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가 대세다

 요즘 대세인 예능으로 떠오르고 있는 <아빠, 어디가?>는 제목 그대로 아버지들이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리얼 다큐로 꾸민 것이다. 시청률 40%를 넘나들며 인기를 끌었던 <내 딸 서영이(2012. 09. 15~2013. 03. 03 종영)>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지고지순한 부성애를 다루었다. 어디 그뿐인가. 자식들을 유학 보낸 후 혼자 사는 기러기 아빠들이 <나 혼자 산다>를 통해 그들의 고독한 삶을 당당하게 드러내 보인다. <개그콘서트>도 재빠르게 ‘나는 아빠다’라는 꼭지를 통해 이 시대에 트렌드가 된 아버지들의 삶을 개그 소재로 다루고 있다.

 #1. <나 혼다 산다> 이성재 집을 처음 방문한 아버지, 의자 하나 없는 오피스텔을 쪽방이라 부르며 마땅찮아 하지만, 아버지에게 인정받기를 갈구하는 이성재가 자신이 출연한 프로그램을 보여주며 칭찬해 달라고 하자, 뜬금없이 “내가 잘못 살아서…”라고 말끝을 흐린다.

 #2. <나 혼자 산다> 딸들에게 아빠가 혼자서도 잘 지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출연을 결심한 기러기 아빠 이성재, 캐나다에 유학 간 딸들을 위한 의미 있는 선물로 딸들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영상 메시지를 담기 위해 발품 파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아버지라고 다 같은 아버지가 아니다.

 세대별, 연령별로 텔레비전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천양지차다. 여전히 자식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늙수그레한 아버지들이 있는가 하면, 친구처럼 아이들과 어울려 호흡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젊은 세대의 아버지들이 있다.

* 돌아온 탕자, 중년 이후의 아버지들

 얼마 전만 해도 아버지라고 하면 자식의 공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늦게 들어오는 것이 장려되는 존재였다. 그때의 아버지들은 그저 나가서 돈만 벌어오면 가족으로서의 임무가 완성되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돈’으로 권위가 완성되던 시대의 아버지는 그 ‘돈’ 덕에 집안에서 독재자처럼 말 한 마디로 군림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시대가 변했다. jtbc의 주말 연속극 <무자식 상팔자>의 독재자 같았던 할아버지 이순재가 할머니의 이혼 소동 끝에 할머니의 눈치를 보는 처지로 전락하고, 한때는 대기업의 중책을 맡던 둘째 아들(송승환 분)이 퇴직 후 생활고에 대한 불안감에 조바심 내는 아내 덕에 자기가 번 돈 한 번 제대로 못 쓰는 꽁생원으로 전락한다. 즉 ‘돈’으로 연명하던 권위는 세월에 따라 무색해지고, 불경기가 계속되는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돈’조차도 마음대로 벌어지지 않으니 거기에 의지해 권위를 행사하던 아버지들의 처지는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 후의 가부장제란 ‘개밥의 도토리’ 처지다.

 그래서 방송에 등장하는 중년 이후의 아버지들은 부쩍 불쌍해졌다. <내 딸 서영이>의 아버지도 아내와 딸도 나 몰라라 도박에 빠진 아버지였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일찍이 젊은 시절부터 부모님과 가족을 위해 자신이 하고 싶던 공부까지도 포기했던 젊은 가장이었단다. 그런데 하고자 하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그만 나쁜 길로 빠져들게 된 것이고, 하지만 그에겐 여전히 자신의 아들과 딸이 자기 자신과도 바꿀 수 있을 만큼 가장 소중한 대상이라는 것이다. 산업화시대 입신양명^立身揚名과 재물을 향해 돌진하던 아버지들이, 그 전쟁에서 튕겨져 나왔을 때, 이제 그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건, 유전자가 아로새겨진 가족뿐이다. 그래서 부쩍 약해진 아버지들은 눈물을 흘리고 참회하며 가족들의 비위를 맞추며 가족의 일원으로 복귀하려 애쓰는 중이다.

* 친구 같은 젊은 아빠들

 아이들이 방과 후에, 혹은 주말에 무언가를 배우러 온 문화센터 등에 아이를 기다리는 젊은 아빠의 모습이 낯설지 않고, 가족과 함께 현장견학을 하는 적극적 부성애도 찾아보는 게 어렵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맞벌이가 일상이 된 요즘, 육아에서 아빠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는 가치관부터 다르다. 변화된 세대의 아버지들은 권위와 훈육보다는 공감을 중시하고, 가족을 삶의 중심에 놓는다. 전직 축구선수 안정환은 딸이 ‘꼭 갔다 오라고’ 해서 <정글의 법칙>에 출연하고, ‘딸하고 집에 앉아서 TV 보면서 물고기 사냥 얘기하는 걸 상상’하며 어려운 미션조차 감내한다. 당연히 그 예전 군대와도 같은 상명하복의 관계였던, 가족 내 부자 관계의 유형도 변화한다. <인간의 조건> 박성호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아들에게 가르치며 어릴 때부터 친구처럼 놀아주다 보면 ‘친구 같은 아빠’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친구 찾기’ 미션의 100번째 친구로 아들의 입술 도장을 박는다. 바로 프랜디^{Friendy; 프랜드friend + 대디daddy}, 친구 같은 아빠다.

