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옷에 마음을 담는 사람들
“남자는 현명하게 옷을 사서 신중하게 옷을 입고 그 옷을 완전히 잊은 듯 보여야 한다.” 패션 디자이너 하디 에이미스의 말이다. 옷을 선택하고, 구입하고, 입는 데까지는 세심하게 관여하되 옷을 입은 후에는 그 옷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연기까지 해내야 하다니. 옷이란 참 많은 것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숨길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물인가 보다. 뛰어난 정치가들도 때로는 자기 자신보다 배우자의 패션 감각에 더 신경을 쓰는 대중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역사상 가장 사랑받은 대통령 중의 한 사람인 J.F.케네디는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이제 나는 패션이 정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막 깨닫고 있다. 사람들이 내 연설보다 재키의 옷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옷은 입는 이의 감정과 성격, 때로는 마음속 깊은 곳의 욕망까지 드러낸다. 옷은 취향이나 직업을 표현하기도 하고, 호감을 느끼는 상대방과의 멋진 데이트를 기대하는 설렘을 드러내기도 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여성들이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기 전에 그토록 옷장을 뒤집는 장면을 많이 보여주는 이유. 그것은 바로 옷을 통해 ‘드러내되 신경 쓰지 않은 듯 보이는’ 수많은 감정의 스펙트럼을, 남녀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옷이 날개다’라는 말은 옷이 가진 미학적 측면뿐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도 나타낸다. 똑같은 옷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과 심리를 저마다 다르게 드러낸다. 웨딩드레스처럼 특별한 날에 입는 옷뿐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복 속에서도 우리는 옷 속에 숨은 옷 주인의 마음 속 무늬와 빛깔을 읽어낼 수 있다. 교복을 입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조차 저마다 교복을 통해 ‘자기만의 스타일’을 은밀하게 추구한다. 똑같은 교복이라도 스커트 길이를 조정하고, 단추를 여닫거나 펜던트 길이를 바꾸고, 칼라나 소매단이나 양말이나 스타킹을 어떻게 접어 입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분위기가 달라 보인다는 것을 아이들도 아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옷은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 결정적인 무기가 된다. 상대방이 전혀 의도하지 않는 순간에도 말이다. 직업에 따른 각종 유니폼을 입은 이성을 보면 남다른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이럴 때 옷은 사랑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증폭시키는 도구가 된다.
인물을 그린 초상화를 볼 때 우리는 보통 얼굴을 먼저 보지만, 때로는 얼굴보다 옷이 눈길을 사로잡는 경우도 있다. 그림 속 여인들의 옷 중 내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옷은 카미유 코로의 푸른 드레스였다. 오래 전 루브르에서 카미유 코로의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을 처음 봤을 때의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당시 카미유 코로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초상화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는데, 그 조그만 화폭에 담겨진 여인의 초상 속 드레스는 보는 이의 가슴속에 잠자고 있는 어떤 억압된 감정을 강하게 끌어냈다. 이 아름다운 드레스는 우리 가슴속에 숨어있는 어떤 감정의 그늘을 들춰낸다. 막연하고도 우울한 기다림 같은 것, 한없이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그 기다림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 같은 것.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멜랑콜리는 바로 그 푸른 드레스의 오묘한 빛깔과 미세한 주름들 속에서 번져 나오는 것 같다. 이 사랑스러운 드레스는 여인의 앳된 얼굴에서 느껴지는 설렘과 떨림과 기다림의 흥분을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듯하다. 푸른 드레스는 화폭 전체를 압도하면서도 홀로 붕 뜬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의 슬픔과 이 드레스의 빛깔이 마치 처음부터 하나인 듯 동일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2. 고골리의 <외투>에 드러난 생존의 슬픔
