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 레닌, 혁명 이미지의 기원
“노농勞農을 위하야 거인巨人을 장葬하라!”(『동아일보』, 1923.12.7)라는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식민지 조선에서 근대적인 혁명 이미지의 탄생은 ‘현대의 거인’으로 명명된 레닌의 죽음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의 물결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도 거센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무산계급의 수령首領”으로 알려진 레닌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예외적일 수 없었다. 『동아일보』는 1921년 6월 3일부터 8월 31일까지 무려 61회에 걸쳐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표제 하에 혁명가로서의 일생과 활동, 그리고 볼셰비키 혁명정부의 특성 등을 연재한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 유입된 사회주의 사상은 근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이념적 무기로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신문과 서적 등 근대 인쇄매체의 발달이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앤더슨의 지적처럼 매스미디어는 지속적으로 모든 국민에게 공통적인 문화를 공급해 줌으로써 동질화·표준화된 문화정체성을 형성해왔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1920년대 초반 조선 민중이 대중 매체를 통해 자주 접할 수 있었던 레닌에 대한 정보는 그의 병세가 악화되던 시기와 맞물리면서 혁명가적 면모보다 용태에 대한 것이 더 지배적이었다. 게다가 연일 보도되던 레닌의 병세 악화는 ‘사거설死去說’이란 정체불명의 스캔들로 이어지고 있었다.

알려져 있듯이, 레닌은 1924년 1월 21일에 죽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 레닌의 죽음은 그의 죽음 이전에 이미 풍문으로 떠돌았으며, 정작 그가 사망했을 때는 실제 사망일보다 더 이후에야 조선민중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반복적으로 유포되었던 ‘레닌 사거설’의 영향에 있었다. 레닌의 생사에 대해 “확실한 측側의 조사를 종합하면 씨는 수개월 전前 기旣히 사거死去하얏스나 시是를 발표發表하면 내외內外에 심대甚大한 영향이 유有할터임으로 극비極秘에 부附한 것이라는 설設이 유有하더라”(「레닌씨 사거설死去說」, 『동아일보』 1923. 12. 6)라는 식과 “누누屢屢히 사거설死去說이 전파되도록 병세가 위독하야……레닌씨는 일시는 절망적 상태에 함아얏섯스나 기간 명의의 진찰로 병인이 판명되야 적당히 치료한 결과 건강이 점차 회복되는 중이라더라”(「레닌 사거설死去說은 필경畢竟 와전訛傳」, 『동아일보』 1923. 12. 14)라는 식의 반목 과정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레닌 사거설의 경합을 관전하는 당대 한 지식인의 시선은 주목을 요한다. “1917년 혁명으로 신천신지新天新地의 대혁명을 연출”한 레닌은 실로 현대의 거인이라 칭할 수 있지만 “레닌은 노농정부의 전부가 아니다. 피彼를 우상시하는 노서아민중의 일대미몽이 일후日後 끄칠 때가 잇슬 것이다. 레닌이 죽거니 말거니 노농의 본색은 조금도 손감損減이 업슬것이요 또 없서야만 된다. 도로혀 노농勞農의 기초가 정正말 튼튼하랴면 모든 거인을 장葬하여야할지 모른다. 레닌 사거설死去說의 진가眞假도 확실치 못한 금일이어니와 노농을 위하야 레닌의 희생을 바라는 것도 한 관찰이다.”(「레닌 사거설死去說에 대하야」, 『동아일보』 1923. 12. 7) 그는 레닌이 혁명정부의 전부가 아니고 마르크스 진리의 편린으로 기능하기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한 달 후, 레닌은 죽음을 맞이하였다.

