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미술 활동으로서의 대안공간
2010년 하반기와 2011년 초 뉴욕에서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 초에 등장하기 시작한 미술가 중심의 1세대 대안공간들과 관련된 두 개의 의미 있는 전시가 열렸다. 2010년 9월 엑시트 아트Exit Art에서 개막된 <대안적인 역사들 : 뉴욕의 미술 공간 1960년부터 2010년까지Alternative Histories : New York Art Spaces 1960 To 2010>는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뉴욕의 대안공간 역사를 그려보고 기록하며 분석하는, 현재 진행형의 과정에 기여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약 140여개의 대안공간들과 대안적인 조직, 출판물, 미술가 그룹과 미술 프로젝트 등을 개괄하는 아카이브 자료들을 선별하여 전시하였다. 한편, 2011년 1월에 데이비드 츠워너 갤러리David Zwirner Gallery에서 열린 <112 그린 스트리트 : 초기 시기 1970-1974112 Greene Street : The Early Years 1970-1974>에서는 초기 대안공간 중 뉴욕 미술계에 영향력 있는 작가들을 배출해오면서 미술의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온 112 그린 스트리트(현재의 와이트 칼럼즈White Columns)의 초기 5년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이 대안공간이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는 현대미술의 에너지의 중심이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전자가 일종의 “살아있는 아카이브”로서의 전시를 통하여 20세기 후반부터 지속되고 있는 대안공간의 역사를 조망하고자 한다면, 후자는 “회고전” 형식을 통하여 한 대안공간의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를 추억하고자 한다. 두 전시 모두 대안공간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조건들이 현대미술의 지형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이었으며 여전히 현재의 미술에 활력을 주고 있다는 현재 미술계의 인식과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현대미술사에서 대안공간의 유행이라는 현상은 모더니즘 미술의 흐름과 뚜렷한 단절을 이루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기존 체계의 밖에서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고자 하는 아방가르드적 현대미술이 견지하려는 윤리 같은 것을 예시한다. 왜냐하면 미국 국립예술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이 미술가 워크숍과 대안공간이라는 항목으로 연방정부 차원의 지원을 시작하기 전에 설립된 초기 대안공간들은 작가들에게 기존의 틀을 위반할 수 있는 자유로운 기술적 토대technical support, 일종의 새로운 매체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작가, 작품, 관람자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상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초기 대안공간은 확장된 미술 개념을 지속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실험실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작가, 관람객, 전시기획자가 새로운 담론의 틀 속에서 미술과 문화, 삶의 경계를 모호하게 할 수 있는 점이지대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 현대미술에서 강조되기 시작한 수행성performativity과 장소특정성site-specificity이 미술 매체의 확장된 개념과 결합되면서, 대안공간의 열린 특성은 이러한 미술 활동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요구되었다. 오브제로서의 미술작품 제작을 넘어서는 수행적인 작업으로서의 미술 작품은 그 자체로서 미술제도와 관습에 대한 행위나 발언에 상응하는 효과를 지닌다. 따라서 새로운 매체와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고 전시하는 공간으로서 대안공간은 미술의 틀을 확장하는 실천의 장이 된다. 장소특정성을 다루는 미술 작업들은 전시장의 물리적인 환경에 통합되거나, 개입하는 방식으로 행해지거나, 더 나아가 도시공간을 전시의 맥락으로 끌어들이며 대안공간을 중심으로 미술가들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값싼 임대료와 넓은 작업공간을 찾아 맨해튼의 버려진 공업지역인 소호에 불법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작가들이 1970년대 초반에 오픈한 대안공간들 (예컨대, 112 그린 스트리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전시의 맥락은 전시공간 밖으로 확장될 뿐만 아니라, 도시의 구조 및 인근 지역공동체까지 미술의 한 부분으로 편입이 된다.      
기존의 미술관-갤러리 체계가 아직 마케팅 측면에서 검증되지 않는 미술 형식을 수용하는 데 소극적이고 여전히 미술의 담론을 형성하는 주체로서 지배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공간은 기존의 체제로부터 떨어져서 미술가들이 자신의 발언을 할 수 있는 자율적인 장이며, 미술을 하는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장기적인 퍼포먼스 프로젝트인 것이다. 따라서 대안공간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기존의 미술계와는 차별되는, 보다 수평적인 주체들 간의 관계 형성과 해방된 담론 생산 구조를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오늘날 경력주의가 횡행하는 미술계에서 열린 전시공간에서의 자유로운 작업을 지향하는 미술가들, 보다 실험적인 작업들을 후원하고자 하는 미술기획자들, 공공영역에 개입하는 예술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소통의 장을 만들려는 문화예술 단체들에게도 풀어야 할 과제로 주어져있다.         
다시 말해 대안공간을 기존의 미술관-갤러리 체계와 구별지어주는 중요한 요인은 기존의 상황에 어떤 단절을 만들어내는 주체의 기능과 그런 주체의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열린 담론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미술가를 어떠한 주체로 바라볼 것이며, 대안공간에서 주체 상호 간에 어떠한 관계를 구축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여기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대안공간의 증식 속에 미술의 새로운 지형이 만들어지던 1970년대의 뉴욕 소호의 미술 현장과 그 이후 현대미술의 방향을 살펴봄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이다.     