 이렇게 변화된 가족상은 이른바 북유럽식 육아법, 스칸디 대디Scandi Daddy를 지향한다. 육아는 ‘부부 공동의 몫이지만, 그 중에서도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이의 성취감과 자존감을 고조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하여 큰 비중을 둔다. 아이를 가르칠 때도 자상함을 토대로 한 설득을 기본으로 하며,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이고 육체적 건강함을 지향해, 함께 신체적 활동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여하기를 권한다.’^조선닷컴 아빠가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놀러 다니며 체험 활동을 하는 <아빠, 어디가?>는 바로 이런 ‘스칸디 대디식’ 교육의 교과서 같은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탱자가 회수를 건너면 감귤이 된다고 하지만, 역으로 한국으로 들어온 ‘스칸디 대디식’ 육아법은 감귤이 탱자로 다운그레이드 되는 중이다.

 ‘아빠가 달라졌어요~’라는 아웃도어 캠핑 브랜드 광고의 차태현처럼 되기 위해, 우리 아빠들은 월, 화, 수, 목, 금요일을 죽도록 회사에서 일하고 나서, 다시 주말에는 가정에서 혹사당하는 헌신적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부부 공동 육아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스칸디나비아와 짧은 노동 시간과 육아휴직제도 등이 잘 갖춰진 나라와 달리, 여전히 장시간 고강도의 노동을 강요받는 대한민국에서 ‘아빠 어디가’의 리얼리티 판은 또 하나의 과중한 업무로 다가설 가능성이 크다.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여전한 야근이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독거노인처럼 고독하게 남겨진 기러기 아빠의 삶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런가 하면, 교육하면 ‘과열’이 세트메뉴처럼 따라붙는 대한민국에선 아빠의 육아 역시 ‘아빠 어디가’의 김성주 예에서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듯이, ‘^{헬리콥터맘’아이들이 성장해 대학에 들어가거나 사회생활을 하게 되어도 헬리콥터처럼 아이 주변을 맴돌면서 온갖 일에 다 참견하는 엄마} 못지않은 아빠 치맛바람으로 변질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또 ‘스칸디 대디’의 훈육 방식이 ‘자상하게, 하지만 사회적 규율에 있어서는 단호하게’라는 양 측면을 가진 것과 달리, 한국식 친구 같은 아빠들은 종종 ‘친구’ 같다는 도그마에 빠져, 아이의 세계에 동참하는 것 이상 사회적 존재로 내 아이를 성장시키는 ‘멘토’로서는 실패, 아이들과 텔레비전 채널 싸움이나 하는 유치한 존재가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30ㆍ40대 주부들이 리모컨의 향방을 좌우하는 시청률에 목매단 텔레비전은 절대 ‘프랜디’에 숨겨진 현실의 뒤안길을 살피지 않는 채 자상한 가장, 친구 같은 아빠의 이데올로기 유포에 급급하다. 물론, EBS 다큐 프라임 <파더쇼크>^{6, 10~6. 12, 방영}처럼 우리 사회의 건강한 부성父性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공중파의 메인 시간대 프로그램들에선 ‘프랜디’가 대세다. 여전히 눈치 없이 불뚝거리는 중년의 아버지, 야근으로 돌아오지 않는 남편 대신에, 텔레비전 속 멋진 아빠들이 폼 나게 부성을 노래한다. 텔레비전 속 판타지에 미소 짓던 아내들은 뒤늦게 나타난 남편에게 눈을 흘기며 아이와 놀아줄 것을, 가족을 위해 좀 더 희생할 것을 강권한다. 가정은 나 몰라라 돈을 번답시고 남편들이 밖으로 도는 사이, 타이거 ^{맘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시키는 호랑이 엄마}이다가, 어느새 가정의 전권을 움켜쥔 호랑이 같은 아내 앞에 남편들은 그저 한없이 작아진 채 눈치껏 비위를 맞춘다.

 돌아온 탕자든, 친구 같은 아빠든 달라질 것을 강요당하는 대한민국의 남성들의 현주소는 곧바로 대한민국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을 상징한다. 정년이 보장되지 않는 일자리, 맞벌이를 해도, 평생 내 집 한 칸 마련하기 힘든 벌이는 한때 빳빳했던 아버지들의 고개를 익은 벼처럼 숙이게 만들었다. 뼈를 묻을 수 없는 직장 대신에, 그저 나이가 들어도 한결같이 자신의 편일 것 같은(?) 가족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기러기도 불사하고, 절대 충성을 맹세한다(의외로, 진화 생물학적으로도 부성이 언제라도 아이를 낳아 또 다른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모성보다 더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가족 유지에 헌신적이란다).

 노동 시장도, 복지 제도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어 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삶의 불안정성에 시달리는 아버지들이 이제 잘 하는 것으로나마 가족을 유지해 갈 수 있을까? 하지만 어쩌면 그들이 봉합하고자 애쓰는 가족 또한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세계 수위의 이혼율이 증명이라도 하듯, 자상한 남편을 노래하는 또 다른 한편, 이른바, ‘막장’이란 장르로 자리 잡은 드라마 속 부부들은 전쟁과도 같은 아귀다툼을 벌이는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