그림은 물론 문학 작품 속에서도 ‘옷’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드러내는 수많은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쾌걸 조로의 멋진 망토와 마스크는 그의 영웅적 등장과 신비로운 익명성을 드러내고, 빨간 망토 소녀의 붉은 외투는 이제 막 소녀에서 여인으로 변해가려는 여성의 관능과 순수를 드러낸다. 신데렐라의 초라한 누더기는 그녀가 홀로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명징하게 드러내고, 몬테 크리스토 백작의 망토는 비밀에 둘러싸인 그의 삶과 세상을 향한 숨겨진 적개심을 드러낸다. 내 기억 속 주인공들 중 가장 사연 많은 옷의 주인 중 하나는 고골리의 「외투」에 등장하는 아까끼예비치다. 그는 옷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지극히 검소하고 무신경한 남자였다. 그에게 옷은 최소한의 기능만을 하고 있었을 뿐, 옷을 통한 자기표현이란 사치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한 벌의 외투가 그의 운명을 바꾼다. 그리고 그 가혹한 운명은 혹한기의 빼쩨르부르크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남자로서는 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까끼는 말단 공무원으로서 문서를 정서하는 일을 담당하는 독신남이다. 그는 쥐꼬리만한 월급에도 만족하며 오직 온갖 공문서의 흐트러진 글씨들을 가지런하게 정서하는 일에서 최고의 만족감을 얻을 줄 아는 건실한 남자다. 그는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자신의 일에서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쁨을 느낀다. 9급 관리로 관청의 서기를 맡고 있는 그의 일상은 자로 잰 듯 정확하다. 그는 가족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도 없으며 구상해야 할 장밋빛 미래도 없다. 오직 매일 똑같은 일상으로 가득 한 서기 일에서 무한한 만족을 느낀다. 글자를 깨끗이 베껴 쓰고 문서를 정리하는 일에서 그는 다양하고 즐거운 자신만의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미소를 머금고 일하는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권태도 누추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성실함을 높이 산 상사가 그에게 더 좋은 자리를 줬을 때도 그는 결국 거절할 정도였다. 그는 외투 한 벌로 북방의 매서운 한파를 이겨내는 불굴의 사나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은근히 무시한다. 패션 감각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그의 늘 똑같은 옷차림이야말로 멸시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도 잘 보일 필요 없고, 누구에게도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그의 흠잡을 데 없는 고독은 그를 외톨이로 만들었다.
그러나 단벌신사인 그는 남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다. 아마 영하 20~30도를 넘나드는 북방의 한파만 없었어도 그는 누더기나 다름없는 자신의 외투를 결코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언젠가부터 등짝으로 스며드는 한파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낀다. 외투에 이상이 있나 싶어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외투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이미 여러 번 수선을 맡겨 꿰맨 자국으로 가득한 외투를 그는 또 한 번 수선하러 단골 재봉사를 찾아간다. 재봉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이 옷은 도저히 수선 불가능하다고. 아까끼는 애원하다시피 매달린다. 새 옷을 맞출 형편은 도저히 안 된다고. 어떻게든 입을 수만 있게 해달라고. 그러나 재단사는 단호하다. 이미 여러 번 천을 덧대어 바느질을 했고, 옷이 워낙 낡았기에 바늘을 몇 번만 더 찔러 넣어도 옷이 찢어지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아까기는 절망한다. 그럼 도대체 새 옷을 맞추려면 얼마가 필요하냐고. 한파를 견딜 수 있는 새 외투는 무려 150루블이 넘었고, 그것은 아까끼의 몇 달치 월급보다 훨씬 많은 돈이었다. 아까끼는 절망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미 십 년 넘게 입은 외투는 도저히 손 쓸 방도가 없었고, 추위를 피하는 다른 방법은 없었기에. 그때부터 그의 눈물겨운 ‘외투 구입비 마련 모으기 투쟁’이 시작된다.
그는 저녁마다 마시던 차도 끊고, 저녁조차 굶었으며, 밤에는 촛불도 켜지 않고 꼭 필요할 때는 주인여자의 집에 가서 그녀의 촛불에 신세를 지기로 한다. 속옷이 빨리 닳지 않도록 세탁부에게 맡기는 횟수도 줄이고, 돌이나 석판을 밟을 때는 구두 밑창이 닳지 않도록 살금살금 내딛기까지 했다. 이 처절한 일상을 견딜 수 있게 해준 유일한 꿈은 바로 새 외투에 대한 달콤한 상상이었다. 그는 미래의 외투를 머릿속에서 그려보며 정신적인 포만감을 느끼곤 했다. 그 이상적인 외투만 있다면, 그의 존재는 보다 완전해질 것 같고, 마치 결혼이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설레기도 했으며, 든든한 반려자와 여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것 같은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 반려자란 다름 아닌 ‘새 외투’였다.