II. 확장된 미술 매체로서의 대안공간
1960년대 말 대안공간의 등장은 정체되고 제한적이며 제도화된 미술계로부터 해방된, 그들만의 영역을 만들고자 하는 미술가들의 욕망을 드러내준다. 실제로 다양한 대안공간들이 주류 전시공간에서의 제한적인 전시 기회, 대항문화적인 충동, 새로운 매체의 등장 등의 이유로 생겨났으나, 일차적으로는 미술 형식과 매체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고 제시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술가들은 대안공간이 기존 미술관-갤러리 제도가 제공하는 부족한 전시 기회를 보충해주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기존의 미술의 틀을 넘을 수 기회와 조건을 제공해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들은 미술계 바깥에 위치한 그들만의 영토로서 대안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 대부분의 대안공간은 느슨한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공간 운영이나 전시 기획 과정이 행정적인 절차에 의해 거의 구속받지 않는 구조였기 때문에, 전시에 참여하고자 하는 작가들이 현장에서의 작업과정과 전시과정을 지배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모더니즘의 매체특정성에 대한 개념을 뒤집고 더욱 확장된 매체 개념을 제안할 수 있는 대안공간은 그 자체로 기술적인 토대가 되거나 새로운 매체를 실험할 수 있는 조건들을 작가들에게 제공해왔다.          

첫째, 대안공간은 작가의 확장된 스튜디오로서 새로운 미술 형식과 매체를 실험할 수 있도록 기술적, 이론적으로 미술작가들을 지원하였다. 예컨대, 1971년 설립된 키친The Kitchen은 1960년대 초 공영방송국의 미디어 연구소에서 이루어졌던 미술작가들의 비디오 기술에 대한 실험을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서, 비디오 미술이 모더니즘적인 매체특정성에 기댄 이미지-프로세싱 비디오 형식을 거쳐 비디오의 구조를 탐구하고 문화 영역에서의 영향력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개념적인 작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기술센터 및 포럼, 전시공간으로 기능하였다.

