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아버지’는 사라진 존재이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빠’이다. 아버지는 가족이 형성된 이후 오랜 시간 그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던 부동의 존재였지만, 20세기 후반 들어 실종되었다. 오늘날 아버지는 부재의 상징이다. 가족 구성원의 마음속에서나 구체적인 현실에서도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들은 더 이상 아버지를 원하지 않으며, 가족의 형태는 다양한 원인과 결과로 해체되었다. 아버지가 사라진 곳에 ‘아빠’가 돌아왔다. 그렇다면 ‘지금 왜 아빠인가’라는 물음은 단순히 가족이나 가정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혹은 아빠의 새로운 역할이 무엇인가를 묻는 수준을 넘어선다. 비혼과 이혼, 무자녀 등 다양한 이유로 가족 구성의 형태가 바뀌고 있으며, 가족의 의미가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과정에서 아빠의 위치나 정체성이 함께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아빠의 등장에 대한 물음은 좀 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나아가 정치적 물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는 ‘아빠’는 어떻게 등장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아버지 혹은 부성에 대한 논의는 각각의 종족과 문화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산업화 시대 이후 20세기의 자본주의 시대의 아버지상이 지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에서 최근 아버지를 둘러싼 다양한 현상과 담론들이 등장하는 것도 예외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분명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인 동시에 한국사회가 갖는 특수한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사회와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에서도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아버지상, 혹은 부성은 이미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미디어에 주로 등장하는 아버지는 엄격하고 훈육적인 존재가 아니다. 어쩌다가 그런 아버지가 나타나면 다양한 방식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아버지’로 공격을 당한다. 이제 아버지는 부드럽고 친근하고 따뜻한 존재이며, 그러한 존재여야 한다. 한 마디로 ‘친구 같은 아빠’이다. ‘친구 같은 아빠’는 일종의 오늘날 아버지의 이상형에 가까운 상징적 표현이다. 그러한 아빠는 현실 속에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지만 간간히 주변에 출몰하곤 한다. 그것은 옆집 아저씨거나 다양한 삼촌들이다. 그들은 항상 곁에 머물면서 생활하는 존재가 아니라 아주 가끔 만나서 무리한 요구를 받아주는 아주 ‘착한’ 아저씨이다.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느끼게 되는 벽은 없으며, 나에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날카로움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아버지와는 친구가 될 수 없지만, 그들과는 쉽사리 친구가 된다. 왜 아니겠는가? 그들은 나를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며 나를 야단칠 하등의 이유도 없으니 말이다.

 여기서 ‘친구 같다’는 말의 핵심은 권위적이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곧 자신의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평등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억압과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수평적 관계가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 형성되는 것이다. ‘친구 같은 아빠’는 자식에게 명령을 하지 않으며, 일방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식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대화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착한 아빠이다. ‘친구 같은 아빠’는 주로 2000년대 이후 주변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이 단순히 이상적인 형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 속에 나타난 것이다. 이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현상이 ‘호칭’의 변화이다. 즉 더 이상 존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존칭의 생략은 자식이 아버지에게 반말을 하는 것이다. 모든 호칭은 수평적 관계의 핵심이다. 특히 유교적 가부장제가 강한 한국사회에서 존칭을 없앤다는 것은 매우 혁명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아빠와 자식의 관계가 새로운 방식으로 맺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칭을 사용하지 않고 친구처럼 반말을 사용하는 것은, 아빠 입장에서 ‘친구 같은 아빠’라는 존재감을 얻기 위한 거래의 대가이다. 존칭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 미국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1980년대 이후 등장했는데, 그것은 아버지나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아버지를 지칭할 때 따로 호칭을 말하지 않고 그냥 이름만 부르는 것이다.

 아버지는 더 이상 권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르는 관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도대체 누가, 혹은 무엇이 이 관계를 이렇게 바꾼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자식도 변했고 아버지도 변했고, 무엇보다 이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변했다는 점이다. 아버지라는 위상과 정체성은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 아버지가 누렸던 권위는 온데간데없으며, 지난 세대의 아버지가 감당했던 여러 가지의 역할과 기능은 새로운 부성의 이미지와 필요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 2.

