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5일부터 29일까지 나흘 동안 《2013 인천바이링구얼(이중언어)연극제》가 인천여성문화회관, 부평청소년수련관, 인천수봉문화회관 등지에서 국내를 포함한 중국 · 베트남 · 일본 · 필리핀 등 5개국 연극인들의 참여로 진행되었다. 행사 명칭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 동일한 원작을 각국의 언어로 연기하고, 저마다의 관점대로 연출하여 극을 구성하는 방식이 핵심인 연극제였다. 첫날 <북경에서 도둑으로 살아가기>와 둘째 날 <섬 위의 여자>는 각각 중국어와 쯔놈(베트남어)으로 극을 마친 뒤 이어서 한국어로 무대에 올린 낭독공연이었고, 셋째 날 <나그네 타령>은 일인극으로 하나의 극 안에 일어와 한국어를 혼용한 사례였다. 또 마지막 날의 <귀국 상자>의 경우 한국어 극을 먼저 올린 후 타갈로그(필리핀어) 무대를 선보인 순서였다. 이처럼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순서와 형식으로 치러진 이 연극제는 내게는 다소 남다른 행사였다.

침묵과 발언, 그 위태로운 줄타기
서로 다른 발신자로부터 한 통씩의 전화 연락이 왔다. 한 쪽은 공연사진 촬영 의뢰였고 또 다른 한 쪽은 에세이 형식의 공연리뷰 청탁이었다. 공교롭게도 양측은 나라는 한 인물에게 동일한 공연을 가지고 다른 결과를 요구한다는 사실은 서로 모르는 상황이었다. 여하튼 나로서는 촬영을 하려 해도, 작문을 하려 해도 나흘이라는 시간을 따로 들여야 할 터였는데, 마침 입력해야 하는 내용(공연관람)이 같아 이득으로 생각되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특별한 인연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개인적인 작품 사진이 아닌 객관적인 시점을 유지해야 하는 촬영과,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닌 그것을 토대로 주관적인 시선을 보여야 하는 리뷰 작성, 이 둘을 1회의 입력으로써 이끌어내야 한다는 면에서 고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현장에서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꼭 이와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평소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양상을 뒤틀리지 않게 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만 한다. 이를테면 침묵과 발언이 그러하다.
일체의 언어동작이 종내 오해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침묵을 선택했다고 떠올려 보자. 허나 침묵인들 오해를 면할까. 침묵의 뒤를 잇는 건 도로 침묵이어서 회피를 자기 고유의 응대인 것으로 착각하게 될 뿐 다음 국면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침묵은 선행되는 고요에 후속으로 발언을 병렬하였을 때 드러나는 것이지 그저 묵연하기로만 일관한다면 결국 부재를 나타내는 것이겠고, 소통이 멎는 마비의 순서를 맡아 두는 셈밖에 되지 않는다. 관계 맺기에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병리적 태도이다. 오히려 어떻게든 이해시키려는 오지랖이 오해를 더욱 짙어지게 한다. 결국 필연적인 오해를 인정하고 침묵과 발언을 안배하고서야 비로소 관계의 가능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친구 중에 한 명이 농아인데, 단 둘이서만 만나면 주로 필담을 나누고 조금씩 익힌 수화로 간단한 기분 등을 표현하며 더러는 서로 별다른 얘기 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 친구를 다른 지인들이 여럿 모인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다들 화제로 오른 이야깃거리에 몇 마디씩 보태기 바빠 제 얘기들만 쏟을 뿐,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을 이 친구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를 고립시키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이다. 이를 인지한 나는 그와 단 둘이 되었을 때 앞으로는 둘이서만 만나고 싶다고, 여럿이서 만나면 자꾸 당신만 혼자 괜히 겸연쩍어지는 상황이 되니 당신이 나와 별개로 그들과 무리 지어 어울리는 것은 구태여 관여할 바 아니나 나를 만날 때는 둘만 만나자고 선언했다. 딴에는 그 친구를 배려하려던 것이었으나 당시에는 나의 이런 일방적인 태도가 오히려 그를 외딴 곳으로 밀어내는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거다. 당장에는 이 친구가 쓸쓸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자꾸 여럿이서 함께 어울리며 부대꼈어야 하거늘, 나는 그를 ‘친구’가 아니라 ‘농아 친구’로 만들고 말았다.

