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아홉 번째 인천여성영화제가 열렸다. 2005년에 처음으로 뜨거운 여름을 열며 시작한 인천여성영화제는 여성주의 가치를 인천에 퍼뜨려왔다. 첫 번째 인천여성영화제는 ‘여성주의’라는 단어도 낯설고 ‘성폭력’은 뒤에서 쉬쉬해야 할 것 같던 사람들에게, 공개되고 열린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열었다. 그 후 지속된 인천여성영화제는 ‘여성’ 하면 떠오르는 전통적 이슈인 ‘성폭력’, ‘성평등’, ‘성매매’ 등으로 고정되지 않고, 다양한 여성들의 시선이 담긴 영화를 인천에 풀어놓았다.

2013년 올해의 키워드는 “파문”이었다. 세상을 향한 새로운 물결, 아무 일 없는 듯한 잔잔한 수면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잔물결들이 일고, 그 잔물결이 조금씩, 조금씩 역동하여 땅을 자극한다. 인천여성영화제에서 만나는 영화를 통해 잔잔한 일상에 작은 파장을 만들고 그 파장으로 자신의 삶에 질문을 던지게 하고 또 그 질문들이 모여 세상을 자극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키워드였다.

올해의 변화라고 하면 매년 금요일에 열리던 개막식이 목요일로 당겨져 나흘 동안 영화제가 펼쳐진 것이었다. 금요일 저녁에 개막식을 열던 작년까지 금요일 오전부터 영화가 상영되었다. 그러다보니 개막식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관객을 맞이하고 영화제가 진행되는 중간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목요일 저녁의 개막식이 정말 첫 포문을 여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아직 관객이 들어서지 않은 영화공간 주안에는 팀장들과 자원활동가들이 낮부터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평일 저녁 6시 30분에 시작되는 개막식 직전까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 거의 시작할 시간이 다 되고 나니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와 어느새 영화관의 객석이 꽉 채워졌다. 

또 하나의 작은 변화는 자원활동가들의 개막선언으로 영화제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지역에서 짧은 시간에 진행하는 영화제에서 꼭 개막선언을 해야 하나? 뭐 다른 방법은 없나?’라는 고민에 누군가 “자원활동가들이 할 수도 있잖아요.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라는 답을 주었고 재미있는 기획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대학생 자원활동가들의 어색하지만 상큼한 개막선언과 기타오케스트라의 축하공연으로 9회 인천여성영화제 개막식을 진행했다.

그리고 개막작 <탐욕의 제국>(홍리경 감독, 한국, 110분, 다큐)으로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취업한 나의 직장은 진정 내 삶을 유지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영화제의 문이 열렸다. 개막식에 이어 상영된 2시간 가까운 영화를 보고난 후임에도 감독과 주인공과 함께한 GVGuest Visit까지 객석에 빈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특히 다큐의 주인공이 되었던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가 직업병에 걸린 여성노동자가 무대에 나왔고, 인천에서 반도체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객석에 함께 있었기에 더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홍리경 감독은 “직업병 문제로 싸우고 있는 삼성반도체 생산직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단지 삼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사회 전반에 걸친 부당하고 비상식적인 일에 대한 이야기, 모든 ‘노동’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개막식 다음날인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0여 편의 작품이 인천의 관객들과 만나며 일상을 자극하는 질문을 이어갔다.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작품이 없지만, 올해 눈에 띄었던 작품은 <가면놀이>(문정현 감독, 한국, 87분, 다큐), <고백>(유주윤, 윤하영 감독, 한국, 12분, 다큐), <잔인한 나의 홈>(아오리 감독, 한국, 77분, 다큐)으로 ‘성폭력’을 다룬 작품이었다. 사실 어찌 보면 ‘여성이슈’로 너무 반복되는 주제여서 지겨워질 법도 했다. 하지만 올해 하나의 맥락으로 보인 이 세 작품은 ‘성폭력’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남성 감독의 입장에서, 청소년 당사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솔직하고 용기 있게 그려낸 작품들이었다. 이 작품들을 통해 또 다시 “아동성폭력의 가해자는 과연 싸이코패스인가?”, “가장 안전하다고 믿어온 ‘가족’은 정말 안전한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축으로는 모성, 출산, 육아에 대한 고민을 새롭게 하게 하는 작품들이 있었다. <가족시네마>로 묶여 있는 (이수연 감독, 한국, 극)과 <인 굿 컴퍼니>(김성호 감독, 한국, 극), 그리고 <해피이벤트>(레키베잔송 감독, 프랑스, 109분, 극), <마이플레이스>(박문칠, 한국, 74분, 다큐) 등에서는 “모두가 축복이라고 이야기하는 출산은 과연 행복한 이벤트이기만 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렇게 9회 인천여성영화제는 인천의 관객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작은 파문을 만들며 일요일 저녁 <씰룩밴드>의 아코디언 합주와 함께 역시 자원활동가들의 목소리로 폐막을 선언했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으로 단번에 삶이 변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수많은 질문들로 인해 고정되어 있던 머리를 말랑말랑하게 하고 패러다임을 전환시켜 다른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지길 바랄 뿐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것에 물음표를 던지게 하는 것, 그런 물음표들이 인천에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갈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