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변두리에서 목격했다. 부자 동네와 가난한 동네의 차이는 골목이었다. 부자들이 사는 동네의 골목은 널찍하고 고요했다. 반면 서민들이 사는 골목은 좁고 떠들썩했다. 내 신혼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얘기다. 경기도 부천에서 서울 삼청동으로, 삼청동에서 수유리로, 수유리에서 다시 수유리로. 결혼해서 채 5년도 안 된 시기였는데, 주민등록지를 네 번이나 옮겼다. 
그 사이 첫 애가 태어났고, 이사는 계속됐다. 수유리에서 상계동으로, 평창동으로, 경기도 일산으로, 일산에서 다시 일산으로? 2년에 한번 꼴로 이삿짐을 싸야 했다. 나나 아내가 부동산에 일가견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만도 아니었다. 전세 값 폭등에 떠밀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두어 번은 북한산 자락을 벗어나지 말자는 비현실적 각오도 작용했다. 어쨌거나 이사를 자주한 덕분에 가진 자들의 동네를 엿볼 수 있었다. 수유리?정확하게는 장미원과 평창동. 저 두 곳에서도 전세를 살아야 했으므로, 부촌의 한가운데가 아닌 언저리였다. 인적이 드문 골목과 적막이 드문 골목의 경계였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전기가 1970년대 초반에 들어왔고, 신작로도 1980년대 들어서야 포장됐다. 오래된 마을은 아니었지만 영락없는 농촌이었다. 집과 집은 고샅길로 연결되었고, 고샅의 끝은 마당이었다. 담이 없는 집이 많았다. 신작로에서 시작된 고샅이 공적영역이라면, 집안으로 이어지는 툇마루는 전적으로 사적영역이었다. 고샅과 툇마루가 만나는 마당은 복합적 영역이었다. 마당은 놀이터이자 행사장이었고, 식당이자 논밭이었다. 구슬치기가 벌어지는 곳에서 결혼식과 장례식을 치렀고, 여름이면 저녁 밥상이 차려졌다. 가을에는 당연히 타작마당으로 변했다. 

골목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지만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향집을 떠났다. 대학에 입학한 이래 나는 줄곧 서울내기였다. 20대로 접어들면서 마당, 고샅과 결별했다. 1990년대 중반, 아파트로 처음 이사 갔을 때의 충격을 지금도 있지 못한다. 그때만 해도 아파트에서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다가 고가 사다리차에 관이 실려 내려오는 장면을 보고 아찔했던 적이 있다. 인간이, 삶이, 세상이 죄다 상스러워 보였다. 이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가 없게 되었구나. 죽음이 죽은 것이었다. 죽음이 죽어버려서, 죽음이 삶에 개입하지 못해서 삶이 이토록 비루해진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의 상당 부분은 죽음에 대한 예의와 무관하지 않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내 일터는 서울 한복판 광화문이었다. 저 20여 년 간, 광화문 일대가 어떻게 ‘재개발’되었는지를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88올림픽 때까지만 해도 신문로, 관철동, 무교동 일대는 골목 천지였다. 대로에서 모퉁이로 접어들면 바로 골목이었다. 한옥을 비롯한 단층집들이 어깨를 마주하고 있었다. 퇴근하면 정동에서 신문로, 세종로 사거리를 지나 피맛골을 통과해 인사동까지 걷곤 했다. 경기여고 자리가 있던 정동 일대 골목이 가장 먼저 사라졌다.
그래도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던 골목이 피맛골이었다. 가마를 피하는 골목이래서 붙여진 이름. 교보문고에서 옛 제일은행 본점에 이르는, 채 1km가 못 되는 좁은 골목이었다. 조선시대, 평민들은 양반 행차가 잦은 대로를 피해 골목으로 깃들었다. 대로에서 행차와 마주치면 어김없이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거들먹거리는 양반들의 꼬락서니를 못마땅해 하던 백성들은 피맛골로 들어가 막걸리 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 역사와 전통이 대물림됐던 것일까. 피맛골은 21세기 초입까지만 해도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반골의 거리였다. 피맛골이 있던 자리 위로 지금 수십 층 오피스 빌딩이 세워지고 있다.
아파트에 살면서 새삼 깨달았다. 마당은 주차장으로 변해 완전히 소멸됐다. 하지만 골목은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복도가 골목이었고, 엘리베이터 또한 골목이었다. 엘리베이터 혹은 계단으로 올라간 수직의 골목은 각 층마다 복도라는 수평의 골목으로 연결됐다. 하지만 골목이 갖고 있던 풍요로운 기능은 거의 사라졌다. 시골의 고샅은 ‘정보 고속도로’였다. 뉴스가 고샅을 통해 확산, 수렴됐다. 고샅을 통해 모두가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부부싸움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이웃이 즉각 개입했다. 냄새도 퍼져나갔으므로, 남몰래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없었다. 대낮에는 속옷 빨래를 내걸지 않았다. 골목이야말로 유구한 ‘사회 안전망’이었다.