드디어 새 외투가 완성되고 잔금을 다 치르던 날, 아까끼는 생애 최고의 행복을 맛본다. 그 옷은 그가 가져본 가장 좋은 옷이었으며, 상상 이상으로 멋진 옷이었던 것이다. 또한 자신의 모든 노력을 기울여 어렵게 얻은 외투였기에 기쁨은 남달랐다. 그에게 외투는 단지 ‘새 물건’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바꿔줄 결정적인 계기였던 것이다. 그는 일부러 다 떨어진 헌 외투를 다시 꺼내 새 외투와 비교해본다. 일종의 구매확인행위인 셈이다. 정말 잘 샀어. 이보다 더 멋진 외투는 없을 거야. 나에게는 이 옷이 왕의 망토보다도 훌륭한 옷이지. 오로지 문서를 정서하는 일에서만 무한한 만족감을 느끼며 살아온 그는 처음으로 낯설고 이질적인 만족감에 가슴이 쿵쾅거린다.

동료들도 아까끼의 새 외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들의 기억 속 아까끼는 항상 낡은 외투를 걸친 초라한 단벌신사였던 것이다. 처음으로 멀끔하고 훤칠한 아까끼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잔치라도 해야겠다’며 아까끼의 새 옷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아까끼는 어리둥절하지만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최초의 관심과 호감의 시선을 마음껏 즐긴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파티에 초대받은 셈이다. 파티에 초대받은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갈 일이 없었던 부자동네에 방문하게 된다. 그는 자기 것보다 훨씬 화려한 외투들이 잔뜩 걸려 있는 옷걸이를 바라본다. 파티에 모인 사람들이 우루루 달려 나와 그의 외투를 한 번 보기 위해 모여든다. 지난 십여 년간 한 번도 외투를 산 적이 없는 그의 새 외투는 모두의 구경거리가 된 것이다. 외투는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향한 뜻밖의 입장권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카드놀이를 하고 술과 음식을 즐기며 애초에 그를 초대한 일 따위는 잊어버린 채 신나게 놀이에 열중한다. 새 외투의 관객동원력은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그는 가슴 아프게도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새 외투를 보물 다루듯 소중하게 고이 떨쳐입고 거리로 나왔지만 뜻밖의 불행을 만난다. 괴한이 나타나 그를 위협하며 외투를 훔쳐 가버린 것이다. 그 아름다운 외투가 선물한 최고의 행복은 최고의 끔찍한 불행으로 뒤바뀌어버리고 만다. 그것도 단 하루만에.
이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외투를 잃어버린 후에 그가 겪어야 했던 세상의 차가운 냉대다. 그는 잃어버린 외투를 되찾기 위해 관공서에 찾아가 수소문을 해보지만, 냉혹한 고위 관료의 문전박대를 당하고는 시름시름 앓아눕는다. ‘각하’라고 불리는 이 관료는 민중의 아픔 따위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지위만을 과시하려는 권력층의 대변자였던 것이다. 아까끼는 이 관료의 반응에 절망하여 마지막 희망을 놓아버리고 만다. 누구도 자신의 기막힌 사연을 들어주지 않았고, 하소연할 곳도 없었던 것이다. 외투는 그저 ‘값나가는 사물’이 아니라 그의 남은 인생이 걸린 유일한 동반자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심한 고열에 시달리며 앓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헛것을 보며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다. 그는 재봉사에게 ‘도둑 잡는 덫이 달린 외투’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하기도 했고, 침대 밑에 도둑들이 우글거리는 환상을 보며 괴로워하고, 담요 밑에 숨어 있는 도둑을 끌어내달라고 애원하기도 한다. 새 외투가 있는데 왜 헌 외투가 눈앞에 걸려 있냐고 묻기도 한다. 그렇게 처참하게 병을 앓다가 죽은 아까끼는 마침내 유령이 되어 이 무정한 도시에 출몰한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적 없는 한 성실한 소시민을 향한 세상의 냉대와 폭력. 그 차가운 세상을 향한 보이지 않는 분노는 그렇게 ‘사라진 외투’의 유령을 통해 부활한다.

