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트렌드 추종이 아니라 선도의 모델이 되겠다는 대담한 선언과 함께 이효리의 《H-Logic》(2010)이 발표되자마자 연일 뮤직비디오가 방송되고, 패션에 대한 탐구와 후배 가수들의 찬사가 속속 전해졌으며, 전문가까지 가세하여 호평을 선사했다. 그리고 어느 날, 이 분주한 환영식은 ‘바누스의 표절사태’와 함께 아스팔트 도로 위의 신기루처럼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사실 포스트-트렌드라는 트렌드를 신인 작곡가에게 ‘발주’한 순간부터 한쪽 발을 수렁에 들여놓은 셈이었고, 이내 벼랑으로 굴러 떨어질 위기에 놓인 것이다.

 분업공정에 의한 책임분산 시스템 하에서 결정적 타격은 납품업자인 작곡가에 집중되었지만, 이효리도 해명할수록 변명이 되어 버리기 전에 깔끔하게 활동을 접었다. 잠시나마 아이돌 출신 가수가 자기주도형 대형가수로 성장하는 과정을 기대했던 자들은 머쓱하게 하던 일을 계속해야 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새로운 노선을 선택해야만 했으니 이효리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또한 동물보호활동, 소셜테이너 진입, 채식의 실천, 상업광고 중단 등은, ‘공정○○’마저 트렌드가 되어버린 시대라지만, 유명인의 가치 있는 모델 제시에 일조했다. 그래선지 발길을 거두어 이삿짐을 풀어놓고 책을 꺼내어 책장에 꽂고 있던 사람들까지 잠시 손을 놓고 《Monochrome》(2013)을 돌아보았다.

* 새로운 모색과 생존의 도모 사이

 이효리의 다섯 번째 앨범에 실린 <미스코리아>는 공개 직후에 거의 모든 음원차트의 1위를 휩쓸었다(그리고 금세 내려왔다). 음원 중심으로 재편되어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게 된 음악시장에선 1년이나 1개월 단위가 아니라 1주, 심지어 1일 단위로 이슈가 바뀐다. 이제 ‘차트 1위’는 영예로운 선물이 아니라 단발성 홍보효과의 의미에 머물 뿐이다. 이보다 중요한 주목할 부분은 30대 가수 이효리의 포지셔닝^positioning과 타깃팅^targeting의 변화이다. 음악계의 앨범 커버아트에는 나름의 전통이 있는데, 캐릭터 중심인 경우에 주인공의 얼굴을 전면에 내세우고, 음악 중심인 경우에는 내용물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로 커버아트를 만드는 식이다. 보는 바와 같이 이효리의 세일즈 포인트는 그대로이지만, 캐릭터와 음악에는 미묘한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규호, 조동희, 배영준처럼 ‘나이를 초월하여 공감대를 형성하는 음악을 세상에 실어 보내온 공동체’ 하나뮤직과도 인연 있는 음악인들이 작사가와 편곡자로 참여했다. 빈지노, 고고보이스와 같은 인디음악인들도 동참했는데, 《H-Logic》에 빅뱅의 대성, 리쌍의 개리, 애프터스쿨의 베카와 포미닛의 지윤을 동원했던 것과 대조된다. 가장 의외의 조합은 괴이한 ‘하드코어 컨트리’를 구사하는 인디-컨트리블루스 뮤지션 김태춘의 가세이다.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음악인이 새로운 시도를 감행할 때엔 모델을 찾거나 조력자를 얻어야 한다. 이효리 곁에는 적정기술의 소유자가 있었다. 지누 그리고 조원선과 함께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로 활동했으며, 베란다 프로젝트로도 호응을 얻어낸 이상순이다. 그는 이효리의 자작곡인 <미스코리아>를 편곡하며 힘을 보탰을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의 음악인들을 연결시키는 역할도 맡았을 것이다. 이효리와 이상순은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 폴 사르트로, 아나이스 닌과 헨리 밀러, 한나 아렌트와 마르틴 하이데거, 도린과 앙드레 고르처럼 세기의 커플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긍정적인 음악인 커플로는 기억될지 모른다.

