩이의 표정에 관해, 그리고 손 제스처에 관한 서술로 전개되는 것처럼 말이다. 마이클 오머로드의 <손상된 울타리>는 존 치버가 수차례 언급한 ‘빛의 도덕적 성질’과 만나고 안드레 케르테스의 <부서진 벤치>와 폴 스트랜드의 ‘계단’을 이어준다. 창문의 여러 형식은 자동차의 달리는 시점으로 보면 고속도로를 만나고 잭 케루악과 비트의 감성을 느끼게 해 준다. 여러 사진가들의 고속도로 사진에 대한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빔 벤더스의 시적인 사진 에세이 <한번은>이 행복하게 떠오르고, 저자의 감성적이며 전방위적으로 종횡무진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잊고 있던 옛날 영화들이 기억 저 밑바닥에서 문득 고개를 든다.

* “이 책을 읽고나면, 삶이 더 크게 보인다.”

 제프 다이어는 존 버거^{John Berger}의 에세이 선집 편집자이기도 하다. 사실 처음 이름도 생소한 저자의 이 책을 선뜻 잡았던 이유는 그의 멘토이기도 한 존 버거의 저 추천사 때문이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성취하고자 한 야망의 하나인 ‘동시성과 연속성을 조화시킬 것’은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또한 그가 다이앤 아버스의 말을 인용하며 ‘사물의 성질을 일부라도 포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 목표에도 어느 정도 도달한 듯이 보인다. 무엇보다 저자가 사진이라는 테마로 그려내는 예술과 인간의 행로를 따라가다 보면 읽는 사람 역시 사진과 여타 장르의 경계가 어느 결엔가 흐려지면서 다양한 범주를 넘나드는 희열을 맛보게 된다. 물론 이런 면이 처음 입문하여 제반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미로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저자의 그토록 섬세하고 풍부한 문학적 표현과 가장 일상적이고 단순한 언어로 차분하게 일러주는 아름다운 삶의 감성에 어느 결엔가 빠져들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사진이라는 기억(존재)의 형식이 삶(시간)이라는 이야기와 만날 때 어떻게 우리의 삶이 더 커질 수 있을까. 제프 다이어는 겸손하게 시작했지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철저하게 자신의 언어라는 프리즘을 통해 사진과 사진가의 삶을 헤아려 정지된 순간에 잠겨 있는 ‘지속되는 전통’을 벼려내면서 그 순간의 과거와 미래, 앞면과 뒷면, 슬픔과 행복, 시선과 사이의 거리, 상황과 정황 등을 세심하고 우아하게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인다. 그런 그의 글은 단순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고, 그 표현에 담긴 시선의 넓이와 사유의 깊이만큼, 그리고 사진을 읽는 그 순간의 지속^duration만큼 우리의 삶이 커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그것이다. 글쓴이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 이야기는 보편적 아름다움을 담고 온전히 전달된다. 더불어 ‘순간의 지속’을 이야기하는 만큼 거기에 담긴 많은 물음과 기다림 또한 이 책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 세상에, 어디나 밑줄을 긋고 순간순간 떨리는 상상으로 갈피마다 멈춰서야 하는 이런 책과 저자를 만나다니, 참 기쁘다.

 - 제프 다이어^{Geoff Dyer} 지음, 『지속의 순간들^{The Ongoing Moment}』, 한유주 옮김, 사흘 펴냄,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