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이 없다.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난 도심의 교차로. 횡단보도에 파란 불이 켜지자 도로가 인도로 바뀐다. 수십 명이 동시에 교차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빨간 불이 들어오자 인도는 다시 차도로 바뀐다. 30년 가까이 거의 매일 지나치는 교차로. 그런데도 아는 사람과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다. 이상하기도 하고, 전혀 이상하지 않기도 하다. 왜? 여기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도시, 특히 도심에서는 아는 사람과 조우하는 것이 특별한 사건이다.
낯선 사람들이 끊임없이 스쳐지나간다. 그런데도 별일이 없다(출퇴근 지하철 안이라면 문제가 달라지지만). 도시를 도시답게 하는 요소가 이와 같은 익명성이다. 그 다음이 안전성. 낯선 사람들이 서로 스치듯 지나가도 어떤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익명의 사회는 안전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성립되기 어렵다. 도시가 탄생한 가장 큰 이유가 안전이었다. 도시는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도시 내부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다. 중동이나 중국, 유럽의 고대도시를 호출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서울은 한양성이었고, 부산은 동래성, 평양은 평양성이었다. 도시의 기원, 도시의 역할은 도시 구성원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있었다.
성곽을 높게 쌓아 올려 외부의 적을 방어하던 시대가 끝나자, 도시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들이 도시 내부로 진입했다. 근대 이후 도시는 익명성을 강화하는 대신, 안전을 포기해야 했다. “본래 도시 건설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늘날 도시는 위험을 막아주던 피난처에서 위험의 주요 근원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지적처럼, 도시가 도시의 적이 되고 말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방인, 여행자, 노숙자, 범죄자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도시 곳곳에 새로운 성곽이 생겨났다.

도시 안에 그어지는 경계는 도처에서 목격된다. 구도심과 신도시, 상업지역과 주거지역, 대형 할인마트와 재래시장, 편의점과 구멍가게, 고층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 아파트와 다가구주택, 원룸과 고시원… 이들 경계는 전선戰線이다. 전선에서 ‘신분증’이 생기고, 반목과 갈등이 빚어진다. 도시는 여러 개의 ‘게토’로 쪼개지면서 단절된다. 도시의 게토화는 지표면에서만 진행되지 않는다. 주거 공간은 수직적으로도 위계화된다. 반지하와 옥탑방은 ‘차상위’ 주거 공간이다. 반지하와 옥탑방에서 풀 옵션 원룸으로 진입하지 못하면, 고시원을 거쳐 지하도로 밀려난다. 지하도의 노숙자는 사회적 삶의 끝, ‘제외된 인간’이다. 이와 같은 도시의 게토화는 도시인의 의식구조 안에 그대로 각인된다.  

전원으로 돌아가 생을 마무리한다?
신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 도시는 인류 최대, 최고의 창조물이다. 도시학자 조엘 코트킨Joel Kotkin은 “도시는 가장 심원하고 지속적인 방법들을 동원해서 자연 환경을 새롭게 바꿀 줄 아는 인류의 능력을 입증하는 증거물이다. 또 인류가 하나의 종種으로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만들어낸 최고의 세공품”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도시는 영원하지 않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그렇듯이(핵무기는 제외해야 한다) 도시 또한 생로병사를 거듭하는 유기체다. 수백 년 간 번성하기도 하지만, 수십 년 만에 몰락하기도 하고, 이제 막 태어나기도 한다.
코트킨에 따르면,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하는 도시에는 세 가지 요건, 또는 기능이 있다. 성스러운 공간의 창출, 기본적인 치안의 제공, 활성화된 시장. 먼저, 성스러운 공간은 종교나 정치와 오래된 장소를 말한다. 서울로 치면 사찰이나 성당, 왕궁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기본적 치안은 앞에서 말한 안전성이다. 정주민은 물론 이방인, 여행자, 사회적 약자가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세 번째 활기찬 시장은 말할 나위도 없다. 도시에 사는 이유, 도시로 몰려가는 가장 큰 이유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다. 자본이나 노동력을 투입하고 그 대가로 예측 가능한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도시가 위의 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는지 검토하면서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도시를 성찰하는 이유는 보다 근원적이고 광범위하다. 이제 도시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대다수 인류가 도시에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을 틀어쥔 ‘1%’가 아니라면, 상류층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도시에서 삶을 마감하는 수밖에 없다. 비유나 과장이 아니다. 2008년 말 세계의 도시 인구가 세계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다. 35억 이상이 도시에 산다. 비도시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부의 양극화, 전쟁 혹은 내전, 자연 재해 등을 이유로 (국경을 넘어) 도시로, 도시로 밀려들고 있다. 세계 전체 인구가 증가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도시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우리 사정은 더 심각하다. 지난 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인구의 8할 이상이 비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러던 것이 지난 세기 중후반 급변해, 현재 전체 인구의 8할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다. 게다가 수도권에 2천만 명 이상이 집중돼 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산업화, 도시화가 절정으로 치닫는 가운데, 그 결과의 하나로 미증유의 초고령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초고령사회는 노동력 부족을 야기하고, 결국 외국인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다문화사회로 전환된다. 다문화사회 또한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사회다. 여기에 식량 부족과 화석 연료 고갈, 기후변화와 같은 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도시가 이처럼 복합적이고 전면적인 ‘위험사회’와 직면하고 있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에게 ‘노후 낙향’은 집단무의식에 저장된 로망이었다. 아들딸 다 키우고 나면, 은퇴해서 인생의 가을을 전원에서 마무리한다. 하지만 물려받은 땅이나 모아놓은 재산이 있다면 몰라도, 귀농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도시적 삶에 길든 노년에게 농사일은 감당하기 힘든 중노동이다. 이웃을 사귀기도 쉽지 않다. 교육, 문화, 의료 서비스에 대한 기대도 접어야 한다. 현재 수준의 농촌은 도시 생활의 대안이 못 된다. 도시가 과도하게 성장하는 사이, 농촌은 빠르게 늙어갔다. 농촌은 이미, 아직 낙원이 아니다.