뻬쩨르부르그 전역에 갑자기 퍼진 소문에 따르면, 깔린낀 다리에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까지 밤마다 관리의 모습을 한 유령이 나타나 강도당한 외투를 찾아다니다가 외투만 보면 관등이고 계급이고 가리지 않고 죄다 벗겨 빼앗아간다는 것이었다. 고양이 털, 비버 털, 솜, 너구리 털, 여우 털, 곰 털로 된 것 할 것 없이 몸에 두르도록 만들어진 것이면 털이든 가죽이든 죄다 벗겨 가버린다는 것이었다. (…) 사방에서 9급 문관뿐만 아니라 3급 문관까지도 관등의 고하를 막론하고 신종 외투 강도로 등과 어깨가 감기에 걸릴 정도로 꽁꽁 얼어붙을 지경이라는 불평이 계속 쏟아졌다.
- 고골리, 박종소 옮김, 「외투」, 『무도회가 끝난 뒤』, 창비, 2012, 65쪽.

3.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 운명을 바꾸는 옷
옷 한 벌이 운명을 바꾸는 힘을 지닐 수도 있다는 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왕자와 거지>다. 거지들의 소굴에서 자라난 소년 톰 캔티는 어릴 때부터 얼굴도 모르는 왕자의 삶을 동경했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면 한없이 우울하다가도, 궁궐에서 호화롭게 살고 있는 왕자의 삶을 상상하면 잠시나마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헌신적인 어머니와 방탕한 아버지 사이에서 힘겹게 자란 톰은 잠들 때마다 ‘왕자의 꿈’을 꾸며 우울한 심사를 달랜다. 그러던 어느 날 호기심에 못 이겨 천신만고 끝에 궁궐을 찾은 거지 소년 톰은 궁궐 문지기들에게 문전박대를 당한다. 그는 궁에 들어간다는 것은 꿈도 못 꾸고 단지 엿보기만 했을 뿐인데, 온갖 욕설과 구타를 당하며 쫓겨나게 된 것이다. 마침 산책 중이던 왕자는 거지 소년의 비참한 정경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방으로 들인다. 거지 소년 톰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주며 왕자는 궁궐 밖의 삶에 대한 호기심을 불태운다. 톰의 뛰어난 이야기 솜씨와 재미있는 말투에 왕자는 깔깔 웃으며 자신의 소원을 고백한다. “아, 그만. 참을 수가 없구나!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네 옷을 입고 나가 신발을 벗어던지고, 잔소리할 사람 없는 데서 실컷 진흙탕을 뒹굴 수만 있다면, 왕이 못 되어도 좋겠다!”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털어놓는 왕자의 모습에 반한 톰도 오랫동안 품어 온 자신의 소원을 고백한다. 한 번만이라도 왕자님의 옷을 입어본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거지 소년의 맹렬한 동경과 왕자의 순수한 호기심이 만나 일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잠시 후 왕자는 톰의 너덜대는 옷을 걸쳤고, 거지 톰은 호화로운 왕자 옷으로 바꿔 입었다. 두 사람은 거울 앞으로 걸어가 나란히 섰다. 정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옷을 바꿔 입은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차림새는 기가 막히게 자연스러웠다. 두 왕자는 서로 쳐다보다가 거울을 바라보고, 다시 서로 마주보았다. 어안이 벙벙해진 진짜 왕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너는 나하고 똑같은 머리카락, 똑같은 눈, 똑같은 목소리와 몸짓, 똑같은 체구와 키, 똑같은 얼굴선과 이목구비를 가졌구나. 내가 장담하는데 둘 다 발가벗고 있으면 누가 너고 누가 나인지 구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금 네 옷을 걸치고 있자니, 아까 못된 병사한테 당했을 때 네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는구나. 이런! 네 손에 멍이 든 게 아니냐?”