 새로운 부성의 이미지는 ‘친구 같은 아빠’로 축약되는데, 여기에 동반되는 또 다른 표현으로 ‘좋은 아빠’ 담론이 있다. 좋은 아빠라는 말은 친구 같은 착한 아빠의 범주를 포괄하면서도 동시에 넘어선다. ‘좋다’는 말은 지극히 사회적인 의미를 담아내는데, 왜냐하면 오늘날 자식들이 ‘좋은 아빠’라고 지칭하는 것에는 ‘경제적 풍요’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자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빠일 때 비로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경제적 성공이 없다면 착한 아빠는 될 수 있을지언정 ‘좋은 아빠’는 될 수 없다. 경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책임을 감당하면서 동시에 아이들과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때에야 ‘좋은 아빠’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평일에도 어느 정도 시간을 아이들과 보낼 수 있어야 하고, 주말에도 교외로 떠나거나 적어도 놀이터에서 함께 신체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자이다. 좋은 아빠에게 경제적 성공은 옵션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장착되어야 할 요소이다.

 최근 TV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MBC의 <아빠 어디 가?>라는 프로그램은 ‘좋은 아빠’가 어떤 것인지를 아주 잘 보여준다. 이 프로그램에서 아빠와 자식이 함께 여행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대부분의 가정이 욕망하던 순간들이다. 더욱이 엄마라는 존재는 없다. 그것은 엄마에게도 행복을 선물한다. 아이를 임신하는 순간부터 항상 양육의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어머니라는 존재에게 그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가장 큰 해방감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빠와 아이들의 관계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경험을 토대로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상당수가 20-30대의 미혼/비혼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어쩌면 화면에 재현되는 낭만화된 상황에 익숙할지도 모른다. 이미 <1박2일>과 <패밀리가 떴다>, <무한도전> 등 많은 리얼리티 프로그램 전성시대를 거치면서 자신의 실제 경험보다는 TV라는 매체에 훨씬 더 익숙해져 있다. 그들은 편집된 화면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만을 좋아한다. ‘윤후’라는 캐릭터는 많은 젊은 여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를 키워보면 그런 순간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폭발하는 순간도 있음을 알게 된다. 아이들이 귀여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죽이고 싶도록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의 현실은 프로그램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TV 토크쇼에서 마냥 행복하게만 보였던 커플들이 이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프로그램에서 나타나는 것은 극히 일부의 모습에 불과하며,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위한 일종의 연출된 화면일 수 있음에도 그러한 가능성은 배제한다. 아이들의 순수성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신뢰’가 이미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표상되는 아빠는 자상하고 따뜻한 아빠, 즉 ‘좋은 아빠’이다. 친구 같은 아빠나 착한 아빠를 넘어서는 지점에 그들의 목표가 있다. 그들은 배우, 가수, 스포츠선수 등 각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경제적 성공의 측면에서는 검증된 존재들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현실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직접적으로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아가지 않는다. 그들이 힘들게 각자의 영역에서 전문가로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절대적 비교를 하자면 경제적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이 프로그램이 갖는 사회적 맥락의 중요성이다. 결국 이 과정에서 평범한 아빠들은 절망한다. 어쩌면 아이들을 더 큰 절망에 빠뜨릴지 모른다. 왜 우리 아빠는 저렇게 해주지 않는 것일까? 특히 아직까지 사회현실이나 방송 프로그램에 대해 어떠한 판단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들의 경우에 즉자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그 부작용이 크지 않으리라고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아버지는 가족 부양이라는 경제적 책임과 더불어 ‘좋은 아빠’라는 이데올로기적 주체로서 훌륭한 역할까지도 감당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가 나오고 있다.

