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 작가 유리피데스^{Euripides, BC 484?~BC 406?}의 <메디아>가 창극으로 제작되어 국립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리피데스를 “가장 비극적인 시인”^{『시학』 13장}으로 평가한 바 있듯이, 유리피데스는 켜켜이 쌓이는 비극적인 정감을 만들어내는 데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극작가였다. ‘메디아’라는 신화적 인물을 희곡화하면서 유리피데스는 원작에 없는, 자신이 낳은 아들들까지 제 손으로 죽여 버리는 장면을 설정하여 ‘메디아’를 둘러싼 비극적 상황을 한층 극대화했다. 신화에서는 ‘메디아’가 친자식을 살해한 서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메디아> 외에 <바쿠스의 여신도들>에서도 유리피데스는 친자식을 살해하는 극단적인 설정을 보여주고 있다. 극 중 펜테우스 왕은 바쿠스^{디오니소스}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한 마리 황소로 인식한다. 이에 분노한 바쿠스는 펜테우스의 어미 아가베를 마이나데스 즉 바쿠스를 숭배하는 광신도로 만들어 그녀의 손으로 펜테우스를 찢어 죽이게 한다. 비이성적인 상태에서 저지른 일이지만 정신을 차린 아가베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고통 중 가장 극단적인 고통을 맛보게 된다. 바쿠스의 보복은 펜테우스를 죽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살인을 저지른 어미 아가베에게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유리피데스는 비극적 정감을 극대화하는 극작술을 시도하는 가운데 친자식을 살해하는 극단적인 사건을 여러 희곡에서 반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친자식을 살해하는 어미는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녀이거나 마이나데스였다. 이처럼 강렬한 악녀 이미지를 지닌 메디아 이야기가 창극화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재해석되었을까.

 창극 <메디아>에서는 희대의 악녀 ‘메디아’가 원작에서와 달리 친동생을 살해해 토막 낸 적이 없고 남편을 위해 죄를 뒤집어쓰는 전형적인 피해자로 그려져 있었다. 창극의 도창으로 설정된 다수의 코러스들, 특히 여성 코러스들이 “죄를 짓는 것은 남자, 벌을 받는 것은 여자”라는 노래를 반복함으로써 메디아를 희생자로 부각시켰다. 결말에도 도창들은 “불쌍한 메디아여”를 강조했다. 프리뷰 형태의 글들에서 ‘메디아’의 슬픔을 한국 특유의 정서인 한^恨으로 형상화할 것이라는 내용을 접하기는 했지만, <메디아>의 악행으로 인한 비극적 정감은 약화되어 있었다. 메디아의 붉은 의상과 강렬한 화장은 그녀 내면의 욕망을 외적으로 드러내려던 것이었겠지만, 막상 극이 전개되는 과정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서럽게 한탄하는 노래들이 많았다. 원작에서 볼 수 있었던, 이아고의 행위가 정의롭지도, 도덕적이지도 않다며 신에게 항변하는 장면들이 없었던 것이다. 원작의 메디아는 이아고의 배신에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듯하면서도 정의롭지 못한 행위라는 이성적 잣대를 들이댄다. 왕권을 위해 가정의 계약을 파기하는 행동은 부도덕하고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아고의 배신은 메디아에게 이아고 중심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것으로 인식되고, 이에 맞서 메디아는 관계를 역전시키기 위한 전복을 꾀한다. “성스런 강물도 흐름을 바꾸어라. / 온 세상 도리도 거꾸로 돌아라. / 속임수는 사나이의 마음속 / 그 맹세 어찌 믿어지리요. / 이제부터는 이야기가 바뀌어 여자에게 제 이름을. / 악한 이름은 이미 그들의 것이 아니게 되리라.” 이와 같은 희곡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아고의 배신은 단순한 부부 간의 배신이 아닌, 삶의 도리가 뒤집어질 위기의 순간이며 이 위기 속에서 메디아는 역으로 제 이름을 찾는 전복을 꾀하려 한다. 메디아가 전복을 통해 제 이름을 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며 여성의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원작과 비교할 때 창극의 ‘메디아’는 연민의 대상으로, 남편 때문에 자식을 살해하기까지 하는 한^恨 많은 여인으로 해석된 듯하다. 그러나 실제 신화 속 메디아가 신에게 구원을 받고 또 다른 왕과 결혼도 하는, 왕녀로서 자신의 명예와 자리를 지켜나간 것과 비교할 때 창극에서의 해석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리고 메디아와 이아고의 파경으로 희생되는 이는 두 아이들이라 여겨진다. 창극 <메디아>에서는 이 아이들을 인형으로 등장시키고 인형 조종자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는 등 아이들 형상화에 공을 들인 듯하지만, 아이들의 등장은 메디아의 모성애가 얼마나 강한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 아이들이 희생양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려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원작에서는 메디아가 아이들을 죽이는 것을 폭력 그 자체로 해석하게 한다. 그리고 이 폭력을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제의적 행위로 해석되게 한다. 