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 양극화?
디자인 양극화라는 말은 낯설다. 하지만 양극화라는 말은 결코 낯설지 않다. 다만 디자인과 양극화라는 말의 조합이 어색할 따름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단어의 하나인 양극화는 디자인에도 어김없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하지만 디자인 양극화는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양극화 현상과는 그 성격을 좀 달리한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디자인 양극화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 빚어낸 생활문화 불균형의 한 양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면 디자인 양극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디지털 분할Digital Divide처럼 부자와 빈자 사이의 디자인 분할Design Divide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디자인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외관이니까, 부자는 더 좋은 디자인의 상품을 선택하고, 가난한 자는 덜 좋은 디자인의 상품밖에 소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그저 소비 양극화의 한 결과일 뿐, 굳이 디자인 양극화라고까지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디자인 양극화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양극화가 디자인이라는 부문의 특수성을 통해 드러날 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디자인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디자인이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단순 반영물은 아니다. 디자인이라고 하는 것은 어쨌든 고유한 문화적 차원을 가진다. 왜냐하면 디자인은 근본적으로 생활문화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경제적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이념적인 것들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이념적인 측면도 함께 건드리는 것이 된다. 디자인 양극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회의 디자인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산물이지만, 그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 커다란 부분에서 한국적 근대화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다. 하기야 한국적 근대화의 특수성이 곧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이니 만큼 한 단계 건너가면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 역시 앞서 말한 것처럼 디자인에는 경제적 차원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한국적 근대화의 특수성 또는 모순이 생활문화에 반영된 것으로서 디자인 양극화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나는 그것이 크게 제도와 현실, 사적 영역과 공공 영역, 디자인 전문직의 위계라는 세 가지의 경계를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제도의 과잉, 현실의 빈곤
한국 사회에서 디자인 양극화의 첫 번째 경계선은 제도와 현실 사이에 드리워져 있다. 그것은 제도의 과잉과 현실의 빈곤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디자인 제도는 과잉 발전되어 있는 데 반해, 디자인 현실은 남루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과잉발전된 국가 부문과 저발전된 시민사회라는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구조가 디자인에 반영된 결과이다.
먼저 한국의 디자인 제도가 놀라울 정도로 발전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발전이란 물론 양적 발전이다. 사회의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디자인도 제도화되어 있다. 흔히 자본주의 소비생활이나 개인의 취향 차원에서 이해되는 디자인과 사회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는 디자인은 다르다. 그 둘은 여러모로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일단 후자를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디자인 제도는 크게 교육 제도, 전문직 제도, 공공 제도로 구분할 수 있다. 교육 제도는 대학의 디자인 교육을 가리킨다. 전문직이란 보통 디자이너라고 부르는 직업군을 가리킨다. 공공 제도란 국가 또는 지자체 차원에서의 디자인 정책 및 기관을 가리킨다. 한국 사회의 디자인 제도는 이 세 부문에서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의 양적 규모를 자랑한다.
연간 2, 4년제 대학 디자인 전공 졸업자 수는 3만 5천 명 수준을 헤아리며, 다양한 산업 영역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수도 엄청나며, 국가 또는 지자체 차원에서의 디자인 정책이나 기관도 많고 활발하다. 적어도 양적 수준에서 한국의 디자인 제도는 세계 최고 수준임을 의심할 수 없다(디자인 전공 졸업생 수는 예체능계 전공 전체 졸업생 수의 절반에 해당되며, 인구 대비 세계 최고이다).
뿐만 아니라 디자인이라는 말도 넘쳐난다. ‘디자인이 경쟁력이다’, ‘21세기는 디자인 혁명의 시대’, ‘창조경제는 디자인으로’ 등 디자인과 관련된 담론들이 온갖 매체를 장식하고 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디자인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디자인을 서울시의 중점 정책으로 추진한 바도 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디자인이라는 말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아니 넘쳐나고 있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제도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무척이나 빈곤하다는 데 있다. 제도의 양적 기준과 달리 현실 디자인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실의 디자인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환경의 미적 수준이 바로 디자인이다. 우리를 둘러싼 공간, 생활용품, 이미지들의 수준이 높은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면 된다. 난개발과 관료주의, 극단적 이기주의의 결과물인 우리의 생활환경은 결코 쾌적하고 아름답다고 말하기 힘들다.

디자인은 국가 발전이나 기업의 판매촉진 수단, 개인의 취향 이전에 한 사회의 생활환경의 수준을 결정하는 미적 요소이다. 아무리 국가와 기업과 대학이 디자인을 떠들어대도 내가 살아가는 생활환경이 아름답지 않으면 우리의 디자인 수준은 낮은 것이다. 디자인 제도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디자인 수준이 빈곤하다면, 그것을 일러 어찌 디자인 양극화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적 디자인과 공공 디자인의 불균형 발전
한국 사회에서 디자인 양극화의 두 번째 경계선은 사적 영역과 공공 영역 사이를 가른다. 한국 사회는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리하여 사적 영역의 디자인은 비교적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사적 영역의 디자인, 즉 사적 디자인Private Design은 개인의 소비생활을 위해 사용되는 디자인으로서 시장을 통해 매개된다. 따라서 구매력과 안목만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디자인을 선택, 소비할 수 있다.