레닌이 사망한 나흘 뒤, 그의 죽음을 재현한 만화와 영국노동당 대표 맥도날드가 내각을 수립하게 된 소식이 『동아일보』 일면에 함께 게재됐다. 이 기사는 레닌 집정 이래로 수차례 불거졌던 ‘사거설’을 레닌이 다른 여타 집단의 정치적 모략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부활하는 것으로 의미화하고 있다. 그리고 맥도날드 내각의 출현과 레닌의 사망에 사상적인 인계성을 부여한다. 우연치 않게도 맥도날드가 내각을 조직하도록 결정된 다음날 레닌이 서거했기 때문에 이 인계성은 더욱 그럴듯해 보였다. 또한 전 인류적 혁명의 발론자요, 지도자인 레닌의 혁명은 “아직 시초다. 세계는 인민의 상태를 따라 혹은 노서아식으로 혹은 영국식으로 조만간 이것을 완성하고야말 것이다. 이 의미로 보건댄 레닌은 사死하여도 주의主義는 사死하지아니한다 할 것이다”(「영국노동당내각의 출현과 레닌씨氏의 사死」, 『동아일보』 1924. 1. 25)라는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죽은 레닌은 ‘공산주의 유령’으로 부활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레닌의 죽음은 혁명의 종언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 세계 무산계급을 결합시켜 투쟁하도록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사실, 『동아일보』에 실린 만화 이미지는 레닌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한다기보다, 혁명의 아이콘icon으로 끊임없이 부활할 레닌을 예고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레닌의 죽음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가.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살펴보면, 청년회 사무실에 걸려 있던 레닌의 사진은 압수됐고, 매년 각 단체에서 성대히 기획된 레닌의 추도식은 경찰력에 의해 전면 금지 당했다. 러시아 방면에서 조선에 들어오며 가져왔던 레닌의 사진을 자기 방 벽에 걸어두었다가 마침 ‘아편’ 류의 약품조사를 나온 경찰에게 압수당했던 어느 지식인의 에피소드(「‘레닌’사진 압수, 숭배한다는 트집으로」, 『조선일보』 1924. 12. 15)에서 볼 수 있듯이 전 세계 무산자계급에게 ‘혁명’의 이콘으로 자리 잡은 레닌의 이미지가 당국에게는 아편과 같이 대중을 유혹하고 환상에 빠트리는 위협적이고 불온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권력의 도상학 연구에 있어서, 레닌의 주검처리 방식은 우상화된 지도자의 두 신체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스탈린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제일 먼저 레닌의 우상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붉은 광장에 거대한 영묘를 만들어 레닌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고 민중에게 지도자의 ‘썩지 않는 몸’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은 레닌의 주검 처리 방식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이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적로赤露 민중의 ‘레닌’에 대한 숭배열은 종교신자의 신에 대한 것보다도 오히려 강한 것이 잇스니 ‘레닌’의 유해遺骸는 특별보존방법을 강구講究하야 내장內臟과 기타 신체 각부各部는 의학상의 참고자료로 해부에 부치기로 하야 이미 일대一代의 풍운아 ‘레닌’의 뇌腦는 정밀한 연구를 하얏는데 다시 씨의 뇌를 삼만일천조각으로 분할하야 가지고 진공된 초자기硝子器에 너허서 금월 삼일부터 로서아 각지 공공건물안에 안치하고 일반에게 관람케한다는 기발奇拔한 소식이 최근 모처某處에 도착하얏다”(「레닌 뇌腦 분할分割」, 『조선일보』 1928. 3. 11)는 기사나 미국 자유 여신상을 능가하는 세계 제일의 레닌 동상 건립에 대한 자부심(「세계일世界一인 레닌의 동상이 건설된다고」, 『조선일보』 1932. 2. 5), 그리고 레닌 서거 후 10년이 경과한 뒤에도 “‘레닌’의 유해는 임종당시와 조곰도 변함이 업고 안면의 표정이나 피부의 색도 훌륭히 보존되야 잇다. 미상未詳하나 금후에도 상당히 오래 동안 원형을 보존하리라고 한다”(「레닌 유해遺骸는 변치 안는다고」, 『조선일보』 1934. 5. 9)라는 시체 방부처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적극적인 관심은 “위대한 무산자無産者, ‘레닌’의 묘반墓畔”과 신체에 이뤄진 장식을 “노동자의 성화聖化”(「횡설수설」, 『동아일보』 1924. 5. 13)와 같은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레닌을 이콘화하는 과정은 곧 혁명 그 자체를 이콘화하는 작업과 동일시되었다.
고대 고분 벽화와 장례의식 등에서 이미지의 기원을 찾고 있는 레지스 드브레(Regis Debray)는 “시체는 곧 실질적인 것으로, 애도 작업의 일차적 재료”였다고 주장한다. 이때 “시체가 작품으로 간주되는 것”(정진국 역, 『이미지의 삶과 죽음』, 시각과 언어, 1994, 29쪽)이다. 그리고 지젝은 우리가 관속의 레닌을 반복해서 불러내는 것은 레닌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죽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의 특별한 해법이 실패했다는, 그것도 엄청나게 실패했다는 것과, 하지만 그 안에 여전히 구해낼 만한 유토피아적인 불꽃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레닌 재장전』, 마티, 2010)

