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대표적 연출가 동인집단 ‘혜화동 1번지’의 2013 봄페스티벌(5월 30일~8월 4일)의 소재는 ‘국가보안법’이었다.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창작자의 자기검열’이 어떻게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훼손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담긴 작품들을 공연했다. 국가보안법 자체를 토론의 주제로 내세운 극단 해인의 <모의법정>(이양구 작/연출), 국가보안법이 예술가의 내면에 미치는 영향을 창작과정을 통해 보여준 극단 거미의 <무림파혈전>(홍석진 작/김제민 연출)과 극단 미인의 <괴물이 산다>(김수희 작/연출), 실제 인물을 통해 국가보안법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극단 그린피그의 <빨갱이, 갱생을 위한 연구>(공동창작/윤한솔 연출), 찰리 채플린과 우리의 만담가 신불출이 표현의 자유를 찾아 헤매는 여정을 그린 프로젝트 그룹 빠-다밥의 <레드 채플린>(오세혁 작/김한내 연출)이 연이어 공연되었다.
구체적인 소재와 자기검열이라는 화두가 이미 정해졌기 때문인지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해가는 연출가들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설정이 두드러졌다. 특히 <무림파혈전>, <괴물이 산다>는 작품 속 인물들이 예술가의 창작과정에 개입하는 극중극 형식이었고, <레드 채플린>도 채플린의 영화를 통해 예술가의 삶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세 작품은 예술가와 작품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탐색하고 있다. <모의법정>, <빨갱이, 갱생을 위한 연구>는 국가보안법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지만 <모의법정>의 경우, 토론이 부재해 기대에 못 미친 작품이었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형식실험의 독창성과 주제의식의 시의성이 두드러진 <빨갱이, 갱생을 위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국가보안법의 허구성을 풍자한 다큐멘터리 연극
사회비판적이고, 해체적 작업을 통한 전복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극단 그린피그는 다양한 자료의 리서치를 통한 다큐멘터리연극을 주도하고 있다. 무대 밖의 현실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무대 위에 펼쳐놓는 일련의 시도들을 아우르는 포괄적 의미의 다큐멘터리연극은 포스트드라마의 특징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절대적인 전범처럼 여겨왔던 무대 위의 환상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현실을 그대로 펼쳐놓는다. 실제 자료들을 몽타주하여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허구가 아닌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서사적 장치들로 인한 이화효과를 통해 관객의 주체성을 회복시켜 현실인식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의도한다. <빨갱이, 갱생을 위한 연구> 역시 이러한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다.

매표할 때 어떠한 음료수라도 반입이 가능하다는 솔깃한 제안을 들었다. 극장에서 하지 못했던 행위의 욕망으로 극장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캔 맥주 하나를 사들고 극장에 들어섰다. 관극의 관습을 깨겠다는 윤한솔 연출의 의도가 반영되었겠지만 술을 사 들고 온 관객이 없어서 혼자만의 음주는 외로웠다. 차라리 음료를 직접 판매하고, 이러한 행위가 극적인 상황과 연계되었다면 금기에 대한 도발이 훨씬 흥미로웠겠다.
극장에 들어서자 벽을 배경으로 약간의 강제성을 띈 사진촬영을 하고, 공연 후 개별적으로 사진을 찾아가게 했다. 공연에 참가했다는 확인이라면 모를까,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환기시키려는 극적 의도가 담겨있었다면 잘 수행되지 못했다. 행위의 의미를 곱씹을 시간적 여유도, 사진과 정체성의 관계를 유추할 극적인 상황도 연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양이 통일되지 않은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면 빨간 트레이닝복 상의를 입은 배우들과 공연오퍼레이터가 이미 객석 이곳저곳에 흩어져 앉아 있다. 무대장치는 커다란 스크린이 유일하며, 검은 벽에는 분필로 ‘박정근’의 재판에 관한 다양한 정보들이 적혀 있다. <빨갱이, 갱생을 위한 연구>는 2012년 북한의 대남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의 글을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검찰에 기소돼 국가보안법에 의해 징역 2년을 구형받은 ‘박정근’이라는 실제인물에서 출발한다.