도시, 교환가치에서 사용가치로
아파트에서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는 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특히 엘리베이터. 어린아이가 함께 타는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어른들만 탈 경우, 어른들은 서로 거리를 두려고 애쓴다. 서로 눈빛이라도 마주칠까봐 전전긍긍한다. 층간 소음 문제는 폭력사태로 번지기까지 한다. 주거 공간의 사정이 이럴진대, 고층 오피스빌딩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빌딩과 아파트에서, 도로와 거리에서, 광장과 공원에서 사람들은 서로 낯설어야 편안해 한다. 단, 대전제가 있다. 나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안전한 타인이어야 한다. 물론 나 역시 타인에게 함부로 관심을 보여서는 안 된다. 도시는 안전한 익명들의 사회이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전한 타인들의 공동체는 과연 가능한가. 안전한 익명들의 공동체는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민주주의자들의 공동체’와 다르지 않다. 도시가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익명성과 안전성은 어쩌면 도시를 건설하고, 도시를 지배하는 자들의 전략인지도 모른다. 도시는 도시인을 개인(individual: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개체)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국가와 자본주의는 모든 선택을 개인에게 개방한다고 선언하고는 뒷짐을 쥐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투를 빌리자면 이런 식이다. ‘누구나 세계여행을 할 수 있다, 단, 비행기 표는 당신들이 사야 한다.’
도시에 대한 관점을 바꿔야 한다. ‘도시의 주인은 누구인가’. 질문을 바꿔야 새로운 답을 구할 수 있다. 도시를 재발견한다는 것은 도시에 대한 권리를 되찾는다는 것이다. 『도시에 대한 권리』(강현수, 책세상, 2010)를 지도 삼아, 1960년대 후반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보자. 그때 파리에서 도시가 재정의됐기 때문이다.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라는 슬로건을 들고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가던 1968년, 진보적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도시에 대한 권리’를 주창했다. 당시 파리는 대도시 반식민주의 현상이 심각했다. 도심으로 권력, 자본, 정보가 집중되는 대신, 노동계급은 외곽 신도시로 쫓겨났다. 의미 있는 공동체의 기반인 마을 공동체로부터 ‘잠만 자는’ 주거단지로 추방된 것이다.
급격한 도시 재편 과정을 지켜보던 르페브르는 ‘도시는 제품이 아니고 작품’이라고 천명했다.  제품이 교환가치를 우선한다면, 작품은 사용가치를 우선한다. 제품이 돈을 매개로 한 사적 소비행위의 대상이라면, 작품은 공공성을 매개로 하는 사회적 만남의 대상이다. 르페브르는 도시를 작품으로 인식할 때, 도시가 갖고 있는 특성?공공성, 이질성, 만남과 교환?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거리와 광장, 건축물, 기념물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축제”라는 것이다. 르페브르가 주창한 도시에 대한 권리의 요채는 참여와 전유다. 참여의 권리는 도시 거주자들이 도시 공간의 창출과 관련된 의사 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권리다. 전유의 권리는 사적 소유권과 대비되는 것으로 광장이나 공원과 같은 공공 영역을 확대해 이를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권리를 말한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직접 민주주의의 심화와 공적 장소의 확대로 요약된다.

꿈꾸는 시민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
도시 재개발 연구의 권위자 제인 제이콥스도 다음과 같이 참여와 전유의 권리를 강조한 바 있다. “도시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질 때만이 모든 이에게 뭔가를 제공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모든 권력은 아직 상상력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 그러기는커녕 대부분의 권력이 여전히 소수 엘리트의 손 안에 있다. 권력의 문제를 도시에 한정한다면, 소수 막강한 권력과 다수 허술한 상상력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존재한다. 시민들이 스스로를 단순한 도시 거주자?소비자라고 내면화한 나머지, 우리가 도시 공간을 기획하고 생산하고 사용하는 주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우리가 도시의 주인’이라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우리에게는 마당과 고샅이라는 원체험이 있다. 농경공동체가 오랫동안 유지, 전승해온 공동체적 가치가 제법 살아 있다. 도시는 타의에 의해 강압적으로, 또 급격한 속도로 도래한 타자다. 그래서 도시를 객관화하지 못한 채, 도시의 요구에 대처하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도시를 다시 봐야 한다. 도시는 괴물이 아니다. 언젠가 떠나야 할 대합실도 아니다. 농촌이 우리의 미래?노후가 될 확률도 그리 높지 않다. 우리는 도시에서 살다 도시에서 죽어야 한다. 그렇다면 도시를 더 나은 삶의 터전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마당과 고샅으로부터 시작하자. 만남과 교환이 이뤄지는 공간, 그리하여 공공성을 확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1차 장소?플랫폼이다. 
마당과 골목을 형태적으로 복원하기란 쉽지 않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의미 있는 1차 장소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작은 것, 가까운 데서 시작해보자. 아파트에 공동텃밭을 만들어보자, 아파트 주차장에 주말 벼룩시장을 열어보자, 노인정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어린아이가 만나는 옛날 얘기 프로그램을 운영해보자, 거리에 의자를 내어놓자, 도심 오피스빌딩 사이에 화단을 조성해보자, 동네 초등학교를 농장으로 만들어보자, 농촌과 자매결연을 해보자, 차 없는 거리를 만들어보자, 구청과 시청 홈페이지만이라도 자주 들락거리자.  
강현수 교수가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밝힌 ‘도시 권리 운동을 위한 상상력’의 한 대목을 옮긴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현재 존재하는 실정법상의 권리를 넘어선 새로운 권리를 꿈꾸는 상상력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지금과 다른 도시?시민 각자가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는 가운데, 이웃과 이방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도시 공동체는 오직 꿈꾸는 자들이 건설할 수 있다. 더 나은 도시에 대한 권리는 시민이 ‘꿈 꿀 수 있는 권리’다. 실정법을 넘어서는 상상력이 마당과 골목을 만들 것이다. 꿈꾸는 시민이 도시 곳곳에 따뜻한 만남과 의미 있는 교환이 이뤄지는 1차 장소?플랫폼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때 도시는 우리 모두가 원하는 작품으로 거듭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