도시 재생의 키워드, 장소성
그렇다면 도시를 재발견해야 한다. 그동안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은 농촌과 어촌, 산촌 등 비도시 지역과 비교 대조하는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도시는 악이고 비도시는 선이었다. 도시가 현재라면 비도시가 미래였다. 도시가 인공이라면 비도시는 자연이었다. 물론 현재 상태의 도시는 개인주의만 극대화될 뿐 안전하지 않다. 국가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지만 도시 곳곳에서 ‘전투’가 끊이지 않는다. 공감과 연대의 공동체는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시장은 거대기업을 위한 정글이 되고 말았다. 일부 번성한 시장의 이윤은 극소수에게만 돌아간다. 신성한 공간은 여행자를 위한 관광명소일 따름이다. 신성한 공간, 활성화된 시장, 안전한 도시를 되살리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리고 또 저 세 요소가 전부일까. 도시 연구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온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의 혜안을 빌려보자.

도시를 하나의 생태계라고 인식하는 제이콥스에 따르면, 도시 생태계는 많은 다양성을 필요로 한다. 도시는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의존하면서 끈질기게 되살아나는데, 다양성의 틈새가 많을수록 도시의 수용력 또한 커진다는 것이다. 제이콥스는 “도시는 도시 건설과 설계에서 실패와 성공의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거대한 실험실”이라고 말한다. 도시 문제는 결국 인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도시 계획을 주도하는 이들은 일반 시민이 아니다. 정치인, 관료, 학자, 전문가들이다. 실제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도시 정책에 의해 직접 영향을 받는 시민의 입장은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대다수 시민이 도시의 미래에 관여할 수가 없다. 우리가 도시를 꼼꼼히 관찰하고 거기에서 시민의 꿈과 이야기를 포착하지 못한다면, 도시의 미래는 없다. 우리가 도시의 미래에 개입하고 간섭해야 한다. 도시의 미래가 곧 우리의 구체적, 실존적 미래이기 때문이다.
농촌을 외면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농촌으로 대표되는 비도시, 농업으로 대표되는 1차 산업은 반드시 되살려야 한다. 귀농, 귀촌 캠페인도 적극 전개해야 한다. 하지만 농촌이 자생력을 갖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농업이 우리의 미래라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도 쉽지 않은 과제다. 그러는 사이 도시는 ‘악의 소굴’로 전락하고, 도시인의 삶은 존엄으로부터 더욱 멀어진다. 농업을 포함한 산업 시스템을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동시에 도시를 재정의해야 한다. 도시의 재탄생, 다시 말해 우리의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지금, 여기를 입체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도시 이야기의 첫 테마는 아마 골목이 될 것이다. 도시 계획에 의해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은 ‘구성요소’가 바로 골목이다. 익명성과 안전성이 어우러지고, 개인과 공동체가 교차하는 통로가 골목이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연결하면서 마을을 살아 숨 쉬게 하던 골목은 거의 사라졌다. 직선을 광적으로 선호하는 도시 계획에 의해 소멸된 골목은 지금 고층아파트와 빌딩으로 올라가 엘리베이터와 복도로 탈바꿈해 있다. 골목에 대한 관찰은 장소성placeness에 대한 강조로 이어질 것이다. 장소성, 장소에 대한 감수성의 회복이 도시 재생의 관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