하지만 공공 영역의 디자인, 즉 공공 디자인Public Design은 다르다. 공공 디자인은 공공 영역을 형성하는 디자인으로서 공공 공간이나 시설, 이미지 등의 디자인을 가리킨다. 공공 디자인은 원칙적으로 공공 주체(국가나 지자체)가 제작, 공급하는 것으로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제공되는 일종의 사회문화적 인프라라고 할 수 있다. 사적 디자인이 자본주의의 발전 정도에 따른다면 공공 디자인은 시민사회의 발전 수준에 따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역시 한국 사회는 사적 디자인의 발전과 공공 디자인의 저발전이라는 양극화된 풍경을 드러내고 있다. 사적 디자인이 날로 발전해가는 반면, 공공 디자인은 낮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적 공공성 자체가 형성되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된 공공 디자인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공공성은 여전히 시민사회의 것이라기보다는 국가의 독점물에 가깝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각종 공공시설물의 미적 수준을 생각하면 한국 사회에서 공공 디자인의 현주소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한 가지 기이한 현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작금의 공공디자인 붐이다. 전통적으로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의식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한국 사회와 디자인계였건만, 대략 2000년대 들어서면서 갑자기 공공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폭발한 것이다. 중앙정부를 비롯하여 각 지자체에서 공공 디자인이라는 이름의 정책과 프로젝트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지자체들마다 디자인 관련 부서가 신설되는 등 공공 디자인은 한동안 공공 부문의 화두가 되기에 이르렀다.

과연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무엇이며, 그 결과 한국 사회의 공공 디자인 수준이 과연 높아졌는가. 나는 이러한 현상이 1995년 지자체 실시 이후 단체장들의 과시욕과 IMF 이후 위축된 디자인 시장의 새로운 수요 찾기가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리하여 많은 경우 공공 디자인은 토목사업을 포장하는 장식어가 되었고, 디자인업계에서는 새로운 시장 창출의 효과가 있었다고 본다(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청계천 프로젝트’가 제1회 공공디자인 대상을 수상한 일, 그리고 수여 주체가 한국공공디자인학회라는 사실을 상기해보라). 그리하여 전혀 성과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대체로 공공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수많은 프로젝트들은 진정한 공공성을 담보하지 못한 채, 사실상 사적 디자인에 의해 포섭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디자인 전문직의 양극화
한국 사회에서 디자인 양극화의 세 번째 경계선은 디자인 전문직 내부를 가로지른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한국 사회에서 디자인 전문직은 엄청난 공급 과잉 상태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진이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되돌아보면, 이는 그동안 디자인이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는 나른하기 짝이 없는 단 하나의 논리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다. 1970~80년대에 수도권 인구 억제 정책의 일환으로 대학 신설이 금지되고 정원도 동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에서 단 둘의 예외가 있었는데, 하나는 이공계열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디자인학과였다. 디자인은 공학과 함께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한다는, 그 한 가지 이유로 인해 특혜를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대학의 정원 확대 수단으로 활용했음은 불문가지이다. 하지만 한국 디자인계는 이러한 양적 성장 과정에서 사회적이거나 공동체적인 책임의식을 가질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고, 한국 사회의 성장과정에서 과실만을 따먹었을 뿐이다.
아무튼 디자인 인력의 공급 과잉은 점점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디자인계에서 의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모두의 무책임 속에서 파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순수미술이 아니라 디자인을 전공하면 밥 먹고 살 수 있다는 것도 옛 이야기일 뿐이다. “한국에는 디자인 산업은 없고 디자인 교육산업만 있다”라는 자조적인 발언이 그저 나온 것이 아니다.
디자인 대학 교수나 몇몇 유명 디자이너를 제외한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의 현실은, 문화평론가 서동진이 ‘디자인 잡역부’라고 부르는 것에 더 가깝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디자인 정책은 스타 디자이너 육성을 운운하고, 디자인계의 유력인사는 디자인이 창조경제의 원동력이라고 떠들어대며, 대중매체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을 불어넣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하여 몇몇 잘 나가는 디자이너들과 ‘디자인 잡역부’들을 모두 크리에이터라는 환상 속에 묶어놓고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연출한 양극화라는 이름의 잔혹극의 또 다른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디자인의 양극화가 보여주는 풍경이다. 제도의 과잉과 현실의 빈곤 사이에서 우리의 생활문화는 추락하고 있다. 이는 결국 디자인 제도의 무책임성과 시민 감성의 결여가 빚어낸 현실이다. 디자인 양극화를 벗어나는 방법은 딴 데 있지 않다. 제도의 이데올로기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감성과 욕망에 충실한 시민이 탄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디자인은 국가 발전의 도구도 아니고 기업 판매의 수단도 아니며 단순히 개인의 취향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사회가 가진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