자국어와 타국어, 익숙함과 낯섦
이번 이중언어연극제는 동시통역이나 자막, 별도의 해설 없이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불편’한 환경은 관객을 배려하지 않았다거나 준비가 덜 된 게 아니라 특정 언어권 관객을 중심에 두지 않고 동일한 여건에서 날것인 상태의 낯선 타국어를 대하게 함으로써 당연시했던 배타성을 돌아보게 하는 장치였고, 신승일 조직위원장의 여는 글에서처럼 “외국어의 혼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타자와 소수자가 어떻게 공생할 것인가” 하는 질문의 방식으로서 유효했다. 타국어나 다른 문화에 다가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해석이 아니라 관심이다.
사실 타 문화권에 대한 별 관심 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진행되는 극을 수십 분간 관람하는 것은 고역일 수 있다. 실제로 현장에서 촬영을 하며 조는 관객도 이따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문화라는 것은 국가로 구별되는 게 아니라 낱낱이 따져 들어가자면 최종적으로 개개인이 서로 다른 문화의 최소 권역으로 구획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한 나라 안에서 사용하는 동일한 언어라도 결국 저마다 다른 타국어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면서 졸지 않는 것은 어쩌면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느라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얘기하는 재미에 빠져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관심도 없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기만 해야 한다면 들려오는 언어가 자국어란 사실 하나만으로 졸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는 것이다. 익숙함에서 타성을 뉘우치고 낯섦에서 새삼스러움을 깨우치려는 마음 없이는 고착화된 배타성을 끝내 부수기 어렵지 않을까.

고향과 타향의 간격
앞서 지적한 대로 문화권의 최소 단위가 개인이라 했을 때, 통상 국적이 다른 사람들끼리 이룬 가정을 일컫는 ‘다문화가정’이란 말은 어색하기 그지없는 표현이다. 국적과 관계없이 모든 가정은 다문화가정인 까닭이다. 이는 그냥 ‘친구’라고 하면 될 것을 ‘농아 친구’라고 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괜한 가정을 일반 가정과는 다르니까 따로 더 신경을 써 줘야 한다는 오지랖을 부려 관심인 척 간섭하며 종내 우회적으로 배척하는 행위에 불과할 뿐더러, 더욱이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다. 하지만 분명 개인마다, 가정마다 고유의 특성이 있는 까닭에 그 개별성을 존중하기 위하여 거기에 맞는 호명은 필요하다. 가령, (이런 예를 든다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유럽 사람과 동남아 사람이라는 구분 자체는 그저 범상한 사실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여기에 지배적으로 삽입한 편견이 고약할 따름이다. 중국인은 중국인이고, 베트남 사람은 베트남 사람이다. 재일교포(이번 일본어 공연 연기자인 황수자 선생님은 재일교포 2세다)도 그렇고 필리피노나 필리피나도 마찬가지다. 멀다는 건 언제나 버거운 위상이다. 가고 싶어도, 보고 싶어도 멀다면 당장 별 도리가 없다. 이번 연극제의 외국인 참가자들과 관람객들이 이주자이든 아니든, 세상 그 누구든 결국 자신의 생애 안에서 이주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이 소수자로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잊게 하는 자리였기를 바란다.
이번 《2013 인천바이링구얼(이중언어)연극제》는 내년의 공식적인 개최를 위한 사전 행사였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홍보나 진행 등에 있어 아쉬운 부분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행사 장소를 산개한 점이나 언어별 무대 순서를 다양하게 구성한 점, 일부 일정을 기존 커뮤니티 행사와 결합시킨 점 등은 다국적 행사라는 성격과 맞닿았기에 만족스러운 기획이었다고 본다.
갇히게 되는 건 잠글 문조차 없을 때다. 그게 잠긴 문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서로 다른 언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