둘째, 대안공간 자체가 작품의 현장이 되고 동시에 작품의 매체가 되기도 한다. 전시공간의 물리적인 특성을 활용하거나 전시공간을 물리적으로 변형시키는 장소특정적인 작업들은 전시공간을 일종의 조각적 혹은 건축적 토대로 취급하면서 작업의 매체로 활용한 것인데, 이것은 낡고 거친 물질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초기 대안공간들의 물리적 공간 특징이 촉진시킨 작업방식이다. 소호의 버려진 공장 혹은 창고 건물들을 차지한 초기 대안공간들은 강력하고 거친 공간의 특성으로 인해 포스트미니멀리즘적 견지에서 물질과 공간의 관계를 실험하는 작가들에게 매력적인 작업의 토대가 되었다. 1976년 P.S.1에서 열린 전시 <방들Rooms>에서 이러한 경향은 정점을 이루었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곧 대안공간 특유의 스타일로 굳어져 21세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셋째, 대안공간은 더 나아가 공간의 사회적인 의미 및 상호작용을 실험하는 가상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허브가 되기도 한다. 미술작가들은 대안공간 안으로 삶과 사회의 일부분을 옮겨옴으로써 미술의 영역을 확장한다. 비토 아콘치Vito Acconci가 1970년 1월에 대안공간 게인 그라운드Gain Ground와 자신의 아파트를 오가면서 실행한 <방 작업Room Piece>은 미술가의 개인의 삶이 어떻게 미술 작품이 되며, 그의 사적인 공간이 공적인 공간으로 어떻게 전환되는지를 보여준다. 아콘치는 전시 기간 중 주말마다 자신의 아파트의 한 방에 있던 가구들과 물건들을 전시장에 옮겨 포장상자를 풀지도 않은 채 보관한다. 그리고 전시장에 둔 물건이 필요할 때마다 가져와서 쓰고는 다시 전시장에 돌려놓는다.
이 작업은 특정한 두 공간, 작가의 아파트와 전시장 사이의 상호 관계와 각각의 정체성에 대한 장소특정적인 작품이 될 뿐만 아니라, 물건을 옮기는 행위를 통하여 개인의 사적인 공간을 공적인 공간으로 확장하며 미술과 삶의 영역을 혼합하고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미술의 매체를 상황 속으로 용해시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안공간은 미술 프로젝트를 매개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고든 마타-클락Gordon Matta-Clark은 1972년 전시장 바깥 도로변에 설치한 <오픈하우스Open House>를 통하여 전시의 맥락을 도시 공간으로 확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길거리의 쓰레기 컨테이너를 이용한 설치작품과 홈파티 형식의 퍼포먼스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건축 개념과 공동체 형성의 가능성을 실험하였다. 더 나아가 1971년 가을 문을 연 푸드 식당Food restaurant의 운영을 통하여 퍼포먼스와 식문화를 결합함으로써 미술 활동의 범위를 일상생활의 수준으로 확장하였다. 여기서 대안공간은 실험적인 작품의 제작과 전시 장소, 미술 매체로서 기능하는 장소, 사회적 관계망의 일부분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전시장 방문자뿐만 아니라 지역주민으로까지 미술 영역의 구성원으로 포함하게 된다.  

대안공간이 제시하는 확장된 미술 매체의 개념, 미술 구성요소의 범위는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제시한 포스트미디엄 조건post-medium condition을 미술 외적인 차원으로 더 연장시킨 것과 같다. 크라우스에 의하면, 포스트미디엄 조건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은 매체 특정성에 근거한 모더니즘 미술의 매체 순수성 개념을 전복하고, 다른 매체에 대한 참조와 이전 매체에 대한 회귀를 통해 새로운 매체를 고안하여 확장된 매체의 개념을 작품에 가져온다. 즉 포스트미디엄 조건에서는 특정한 기술적 토대와 일련의 관습들보다는 “기구나 장치에 대한 복합적인 관념”이 매체의 기반이 된다. 결국 확장된 매체에 대한 개념은 매체의 집합적 조건으로부터 연유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경험의 상황과 그 이상의 것이 매체 개념에 포함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다. 그러나 크라우스는 확장된 장으로서의 매체를 이원적인 반대항들이 만드는 중립축과 복합축으로 설명하면서, 매체의 반대항에 설치installation를 내놓는다. 그리고 매체는 기억과 망각의 복합체이며 설치는 기억도 망각도 아닌 것으로 설명한다. 이 설명은 매체의 비특정성에 집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특정성을 지닌 매체의 해산을 불편해하는 것이 엿보인다. 크라우스가 망설이는 한 걸음을 내딛어보면, 우리는 설치작품이 놓이는 장소, 즉 전시공간을 매체 개념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이렇게 확장된 포스트미디엄 조건에서 대안공간은 그것이 수용하는 일시적인 설치작품이나 프로젝트들의 매체가 되며, 작품이 개입하는 영역이 미술적 관습으로 전환된다. 이것은 삶과 미술이 대안공간 안에서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Ⅲ. 미술과 삶의 대안공간 : 미술의 주체와 담론 구조
1980년대 이후 1990년대를 거치면서 개념미술, 설치, 관계미학 등이 미술 활동의 주된 영역을 차지하게 되면서 미술의 경계는 삶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는 한편, 이 과정에서 1970년대를 거치면서 제도화된 대안공간을 넘어 실제 지역공동체나 사회적 이슈의 현장이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위한 장소가 되었다.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제도화된 대안공간에 비판적이었던 미술가 그룹들은 특정 전시공간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프로젝트가 설득력 있게 제시될 수 있는 공간을 선택하였다. 이는 제도화된 대안공간의 운영은 더 이상 새로운 미술활동의 일환이 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특히 초기 대안공간에서 발전한 미술형식들이 하나의 스타일로 정착하여 주류 현대 미술관의 중요한 전시 및 소장 대상이 된 오늘날, 대안적인 미술의 공간은 사회적인 이슈와 결합된 프로젝트 등을 통하여 또다시 바깥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이유로 근래에는 미술가들의 대안공간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주체들이 프로젝트의 참여자로 미술가들과 연대하여 이슈의 현장 자체를 새로운 미술의 대안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삶 자체가 미술에서의 형식 혹은 매체라고 불리는 것들을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  

