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은 누가 뭐래도 인천 사람이다. 그는 경기도 인천부仁川府 다소면多所面 선창리船倉里 용현龍峴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 동인천동 117번지, 동인천 길병원 자리다. 인천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취헌醉軒 김병훈金炳勳의 의성사숙意誠私塾에서 한학의 기초를 닦았고,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를 다녔으며, 경성의 보성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을 다닐 때도 인천에서 통학했다. 1929년 결혼해서도 용동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내동內洞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경성제대 미학연구실을 오갔다. 기록에 따르면, 우현은 1905년 2월 2일 태어나서 결혼 후 경성 숭이동崇二洞으로 이사하게 되는 1931년 5월 20일까지 정확하게 이십육 년 삼 개월 십팔 일을 인천에서 살았다.
우현에게 고향 인천은 어떠한 곳이었을까. 그가 인천에 관해 남긴 글이나 기록은 매우 소략한데, 그 얼마 안 되는 글 중 1939년에 발표한 「명산대천名山大川」이라는 수필에 인천 바다가 다음과 같이 그려지고 있다.

“강화(江華)·교동(喬桐)·영종(永宗)·덕적(德積)·팔미(八尾)·송도(松島)·월미(月尾)의 대소 원근의 도서(島嶼)가 중중첩첩이 둘리고 위워진 가까운 인천 바다를 들자, 아침마다 안개와 해미를 타고 스며 퍼져 떠나가는 기선(汽船)의 경적 소리, 동(東)으로 새벽 햇발은 산으로서 밝아 오고, 산기슭 검푸른 물결 속으로 어둔 밤이 스며들면서 한둘, 네다섯 안계(眼界)로 더 드는 배, 배, 배. 비가 오려나, 물기가 시커먼 허공에 그득히 품겨지고, 마음까지 우울해지려는 밤에 얕이 떠 노는 갈매기 소리, 소리. 또는 만창(滿漲)된 남벽(藍碧)이 태양 광선을 모조리 비늘져 받고, 피어 뜬 구름이 창공에 제멋대로 환상의 반육부각(半肉浮刻)을 그릴 때 주황의 돛단배는 어디로 가려나. 먼 배는 잠을 자나 가도 오도 안 하고, 가까운 배는 삯 받은 역졸(驛卒)인가 왜 그리 서둘러 빨리 가노. 만국공원(萬國公園)의 홍화녹림(紅花綠林)을 일부 데포르메(deformer)하고, 영사관의 날리는 이국기를 전경에 집어넣으면 그대로 모네(C. Monet)가 된다.” 

인천 앞바다의 풍경을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한 글이 또 있을까. 불덩이 같은 해가 쑥 올라오는 동해의 일출이나 붉게 타는 노을의 서해 풍경이야 많은 사람들이 읊조린 바 있으나, 해 뜰 무렵의 인천 바닷가를 이토록 운치 있게 묘사한 글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이다. “동東으로 새벽 햇발은 산으로서 밝아 오고, 산기슭 검푸른 물결 속으로 어둔 밤이 스며들면서 한둘, 네다섯 안계眼界로 더 드는 배, 배, 배”라는 구절에서는, 동해와는 또 다르게 서해의 일출이 운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왜 해보지 못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한다. 우리는 과연 서해의 일출을 생각해보기나 했는가! 여기서 나아가 만국공원의 붉은 꽃과 녹음을 약간 변형하고 이국기異國旗를 전경에 집어넣으면 영락없는 모네의 작품이 될 것이라 상상하고 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1867년 작〈생타드레스의 테라스〉를 떠올린 것이리라.

『조광朝光』 1937년 5월호의 설문에서 고향의 잊을 수 없는 풍경으로 이미 ‘월미도의 낙조’와 ‘서공원西公園의 신록’을 꼽았던 그다. 앞서의 글에 나오는 만국공원이 바로 서공원이다. 그러나 우현은 고향을 그리는 때가 언제냐는 이어지는 설문에 대해 “없습니다. 오히려 지긋지긋할 뿐이외다”라며 지독한 냉소를 보인다.클로드 모네의 1867년 작 〈생타드레스의 테라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였지만, 어릴 적 아버지의 외도는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여덟 살 무렵부터 아버지는 집을 나가 서모와 살았고, 아버지의 외도를 어머니의 탓으로 돌리는 시집식구들에 의해 어머니는 그만 친정으로 쫓겨나고 만다.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 어린 우현은 어느새 과묵하고 반항적인 성격을 보이기까지 했다. 열여덟 살 무렵에는 아버지가 아예 서모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와 함께 살게 되는데, 서모와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음은 말할 나위 없겠고 늘 의기소침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이 물론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은 아닐 터이다. 우현에게 하나하나 각인되어 트라우마가 되었고, 고향에 대한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을 것이다. 그에게 고향의 풍경은 더없이 아름다웠으되, 그 시절 겪은 일들은 지긋지긋한 것이었다.
고유섭이 남긴 인천에 대한 또 하나의 짧은 기록을 우리는 「애상哀想의 청춘일기」에서 볼 수 있다.

“‘능허대(凌虛臺)’라는 것은 인천서 해안선을 끼고 남편(南便)으로 한 십 리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모래 섬이나, 배를 타지 않고 해안선으로만 걸어가게 된 풍치있는 곳이다. 이 조그만한 반도(半島) 같은 섬에는 풀도 나무도 바위도 멋있게 어우러져 있고, 허리춤에는 흰 모래가 규모는 작으나 깨끗하게 깔려 있다. 이곳에서 내다보이는 바다는 항구에서 보이는 바다와 달라서 막힘이 없다. 발밑에서 출렁대이는 물결은 신비와 숭엄과 침울을 가졌다. 편편이 쪼개지는 가을 햇볕은 나에게 항상 정신의 쇄락을 도움이 있었다.”

능허대는 백제시대부터 조선조 광해군 때까지 상인이나 사신들이 중국으로 떠나는 배를 타던 나루터가 있던 곳이라 한다. 개항을 하면서 제물포항이 조선의 관문이 되었던 것처럼, 그 옛날에도 중국으로 드나드는 전초기지의 역할을 하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을, 우현은 모래섬이지만 배를 타지 않고 해안선으로만 걸어서 닿을 수 있는, 풀·나무·바위, 그리고 흰 모래가 어우러져 있는 풍치 있는 곳으로 기술하고 있다. “신비와 숭엄과 침울을 가진 물결”, 그러한 바다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그 물결에 비친 가을 햇볕이 편편이 쪼개지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비길 데 없이 빼어난 해변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 이곳은 상전벽해桑田碧海되어 그 옛날의 정취를 찾아볼 수 없다.
우현이 경험했던 동틀 녘 인천 앞바다의 풍경과 능허대의 정취를 오늘에 되살릴 수는 없을까. 그가 사랑했던 문무대왕의 해중릉이 있는 감포 앞바다에 ‘나의 사랑하는 바다’ 시비詩碑를 세웠듯이, 인천 앞바다에 우현의 기념비를 세우고 ‘신비와 숭엄과 침울의 바다’라 명명해보면 어떨까. 누가 뭐래도 우현은 인천 사람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