 루이지 조야는 『아버지란 무엇인가』^{이은정 옮김, 르네상스, 2009}에서 현대사회의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아버지들은 이전처럼 자식을 교육시키고 직업의 기술을 전수해 주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수천 년 동안 아버지들은 자식들에게 어떻게 말을 타야 하는지를 가르쳐 왔고, 또 몇 세대 동안은 어떻게 자전거를 타야 하는지를 가르쳐 왔다. 하지만 오늘날 아이들은 여가시간이 있어도 아버지와 함께 보내기보다는 또래 친구들이나 학교생활을 위해 사용한다. 그리고 집에 부모와 함께 있어도 자신들의 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는 데 몰두한다. 슬픈 사실은 오늘날의 아버지들이 예전의 농사 기술처럼 자식들에게 컴퓨터 게임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공간과 시간은 이제 아이들의 공간이나 시간과 완전히 분리된 다른 세계이다.”^p.434

 그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아버지가 감당했던 역할과 기능이 또래 친구들에게 옮겨간 것이다. 아버지는 더 이상 자식들에게 어떤 모범의 역할을 할 수 없으며 그 과정에서 전달했던 수많은 권위와 감동을 더 이상 생산할 수 없다. 오늘날 아이들이 관심을 보이는 영역에서 아버지들은 더 이상 어떤 역할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의 모든 영역에서 아이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어긋나 버린 것이다. 그 간극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경제적 성공’, 즉 자본(돈)이 되는 셈이다. 아버지는 아이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돈을 매개로 할 수밖에 없다. 기념일이면 항상 빠지지 않는 선물과 주기적으로 줘야 하는 용돈, 그보다 더 중요한 주거와 자동차 등 삶의 질의 측면에서 아버지는 결국 경제적 자본의 형태로 모든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 3.

 아버지의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외부적 환경에 의한 요인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언제, 그리고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즉 ‘아버지’라는 존재는 어떻게 등장한 것인지에 대한 것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행해져 왔던, 그리고 행해져야 한다고 믿는 ‘부성’이라는 것이 과연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인가 하는 궁금증과 맞닿아 있다. 정말로 부성은 교육이나 훈련과는 상관없을까? 이 질문은 결국 부성이라고 말하는 행동들이 본능적인 것인가, 즉 교육이나 훈련과는 상관없이 본능에 가까운 것일까?

 이에 대해 학자들은 대체로 부성과 모성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동의하고 있다. 모성은 자신의 몸을 통해 수태와 임신, 출산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그 후에도 지속적인 돌봄의 과정이 이어지는 반면, 부성은 신체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형식들이 남자들에게 덧입혀진 결과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언제나 확실한 반면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는 속담은 부성과 모성 사이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 예로 침팬지와 같은 고등동물의 경우 어미 암컷은 자기가 낳은 자식이 누구인지를 안다는 점에서 항상 확실한 존재이지만, 아비는 그러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어린 새끼들과 장난을 치는 자상함을 보여주기도 하고 다른 녀석들로부터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자신의 새끼들에 대한 인식이 없다. 그 새끼들을 보호할 수 있는 은신처를 마련하지도 않으며, 그들에게 먹이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다만 혼자 다 먹을 수 없기 때문에 함께 나누어 먹을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부성의 문제를 ‘문명의 출현’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보기도 한다. 어떤 학자는 문명의 시초에 남성이 처음으로 여성과 그녀의 자식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던 순간을 부성이 탄생한 최초의 순간이라고 보았다. 사실상 이런 행동은 포유류가 거의 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한다. 하지만 남성들은 어느 순간 이런 역할을 선택했고, 이 역할을 지속하기 위한 의지를 드러냈으며, 그러고 나서는 습관으로 굳어져 후손들에게 전수된 것이다. 부성은 모성과 달리 본능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적 규율과 같아서 학습과 훈련을 통해 전수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과의 관계를 개별적으로 맺는다. 반면에 아버지는 가족과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다면적이고 집단적이다. ‘가장’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러한 역할의 이미지를 잘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근대 이후 다양한 직업의 변천 과정에서 아버지는 직업에 따라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 권위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중반 『세일즈맨의 죽음』에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과 오늘날 직장인으로서 아버지가 느끼는 절망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세일즈맨이라는 직업적 특성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전통적인 직업이 점차 줄어들거나 맞벌이의 증가로 인한 경제적 책임의 분산 등은 아버지가 갖는 가장으로서 역할과 책임이 축소되거나 소멸될 수밖에 없다. 아울러 1970년대 산업화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는 물리적 공간의 거리감을 갖게 되었다. 경제적 이유와 자식 교육 등 그 이유와 상황은 매우 다양하다. 분명한 사실은 물리적 거리라는 간격은 정서적 간격으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사회적으로 부각된 것은 IMF 구제금융 사태가 결정적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버지라는 존재는 전형적인 부성의 이미지, 즉 가족 부양의 책임을 지면서도 동시에 가정의 중심을 차지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닥친 금융위기는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있던 아버지라는 존재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사회적, 경제적 추락뿐만 아니라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표상되던 사회적 상징과 가치, 권위 등이 동시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아버지라는 권위의 상실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이라기보다는 사회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미 20세기 역사에서 한국사회가 경험한 아버지의 ‘부재’와는 질적으로 다른 매우 낯선 경험이었다. 일제 식민 시기나 한국전쟁을 통한 아버지의 부재, 나아가 근대화 및 산업화 과정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나 해외로 ‘떠난’ 아버지 등은 일종의 ‘부재’였다. 그렇지만 부재가 곧 아버지라는 권위의 상실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도 항상 아버지는 가정의 중심이었고, 아버지라는 이름의 가부장제는 유지되었으며, 다양한 사회적 제도와 장치를 통해 아버지는 여전히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 그 부재의 자리는 때로는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할아버지, 나아가 대통령이 ‘국부’라는 이름으로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바로 그 아버지를 ‘상실’한 것이다. 그 아버지가 무조건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인류의 오랜 역사 과정에서, 혹은 한국사회에서 고유하게 지속되었던 아버지라는 정체성이 사라진 것이다.