 “미술의 형식으로서의 삶”이라는 개념은 미술사와 함께 지속되어 오던 것인데, 결벽적인 모더니즘 미술의 쇠퇴와 함께 비판적 포스트모더니즘의 행동주의적 분파로서 세기말과 21세기에 미술을 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등장하였다. 2011년 가을, 뉴욕 맨해튼의 로어 이스트 사이드Lower East Side 지역의 에섹스가 시장Essex Street Market에서 개최된 전시 <형식으로서의 삶 : 사회적 관여 미술 1991-2011Living as Form: Socially Engaged Art From 1991-2011>은 이러한 경향의 미술 프로젝트들을 정리하고 사회관여 미술을 엄연한 하나의 미술 형식으로서 규정하였다. 전시 큐레이터 나토 톰슨Nato Thompson은 여기서 “형식”의 의미를 전통적인 미술 분석의 관점인 미학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보다는 사회적인 것들에 대한 접근 방법으로서 강한 효과를 위해 지정된 형식들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삶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사회적인 쟁점들, 즉 지속가능성, 환경, 교육, 주택, 노동, 성, 인종, 식민주의, 주택고급화, 이민, 감금, 전쟁, 국경 등의 문제들에 접근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미술의 형식이 되었다. 이렇듯 1960년대 후반 수행성과 장소특정성이 전환점이 되어 현대미술의 궤적이 형성된 이래로 21세기의 대안적인 미술은 사건과 사회적인 이슈에 의해 촉발된 장소특정적인 프로그램들로 특징지어진다. 

이렇게 특정한 사건이나 이슈에 의해 시작된 프로젝트들은 특정한 주체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주체들 간의 관계는 특수한 담론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사건에 의해 형성되는 주체 개념이 이들 사회관여 프로젝트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주체의 모습을 잘 설명해준다. 바디우는 사건event을 현존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정의하면서, 자연의 반대항으로서 역사적인 것을 의미하며, 주어진 상황situation에서 그 요소가 제시되지 않는 사건적 현장evental site에 속한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사건은 주어진 상황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해석적인 개입에 의해 천명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때 사건의 발생과 인식의 과정에서 사건으로서 선택하고 이름붙이는 또 다른 선택의 과정을 사건에 대한 충실fidelity의 기능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 개념과 관련하여 새로운 주체 개념을 제시하는데, 그는 주체를 사건에 좌우되며, 진실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서 구성된다고 보았다. 바디우의 주체는 상황에 대한 개입과 사건에 대한 충실의 과정 사이의 관계 자체이므로, 사건을 만날 때마다 새롭게 구축되는 주체인 것이다. 이 주체 개념에 의하면, 사회적 쟁점에 관여하는 미술 프로젝트들은 상황에 대한 해석적인 개입을 함으로써 숨어있던 사건의 계기를 만들고 참여 작가와 관람자 모두 새로운 주체로 설 수 있도록 한다.