혁명의 상속: 계몽과 혁명 사이
식민지 시기 혁명의 이미지는 어떻게 명맥을 이어갔을까. 이제는 보편화된 상식일지 모르나, 민족적·계급적 정체성을 부여받은 소년과 청년은 혁명의 주체로 자주 호출되어왔다. 1920년대의 급진적이었던 야학운동이 일본제국 권력의 탄압에 의해 지하화되는 상황 속에서 민족교육운동의 일환으로 실천되었던 ‘브나로드운동’은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지식계급)들이 농민노동자의 세계로 들어가서 몸소 체험하고 지도하던 운동의 성격을 표방하는 ‘민중에게로’라는 슬로건을 차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초반 동아일보, 조선일보사가 추진한 농촌계몽운동은 민족주의 우파의 타협적 개량주의 운동으로, 그러한 한계 내에서도 민중 교육의 기회를 확대한 민족교육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동아일보사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매년 여름 ‘하계 학생 브나로드운동’을 주최하였다. 중등학교 이상 학생들의 주체적 참여를 요구했던 동아일보사는 모집 광고를 통해 지식계급의 민족계몽의식을 자극하며 학생대중을 동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배우자! 가르키자! 다함께 브나로드”라는 표어가 담긴 포스터를 제작·배부하고, 한글공부와 일용계수법日用計數法에 관련된 두 가지 종류의 교본을 제작하여 전 조선 각지에 배부하여 학생계몽대의 교과서로 활용하는 등 운동지원에 적극적이었다. 따라서 연일 각지에서 전해오는 ‘계몽대소식’과 계몽운동활동화보들, 농촌학생들의 기념촬영사진이 신문에 게재되면서 동아일보사의 과업달성을 시각화하였다. 

동아일보사는 <브나로드운동 포스터>를 다양하게 제작하지 않고 동일한 포스터를 반복적으로 게재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1932년대에 제작된 포스터는 브나로드운동의 표어를 게시판에 붙이는 학생과 이를 올려다보고 있는 민중들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이 포스터에서 학생과 민중들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함께 실천해야 할 운동의 목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1933년대의 포스터는 이전 포스터에서 뒤돌아 서있던 학생이 정면을 주시하고 있다. 게다가 학생 아래 계몽되어야 할 민중은 그림자로 처리되면서 표어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포스터는 수직적인 관계를 통해 계몽의 관계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학생의 손가락 지시를 통해 민중을 대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의 문맹을 퇴치하여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자는 브나로드운동은 조선 지식인이 민중을 타자로 설정하는 가운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아일보사나 조선일보사의 농촌계몽운동은 경찰의 규제와 감시를 받는 수가 자주 있었다. “브나로드대원 제군諸君에게 신신 간청할 것은 첫재로 이 사업이 민중에 대하여서는 ‘글과 셈’의 계몽운동인 동시에 대원자체에 대하야서는 민족봉사의 실천적 자체훈련의 일공과一工課인 것을 자각하야 이 일사쌍목적一事雙目的의 실현을 위하야 성력誠力을 다하시기를 바라고, 둘재로는 오즉 ‘글과 셈’에 한하고 이에 탈선되는 언동을 절대로 근신하야 브나로드 운동 자체의 안전을 해함이 없게 하시기를 바라”(「브나로드운동대를 보내며」, 『동아일보』 1932. 7. 18)는 기사내용은 동아일보사 측의 의도와 달리 학생들의 계몽운동이 변화되고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한 계급투쟁으로서의 예술을 표방했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은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등장한 문예운동단체였다. 대중 프로파간다는 정치적 교육의 책임 속에서 시각적 예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시각적 방법은 문맹한 수준의 사람들에게 설득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20~30년대의 시각적 프로파간다는 더욱 강렬해졌다. 계급주의 아동문학의 성립은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의 흐름과 함께 전개되었다. 