 ‘1. 빨갱이들은 갱생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으로 변화할 수 있다. 2. 빨갱이가 아닌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 빨갱이가 될 수 있다.’는 두 가지 가설에 따른 두 개의 사건이 교차되면서 진행된다. 하나는 항소심을 눈앞에 둔 박정근이 재판장을 설득하기 위해 연기 지도를 받는 과정을 촬영한 옥인 콜렉티브의 <서울 데카당스Seoul Decadence>(토탈미술관, 2013)를 상영하고, 이를 그대로 따라하는 배우들의 ‘리트윗 연기’를 통해 모두가 박정근이 되는 체험의 과정을 보여준다. 또 하나는 갱생핸드북에 따라 배우들이 일정 기간 동안 갱생의 행위(미소 짓기, 낯선 이들에게 말 걸기, 걸인과 노숙자에게 김밥과 담배 건네기)를 실천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다.
배우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진지하게 발표하는 장면은 결과의 숫자만 달라졌을 뿐 대사의 내용과 톤, 행위의 양상이 거의 유사하게 연출된다. 결국 이 작품은 박정근의 실제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무 생각 없이 한 SNS 놀이를 이적행위로 몰 수 있는 국가보안법의 자의적 폭력성을 전경화한다. 그리고 ‘박정근 따라 하기’가 리트윗을 통해 다중의 놀이로 확산되는 순간 우리 모두 빨갱이가 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또 갱생의 행위를 이데올로기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 설정하고, 갱생의 자발성을 배제함으로써 국가보안법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풍자한다.
이러한 주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유희가 중간 중간에 배치된다. ‘박정근 리트윗 연기’로 빨갱이가 된 배우들이 갱생의 과정을 설명하는 진지한 상황에 갑작스레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경직된 분위기와 틈입한 현실의 간극에서 빚어진 아이러니가 고백의 진정성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리고 배우들은 감정을 배제한 채 모노톤으로 80년대 대중가요 <서기 이천 년>을 반복해서 노래한다. 희망과 열정으로 유토피아를 꿈꾸는 노래가 가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배우들의  표정과 군무로 인해 그로테스크하게 변한다. 꿈과 현실의 간극을 강조하면서 80년대의 그림자가 현재에도 여전한 역사의 부조리까지 드러낸다.
이 작품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누구도 쉽게 ‘빨갱이’가 될 수 있으며, 예술가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까지도 자기검열과 자기고문을 할 수밖에 없는 부당한 현실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이를 위해 국가보안법으로 ‘성욕이 감퇴된’ 실제인물의 자기검열 과정을 그린 영상 <서울 데카당스>를 주요 텍스트로 활용하고, 갱생핸드북이란 풍자적 실험을 배치한 것이다. 역시 윤한솔의 도발적 상상력은 여전했다.

윤한솔 스타일의 총체적 집약, 그리고 남은 문제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윤한솔 연출의 연극적 정체성은 현실적 주제의식과 도발적 상상력으로 의도와 실현의 간극을 실험하는 것인 듯하다. 이번 공연도 주제의식의 시의성, 다큐멘터리와 SNS를 바탕으로 한 참신한 형식실험은 돋보였지만 공연 속에 배치된 다양한 의도와 의미들은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스스로 연출의도가 없다고 팜플렛에서 강조했지만, 정치성을 전경화시킨 이 작품에서 연출의도를 해석해내려는 것은 관객의 자연스런 반응이다.
명확할 것 같았던 작품이 오히려 공연이 끝나면 혼란스러워진다. 사진촬영부터 배우 박하늘의 퍼포먼스까지 많은 의미의 층위를 극 속에 담아놓았지만 이것이 두 개의 중심사건과 긴밀하게 결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조와 집중의 효과를 내기 위한 마이크의 활용이 단순반복으로 인해 장식적인 연출에 머물렀고, 박정근을 따라하던 다중의 목소리가 어느새 그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인물에게로 옮겨가는 중요한 변화의 과정이 정치하게 표현되지 않아 의미가 약화되었다. 그리고 끝까지 박정근을 리트윗하던 배우 박하늘이 사회의 억압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홀로 남지만, 박정근의 이야기를 되돌려 ‘리트윗연기’를 다시 시작하는 상징적인 퍼포먼스도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다. 이 장면이 바로 주제를 드러내는 핵심

이었지만 퍼포먼스 이전의 서두가 너무 길었고, 대사까지 모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트윗 연기’의 텍스트인 <서울 데카당스>가 허술한 작품이어서 극적 긴장감이 거의 없었다. 일반인의 자기검열의 과정을 부각시키려는 작품이었지만 항소심을 위한 연기지도의 필요성조차 설득력 있게 담아내지 못했다. 이 작품이 두 시간 넘는 공연시간의 반 이상을 차지하면서 관객의 집중력을 방해했다. 또 유사한 형식과 구성의 반복도 지루했다. <서울 데카당스>의 영상 속 인물들의 행위를 그대로 따라하는 배우들의 ‘리트윗 연기’와 갱생핸드북 실험의 고백담이 교차 진행되고, 각 사건의 전개 역시 큰 변화 없이 유사한 내용의 반복에 머문다. 솔직히 한 시간이면 충분할 내용을 왜 두 시간이 넘도록 공연해야 했는지 의문이다.
배우와 관객을 구분하지 않고, 같은 공간 속에 위치하게 한 것은 결국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깨뜨려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겠다는 의도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배우들은 관객과의 연대를 통해 박정근을 따라하도록 만들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아 오히려 관객과의 거리를 확인시키듯 섬처럼 존재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서사극적 의도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해 관객의 현실인식을 변화시키는 데는 한계로 작용했다.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빨갱이, 갱생을 위한 연구>는 파편화된 서사, 공간의 전복, 영상의 적극적 활용, 연기의 퍼포먼스화, 서사극적 장면연출 등 기존 윤한솔 스타일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작품이었기에 그의 독창적 연극세계가 얼마나 튼실하게 구축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는 연극적 뚝심과 용기가 여전한 것도 믿음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