 그러면 결과는? 어쿠스틱 팝 밴드 사운드의 <미스코리아>는 선입견 없이 듣는다면 기대 이상이다. 이효리의 보컬도 가창력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 중음역대를 활용하고 있으며, 이상순의 편곡과 만나 장필순이나 조원선의 노래를 떠올리는 구석까지 있다. 대중음악에선 시대와 캐릭터에 따라 보컬 스타일에 차이가 있는데, 이를테면 1990년대 대중가요의 특징은 ‘착한’ 보컬이었고(당시 신세대 밴드와 가수의 음색과 창법을 떠올려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강한 캐릭터라든가 트렌드 세터의 콘셉트를 취한 가수들은 대개 공세적인 보컬을 구사하고 있다. 반면 이효리는 <미스코리아>, 정태춘의 <사랑의 부도수표>와 <묻지 않을 게요>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부른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선회’의 모범사례였던 엄정화의 노선과 비슷하게 여겨질 수 있다. 엄정화는 《Self Control》과 《Prestige》에서 실력과 신선함을 겸한 음악인들과 작업함으로써 감상이 가능한 일렉트로닉 음악을 시도하여 스스로를 갱신한 바 있다. 하지만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Monochrome》은 어쿠스틱 팝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리듬 앤 블루스, 로큰롤, 빅밴드의 요소를 가미한 소울, 느긋한 마칭댄스를 아우르는 선까지는 풍성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붕붕 돌출하는 곡들이 있으며, <Amor Mio>처럼 뜬금없는 영미 발라드 듀엣, 그리고 랩과 개그맨의 내레이션을 상투적으로 삽입한 곡들까지 끼어들면서 다른 단어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음악생태계의 내적 다양성과 달리 개별 앨범의 내적 산만성은 감내하기 괴로울 때가 많다. 심지어 잘 나가는 작곡가 몇 명이 ‘판’을 장악하자 앨범마다 가수의 이름만 다르게 적어놓은 차이 정도 외에 발견하기 힘든 예도 적지 않다. 《Monochrome》 역시 일관성을 확보한 앨범이라기보다는 모음집에 가깝다.

* 그래서 모순일 수밖에 없는

 이를 두고 음악감독의 부재 때문이라고 정리해 버리면 참 속편한 결론이다. 원인은 포지션은 이동 중이나 생존의 기반이 되는 타깃이 애매한 상태인 이효리의 위치 때문이다. 새로운 모색과 안전성의 병렬적 추구는, 전술한 새로운 조합들이 무색하게, 공인된 해외 작곡가 그룹이 앨범 내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점한다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묘한 구석도 있다. 제주4·3항쟁을 표현한 것으로 들리는 <노>(이규호 작사)는 “이어도사나”와 장중한 이미지를 결합한 곡인데, 유사한 무드에 능숙한 이상은과 달리 이효리의 가창은 썩 어울리지 않거니와, 제주의 역사를 전혀 모를 해외 작곡가 그룹이 만든 곡조를 타고 흐르는 장면도 어딘지 생경하다.

 오늘날 여성들의 고충을 대변하면서 위로하는 <미스코리아>는 화자와 청자의 일치 가능성이란 점에서 유효하다. ‘나쁜 여자’를 긍정하는 <Bad Girls>도 익숙하지만 유용하다. 그런데 이 곡들은 뮤직비디오와 안무를 통해선 성^性스러운 이미지로 표현된다. 물론 전쟁에 반대하는 영화가 리얼한 전투장면의 쾌감을 전파하고, 폭력에 반대하는 영화가 폭력의 쾌감을 선사하고,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영화가 곧잘 선정성을 무기로 삼는 시의 주제와 형식의 불일치는 예술(과 인간)의 부정하기 힘든 특징이다. 또한 이 모순은 연예산업을 포함한 산업사회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의 활발한 사회진출은 지위향상이라는 사회적 의미도 있지만 노동력 보충이란 시장의 요구 때문이기도 하며, 복지의 확대 역시 내수 구매력 보충과 사회변혁 가능성의 차단이라는 시장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처럼.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맹아기를 찾고자 눈물겹게 노력했던 역사가들처럼 굳이 이효리와 《Monochrome》에서 과한 의미를 발굴해낼 필요는 없다. 스토리는 별로인데 캐릭터는 괜찮은 영화도 나쁘지 않은 작품이니까. 흥미와 취미를 한가득 섞어놓은 수다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청중이 시계를 내려다보며 끝나기를 기다리는 연설보다 낫지 않은가. 그리고 모순을 피할 수 없는 절충, 그리고 아홉 곡의 노랫말을 직접 쓴 이효리의 포기할 수 없는 자기표현의 의지는 서바이벌 시대를 사는 젊은 세대의 생존법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