메디아는 이 제의를 통해 자신들의 아이를 성스러운 영혼으로 탈바꿈시키고 동시에 이아고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그 공간을 떠나는 것이다. 이아고가 결국 메디아의 저주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보아, 원작은 메디아가 자신의 마법을 이용해 이아고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고 끝내 승리하는 여인으로 형상화된 것으로 보인다. 창극에서는 메디아가 아이들을 살해하는 행위 속에서도 모성애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고 남편으로 인해 ‘한’이 생긴 여인이기에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 듯하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음악을 시종일관 고음으로 처리했다는 점에서 더 큰 아쉬움을 불러일으켰다. 극적 구조는 비극적 정감이 미약한데 음악을 지나치게 극적으로 처리하려 하면서 부조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또한 쉴 틈을 주지 않는 긴장된 음악의 연속으로 관객들은 감동을 경험하기보다 답답함과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고 음악에 젖어들 수 없었다. 판소리 음악을 근간으로 하는 창극 음악은 계면조를 중심으로 한다 할지라도 장단을 통해 희로애락의 감정이 조화를 이루는 음악이다. 창극 <메디아>는 계면조가 아닌 고음과 웅장함을 가장한 합창으로 <메디아>의 음악적 특징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게 한다. 판소리 음악 특유의 서정적 영감을 주기보다 연속되는 고음으로 인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판소리 음악은 사설의 붙임새로 인해 서정성이 강해지는 장르다. 그러나 금번 창극 <메디아>에서는 관객들의 마음을 울리는 서정성이 발현되기보다 극적 긴장감만이 고조되는 음악으로 일관한 것으로 보인다. “죄를 짓는 것은 남자, 벌을 받는 것은 여자”라는 대목을 반복하고 구음으로 정서를 만들어내는 데 주력했는데, 이보다는 메디아의 노래, 이아고의 노래를 완결되게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창극은 판소리 음악을 근간으로 하는 오페라로 인식되지만, 판소리와도 오페라와도 다른 장르라 할 수 있다. 판소리가 음악으로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면, 창극은 노래와 무대장경으로 관객들의 지각을 자극한다. 판소리 음악 특유의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을 무대 장경이 시각적으로 북돋는 것이 창극 장르의 특징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창극 <메디아>의 음악에서 또 하나 지적할 수 있는 지점은 대본 사설의 문제이다. 또한 판소리 음악은 사설의 의미전달과 더불어 정서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판소리꾼들 특유의 시김새는 대사에 얹힌 음악의 극적 표현을 위한 것이기에, 구어체를 넘어서 시적 언어에 음악이 얹혀야 그 시김새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메디아>의 대본은 사설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해 배우들 본연의 소리가 살아나고 있지 못하며 판소리의 기본인 어단성장^語短聲長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삼면에 벽을 세우고 사선 무대에 천장까지 얹은 원근법적인 무대는 관객들의 조감을 높여주었고 무대 정면에 환상적으로 투영되는 황극양피 이미지는 아름다웠으며 특히 천장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두 개의 눈은 이아고와 메디아를 지켜보고 있는 제우스와 헤라 여신의 시선 같은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이국적인 세트들과 의상은 독특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적 장치들이 창극 <메디아> 음악의 상상력을 북돋워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장치 하나하나 배우들의 동선 하나하나가 음악과 조화를 이루기 전에 급하게 막을 올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메디아에게서 연민을 걷어내고 가부장적 권력 질서를 반복하려는 이아고에 정의와 사랑으로 맞서는 이미지를 추출해냈다면 훨씬 살아 있는 창극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국립창극단에서 작년과 올해에 걸쳐 <장화홍련>, <배비장전>, <서편제> 등 창작창극들을 제작하고 있지만, 판소리 음악을 통해 동시대 삶의 문제에 대해 공유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청소년 창극 <내 이름은 오동구>가 그 중 판소리 음악의 창극화를 실현한 작품으로 보인다. 이제는 <청>이나 <춘향 2010>처럼 창극을 공공예술로 인식하게 하는 정통 오대가를 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통과 실험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실험은 전통 안에 있고 전통 역시 실험 안에 있다. 기본이 갖춰진 실험을 하려면 전통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