- 마크 트웨인, 「왕자와 거지」 중에서

거지 소년의 옷을 입은 왕자는 그제야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톰이 당한 온갖 수모를 조금이나마 이해한다. 그저 궁궐을 살짝 엿봤을 뿐인데 온갖 욕설과 구타를 당하며 수모를 당한 톰의 아픔이, 그의 옷을 통해 전해져온 것일까.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다’라는 영어 표현 중에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다put A in B's shoes’라는 표현이 있다. B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A는 B의 신발을 신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의 옷을 바꿔 입음으로써 전혀 다르게 살아온 상대방의 삶을 조금씩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시작하는 순간. 시종들이 밀어닥쳐 가짜 왕자를 진짜 왕자로 오인하고, 진짜 왕자를 거지 소년으로 착각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진짜 왕자는 거지로 오인 받아 순식간에 궁궐 밖으로 쫓겨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진짜 왕자에게는 천신만고의 모험이 시작되고, 가짜 왕자에게는 위험천만한 궁궐 적응기가 시작된다. 처음으로 무서운 배고픔과 추위와 외로움을 느껴본 왕자는 자신의 장난스런 소원의 고백이 얼마나 큰 위험을 대가로 하는 것인지를 깨닫는다. 일거수일투족을 궁궐 사람들에게 감시당하게 된 왕자는 언제 정체가 탄로 날지 몰라 마음 졸이게 된다. 그러나 왕자의 자리에 적응하는 것이 거지의 상황에 적응하기보다 훨씬 쉬워 보이기는 한다. 왕이 된 거지는 나날이 왕다워지지만 거지가 된 왕자는 나날이 거지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왕자의 의상은 거지 소년에게마저 뛰어난 권능을 발휘해, 왕이 죽자 마침내 그는 왕의 자리까지 넘볼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왕자를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점점 화려하고 우아한 삶에 길들여진 톰 캔티는 진심으로 ‘왕의 자리’를 넘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톰은 화려한 옷이라고 해서 편안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외워야 할 지식과 정보가 너무 많아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지만 정 붙일 만한 곳은 전혀 없어 궁궐이 감옥 같다고도 느낀다. 그는 축제 분위기에 둘러싸인 영국 왕의 즉위식에서 아직도 변함없이 초라한 거지의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야윈 얼굴을 발견한다. 엄마는 비밀스럽게 왕의 행세를 하는 아들의 얼굴을 알아보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가 왕이든 거지든 그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저 ‘어리고 가여운 내 새끼’로 봐주는 어머니의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보면서 톰은 비로소 깨닫는다. 거짓으로 얻은 왕 자리의 허망함을. ‘왕의 옷’을 입는다고 해서 왕이 될 수는 없음을. 그는 책임이나 통치와 같은 왕의 본질을 동경한 것이 아니라 왕이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동경한 것이다. 한편 진짜 왕자 또한 그 동안의 수많은 고생을 겪으며 거지가 되어보지 않았다면 결코 볼 수 없었던 세상을 경험함으로써 더욱 백성을 사랑할 줄 아는 통치자로 거듭난다.

톰의 위기는 그가 옥좌의 화려한 생활에 익숙해져 국왕 자리에 스리슬쩍 눌러앉고 싶어 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한때는 거지로 전락해버린 왕자를 향해 연민을 느꼈지만, 이제 그가 나타난다면 ‘유령처럼 무서운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톰. 만약 가족들로 인해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면 가족들이 얼마나 ‘귀찮은 존재’가 될지를 생각하며 가족마저 마음속에서 지워버리는 순간. 그의 진정한 타락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아들의 옷’을 입은 왕자가 ‘내 아들’이 아님을 알아보았고, 왕의 옷을 입고 있지만 실은 거지인 자기 아들의 진면목을 알아보았다. 거지든 왕자든 상관없이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꾸밈없는 동물적 사랑이 권력의 달콤함에 길들여진 아들의 마비된 영혼을 일깨운 것이다. 우리는 ‘옷’이 바뀜으로써 운명조차 뒤바뀐 두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권력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거지왕자는 옥새의 상징을 이해하지 못해 옥새를 ‘호두까기 도구’로 쓴다. 옷이나 옥새 같은 사물에 묻어 있는 권력의 낌새를 이해하지 못하는 톰의 모습은 무지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권력에 때 묻지 않은 그의 순수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물에 스며있는 권력의 상징은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으니까. 옷으로 권력이나 욕망을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눈부신 특권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