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땅이 기본조건이다. 땅이 있다면 그 땅에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어 살아간다. 땅 이외에 필요한 비용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자신의 노동력만으로 농산물을 거둘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그 대가를 얻어 살아간다. 이것이 인간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모델이다. 생존은 먹는 것에서부터 판가름 나므로. 연극이란 것도 이와 많이 닮아 있다.
 
우리는 확실히 연극이 딛고 설 땅이 아주 작은 시대에 살고 있다. 수백 개의 영화관들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만족시켜주고 있고, 텔레비전은 안방에서 또 다른 삶을 엿보는 욕구를 채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인터넷과 그 네트워크를 이용한 다양한 놀이들이 이미 사람들의 많은 시간들을 가져가버렸다. 연극이나 무용이 올라가는 극장은 춥고 한가롭다. 관객이 오지 않는 이유를 애써 이런저런 말들로 꾸며댄다. 진실을 이야기하면 너무 초라해지기 때문이다. 극장은 이런 현실을 이겨내기엔 너무 허황될 만큼 크고, 허무하다. 십여 년 전 지방의 문예회관들이 하나 둘씩 경쟁처럼 지어지고 있을 때,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정책을 세우고 그런 곳에 돈을 쓰는 사람들뿐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지금 도대체 전국의 극장들이 몇 개나 되는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지역의 극장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면서 엿보게 되는 극장의 일정표의 빈 공간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사는 도시에 하나 있는 극장에서 연극을 하고, 무용을 하고, 또 음악회를 열어 놓고 객석을 채우기 위해 힘들게 뛰어 다니지만 빈 객석에 대해서는 시대 탓으로 돌린다. 썰렁한 객석으로 쓸쓸히 살아가는 코끼리 같은 그 극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그 많은 돈은 또 어디서 나는 것일까. 극장들은 좋아지고, 지원금도 점점 늘어나는 것 같은데 왜 우리 같은 예술가들은 최저 생계비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히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이 조금 알고 싶을 뿐이다.

다시 농사 이야기를 해야겠다. 농사라는 것은 결국 그것을 먹는 사람들의 욕구에 따라 변화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런 욕구에 맞춰가다가는 모두 망하고 만다. 값싸고 구하기 쉽고, 맛도 좋고 영양도 좋으면 좋겠지만 그건 지나친 욕심일 뿐이다. 싼 값의 농산물을 만들기 위해 한 짓들 때문에 땅은 병들고, 곡식들도 아플 수밖에 없다. 겉보기에 좋을지 몰라도 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요즘은 다 안다. 어떤 것이든 다 마찬가지다. 정성으로, 좋은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더 좋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비싸다. 그래서 외면당한다, 안타깝지만. 
 
연극이 여전히 필요한가? 아니 정말 필요했던 적이 있었는가?라고 스스로를 의심하며 살아간다. 가끔씩 이런 의문들을 말끔히 잊게 되는 순간들을 만나고, 그 힘으로 우리의 연극은 지속된다. 연극이 단순히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면 이런 의심 따위 없이 벌써 그만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이상의 무엇이 있다. 연극은 먹거리에 있어서 유기농 농산물의 존재 같은 것이다. 뭐, 그럴 것이라 믿는다. 좋은 먹거리가 사람들의 아픈 몸을 치유하듯이 연극도 그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보듬어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연극이 지원금 없이 살아남을 수는 없다. 이미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 지원금이란 것이 매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 덕분에 지원금을 먹고 사는 예술가들도 왔다 갔다 한다. 슬픈 일이다. 그런 와중에 왠지 외면당하는 기분은 뭘까. 뭔가 제한되고, 제외 당한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선택 받지 못한 자들의 설움이랄까. 예를 들어 복권기금에서 후원하는 문예회관 우수공연프로그램에 선정된 작품들을 보면 설움을 짐작할 수 있다. 뮤지컬이나, 대형 아동극, 혹은 유명 배우들이 나오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흥행에 실패할 확률이 적은 작품들만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조금 어렵거나 너무 진지한 작품들을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데, 지원금의 흐름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취향을 선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은 과잉이다. 괴물처럼 커지고 화려해진 극장을 채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엔 역부족이다. 돈을 가진 자들이 문화를 이끌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도 이런 불균형구조를 만들어가는데 한 몫 하고 있다. 그 극장을 유지하기 위해 상주단체육성지원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놓고 예술가들을 유린한다. 예술가들은 심사와 평가의 도마 위에 올라야 하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탈락하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예술가들은 실험의 대상일 뿐인 듯, 매년 그 기준도 오락가락한다. 몇 년 동안 지원금을 받다가 이것에 길들여질 때쯤 어떤 이유인지 그 끈을 끊어버리면 예술가들, 특히 연극단체는 허우적대다가 문을 닫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예술단체들은 영민하게 눈치를 잘 봐야 하고, 원하는 대로 정산도 잘 해주어야 한다. 정책을 세우고 행정을 하는 사람들은 예술가들을 더 이상 믿지 않고 영수증 한 장도 의심의 눈초리로 확인하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처음의 그 열정과 신념으로 연극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연극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뛰다” 안에서 계속 연극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여전히 의미 있고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연극의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유기농 쌀밥과 같은 연극을 사람들과 더 깊이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뭘까?
 
처음 연극을 시작했을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본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도 무작정 거리로 나가 관객들을 만났을 때의 마음으로, 시골의 할머니들 앞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공연했던 그 순간들을 다시 만나러 간다. 그 마음으로 4년째 화천의 작은 마을에서 살면서 새로운 가능성들을 모색해본다. 생전 연극이란 것을 본 적 없는 시골 어르신들이 극장을 찾아오게 할 수 있다면, 정말 그분들이 우리와 깊이 소통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 극단이 마을의 곶감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를 다시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시 농사 얘기를 하자면, 지금 우리나라의 쌀 자급율은 80% 정도로 떨어졌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화천 신읍리의 최근 3년간 3분의 1정도 되는 논 위에 비닐하우스나 인삼밭이 만들어졌다. 쌀에 대한 지원금이 줄어들면서 농부들은 자연스레 수익이 좋은 작물을 심게 된 것이다. 그 외 곡물 자급율은 20% 밖에 안 된다. 기본적인 것들, 중요한 것들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한다. 농부들은 외면당하고 밀려나고 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 못한다. 마치 연극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데도 그 자리마저 한쪽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지원금의 방향을 바꿀 수 없다면 우리가 그 틀에서 벗어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우리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이제 이 문제는 시장의 논리로 풀 수 없다. 우리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우리가 하고 있는 연극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쌀이 우리 몸의 양분을 채워주는 가장 기본적인 먹거리인 것처럼, 내가 하는 연극이 우리 삶의 영혼을 살려내는 기본적인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연극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 기대해본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 본질적인 것들 속에 해답이 있다고 믿는다. 지금 세속화되어 타락해가는 한국의 대형교회들을 보면 앞으로 우리 문화의 양상을 가늠할 수 있다. 양적인 것에 집착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만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안에 갇혀서 자신들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커다란 문화의 흐름 안에 갇혀 있지 않으려면, 지원금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무모하더라도 과감하게 그 틀을 깨뜨려버려야 한다. 문화는 정말 진지하고 소박하고 진실한 이들의 작은 움직임에서부터 변화되고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