사건에 기댄 주체들이 만들어내는 관계들은 어떠한 것일까? 다시 말해 사회관여 미술의 작가들이 추구하는 주체들 간의 관계는 어떤 모습일까? 이것은 자크 라캉Jacque Lacan의 담론discourse 개념을 통해 이론적으로 서술해볼 수 있다. 라캉에게 담론은 발언이 없는 담론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담화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언어가 없이는 사실상 유지될 수 없는 어떤 근본적인 관계들에 내재하는 것이다. 미술작품을 생산하고 전시하는 일을 사회적인 유대의 구조 내에서 행해지는 활동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관계를 라캉의 담론 개념에 기반해서 조망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하나의 담론은 하나의 사회적 관계의 구조를 드러내며, 그것을 구성하는 행위자, 타자, 생산, 진실 등 네 개의 위치에, 네 개의 요소들, 즉 주인기표, 지식기표(의미화의 사슬), 분절된 주체, 욕망의 대상(잉여 주이상스Jouissance)이 어떻게 위치하고 상호작용하느냐에 따라 주인담론, 대학담론, 히스테리담론, 분석가담론 등 네 가지의 담론 구조를 형성한다. 이 네 가지 담론 중 히스테리담론과 분석가담론이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깨뜨리고자 하는 미술가의 활동과 대안공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회관여 미술의 담론 구조를 설명해주는 유용한 틀이 된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eric Jameson에 의하면, 히스테리담론과 분석가담론은 모두 욕망 자체에 대해 완전히 몰두하고 있는 구조로서 미술작가가 속해 있는 담론을 설명해준다. 히스테리 환자는 주어진 주인기표에 대해 의문을 던지면서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한편, 분석가는 폭력적인 주인의 위치가 아닌, 타자의 욕망을 경청하는 자로서 욕망 자체가 발화되기를 기다린다. 제임슨은 특히 분석가의 위치를 능동적이고 이론적인 수동성과 관련되며 집단적인 욕망을 확인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 결과 분석가담론은 “유토피아적인 욕망 자체의 구조”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미술의 맥락에서 보면, 대안공간에서 새로운 미술 형식과 매체를 실험하는 미술가는 미술 제도가 제공하는 상징적 구조, 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이때 대안공간의 기능은 분석가의 위치에서 미술가가 대타자의 욕망, 즉 기존 미술제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주인기표, 즉 새로운 미술 언어를 창조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회관여 미술은 미술가가 분석가의 입장에서 프로젝트 참여자 및 해당 이슈의 당사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을 대타자의 욕망(사회적 구조나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등에 의해 기만적으로 강조된 욕망)으로부터 구분 짓고 지신의 욕망을 말할 수 있는 새로운 기표를 생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관여 미술은 주어진 상황에서 사건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한다.  

Ⅴ. 대안공간의 제도화, 그리고…
대안공간의 제도화는 바로 이러한 해방적인 기회를 제공하는 담론구조, 즉 사회적 관계망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야기한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미술가들은 자신들만의 대안공간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것을 통하여 미술활동을 위한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었으나, 1970년대 후반 대안공간이 제도화되면서 작가들은 자신의 작업이 포괄하는 사회적인 관계를 확장함으로써 미술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실제로 느슨한 초기 대안공간은 주류 미술계로부터 분리되어 일종의 공동체로서 지역 미술가들의 예술적인 자유를 확보하였다. 이때 대안공간은 제임슨이 말하는 유토피아처럼 일종의 울타리 쳐진 “다른 곳으로서의 여기”로 일컬어지는 해방된 폐쇄 공간으로서 주류 미술계와 사회정치적인 논쟁과도 거리를 두며 “정치적인 것이 유예된 순간”을 제공하여 “모든 종류의 제도적인 변형과 재결합”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 대안공간의 제도화는 이러한 유토피아적인 분리가 보증하는 끊임없는 상상력과 실험이 정치적인 고려에 영향을 받도록 한다. 그 결과 비판적인 미술가들은 제도화된 대안공간에서 벗어나 미술과 사회의 접점에서 실행하는 프로젝트들에 집중하게 되었다.

미술 활동의 영역은 삶의 각 영역만큼이나 폭넓고 다양해짐으로써 기존의 대안공간을 비롯한 문화예술기관들, 사회단체들, 심지어 주류의 현대 미술관까지 그것들을 수용할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들이 제공하는 공간은 미술가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면서 무엇보다도 관람자들, 지역주민들, 혹은 해당 쟁점의 당사자의 것이기도 하다. 이제 관건은 해방적인 담론구조를 이들 기관들이 어떻게 보증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미술의 경계는 과연 어디인지도 모호해진다. 결국 지속적인 확장 끝에 미술은 삶과 결합하게 될 것인가?
또 하나 남은 문제는 자유롭게 새로운 형식과 매체를 실험하고 탐구할 수 있는 대안공간은 이제 어디일까라는 점이다. 이 질문은 오늘날 미술가들이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매체와 미술 형식은 무엇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바꿔볼 수 있다. 미술이 미술로 남고, 미술작가가 미술작가로 남고자 한다면 답을 찾아야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고민은 미술의 영역이 확장되는 한 지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