식민지 시기 어린이날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식민권력의 자장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 명맥을 유지했다. 1922년 ‘천도교소년회’에서는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후로, 어린이날을 언제로 제정하는가의 문제는 지속적인 분열을 낳았다. ‘조선소년총연맹’에서는 5월 1일이 ‘메이데이’와 겹쳐진다는 이유로 날짜를 변경하였다. 따라서 소년운동의 일환이었던 어린이날은 5월 첫 일요일로 정해지면서 소년 ‘메이데이’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제 어린이날은 조선소년이 노동력 착취에서 탈피하려는, 즉 비로소 계급적 인식에 눈을 뜬 해방의 날을 의미했다. 당시 어린이날 기념행사 가운데 시내를 활보하며 펼쳐졌던 어린이들의 ‘기행렬’은 혁명의 세력을 시각화하면서 어린이를 소년대중이라는 운동의 주체로 이끌어내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했다. 

당국의 검열로 끊임없이 삭제를 경험했던 어린이잡지 『신소년』의 1934년 표지화는 무산계급 소년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재현하고 있다. 1934년 4월호 표지화에서 작업복을 걸친 채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소년들의 손에 노동의 도구인 ‘해머’와 ‘낫’이 쥐어져 있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소년들이 두 손을 번쩍 들고 외치는 이미지는 다음호인 5월호에서 클로즈업되어 재현된다. 이같이 분노하는 무산계급소년의 이미지는 당시의 생활전선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식민지 조선의 어린이들에게 충분히 선동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이 같은 아동잡지를 통해 교육 받는 내용들 가운데는 “불경긔로 인하야 전세계에 실업자는 홍수가치 쏘다져서 삼천만이란 놀라운 숫자를 계산하게 되엿스니 이들은 모다 우리가치 헐벗고 굶주리는 불상한 아저씨 누나들”(현동염, 「불경기不景氣이약이」, 『신소년』 10권 7호, 1932. 8)이라는 계급적 이해로 나아가는 것들이 편성되어 있었다.  

이미지의 혁명성, 그 믿음에 대하여
식민지 당시 카프가 예술운동과 정치운동 사이에서 갈등하며 겪었던 방향전환의 도정은 비단 그 시기에만 해당되는 사정이 아니다. 예술은 부패한 정치에 대항하거나 위대한 정치를 실현하는 혁명의 원동력이 되는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술이 정치 선전의 도구로 전락하는 때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근대사에 있어서 카프 해산 이후 급진적이었던 프롤레타리아 예술 이념과 운동은 소진되고 말았으며, 파시즘의 탄압에 의해 창작된 예술작품들은 총력전 체제에 부응하는 프로파간다를 구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 이미지 자체가 지닌 혁명성을 말하고 싶다. 존 버거John Berger는 “그림이 우리에게 움직여 다가온다”(존 버거, 『이미지?시각과 미디어-』, 동문선, 2005, 33쪽)고 말한다. 분명, 예술가가 지녔을 욕망의 표현이거나 보는 자의 욕망을 이끌어내는 이미지는 살아 움직일 뿐 아니라 다형적이다. 하나의 상황에서도 각자의 이해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공존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의 예술작품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의미의 장을 확보하고 있다.

『권력의 도상학: 식민지 시기 파시즘과 시각 문화』(소명, 2013)에서 이미 밝혔지만, 일제말기 지원병을 소재로 한 그림 가운데 대부분 병사의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지 않다. 어떤 이데올로기적 의미부여 없이 그들의 시선은 정면을 마주하기 어렵다. 따라서 병사가 정면을 응시할 수 있는 것은 ‘군신軍神’으로 신격화되었을 때뿐이다. 이미 죽어 돌아와야 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전쟁에 임해야 했던 그들은 죽어 사진이나 그림에 갇혀 있을 때만이 정면을 주시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사진이나 그림 속 죽은 병사를 둘러싸는 관람자들의 시선이 그를 신성시하며 바라보는 그 순간에만 그들은 정면을 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군인의 시선이 사자화死者化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란 어떤 것일까.

1942년 『조광』 10권 8호의 표지화를 보면, 군장한 병사가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목탄으로 스케치된 이 그림에서 수면 위에 비친 병사의 표정이 실재 병사의 것과 일치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검게 명암 처리된 수면 위 병사의 모호한 표정은 이 그림의 ‘얼룩’이자 ‘실재’ 같은 것이다. 물론 하나의 이미지에서 다양한 의미가 생산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산주검undead으로 존재하는 식민지 조선의 병사가 대면해야 했을 자신의 시선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혹시 혁명을 간절히 꿈꾸는 내부의 욕망이 투사되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미지는 이렇게 관람자에게 ‘유토피아적 불꽃’을 꿈꾸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