* 4.

 오늘날 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상되고 있는 아버지는 분명 현실의 왜곡된 이미지이다. 자식들과 따뜻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는 아빠, 아이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전폭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아빠 등등. 그럼에도 관객 혹은 시청자라는 이름의 대중들은 그러한 모습에 열광하고 환호한다.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한 대중은 만들어진 집단인가? 그렇지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양상을 드러내는 대중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화면 속 아빠와 현실 공간의 아빠가 보여주는 간극과 차이를 견뎌야 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의 물음은 그곳으로 향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대중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로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것일까?

 우리 사회는 ‘아버지’와 ‘아빠’의 대립을 보여준다. 더 이상 아버지는 강한 존재라기보다는 실패하거나 낙오한 존재이다. 그들은 힘이 없고, 사회적으로 밀려나고 있으며, 경제적 능력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완고한 성격을 갖고 있어서 자식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제 아버지는 쇠락하는 과정에서 점차 변방으로 사라지는 존재이다. 이를 대체하고 있는 이들이 ‘아빠’이다. 아빠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고, 무엇보다도 건강하다. TV나 광고 등에 등장하는 아빠의 모습은 이제 늙고 병든 모습이 아니라 항상 건강한 신체와 경제적 성공을 겸비한 능력자이다. 노동자로서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가족의 삶을 감당했던 아버지라는 존재는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훨씬 더 다양한 형태의 하층 노동계급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비정규직이나 해고, 실업 등 현실은 더 가혹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좋은 아빠’와 같은 다양한 담론과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은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에서 아빠 혹은 아버지를 호명하고 있는 현실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새로운 정체성의 아버지, 즉 ‘아빠’라는 이름의 부성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동시에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과 부양 능력의 변화에 따라 더 이상 남성 아버지의 역할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의 발달에 따라 권위의 상징인 아버지의 위상이 비례적으로 점차 추락해 왔다는 사실을 수용한다면, 오늘날 아버지에 대한 호명은 어쩌면 남성(성)에 대한 호명과 다르지 않다. ‘상남자’에 대한 선호가 회자되는가 하면, <진짜 사나이>나 <푸른 거탑>과 같은 군대 관련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한 예이다. 다시 말해 강력한 힘과 권력, 카리스마에 대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최근 남성 중심적이고 독재자를 숭배하는 ‘일베’의 등장이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이 아닌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부성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 사회의 개인들이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앞으로 지켜보고, 모색해야 할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