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비슷비슷하던 조폭코미디 영화가 범람하던 시기에 한 편의 독창적이면서 기발한 발상이 눈에 띄는 영화 한 편이 충무로에 충격을 주었다. 장준환 감독의 데뷔작이자 한국에서는 극히 보기 힘든 SF판타지납치소동극인 <지구를 지켜라!>는 외계인의 음모로부터  지구를 지키려는 병구(신하균)와 외계인으로 지목 당한 강 사장(백윤식)의 목숨을 건 진실 대결을 다룬 영화다. 진지하지만 웃음이 피식피식 흘러나오게 만든 이 영화는 영화 평론계와 마니아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특히 강 사장을 납치해 물파스로 고문하는 장면은 그 해 가장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장면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리고 장준환 감독은 이 작품으로 그 해 각종 신인 감독상을 수상함은 물론,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받으며 세계 일주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장준환 감독은 <지구를 지켜라!> 이후 지난 10년 동안 두 번째 영화를 내놓지 못했다. 물론 쉬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계속 기획을 했지만 제작에 들어가기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10월 9일 장준환 감독의 두 번째 영화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이하 <화이>)가 관객과 만났다. 모두의 기대를 모았던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이니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는 지하실의 한 아이에게 괴물이 달려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아이는 화이(여진구 분)고, 그가 성장하면서 직면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바로 그 괴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범죄 영화가 아니고 한 인물의 내적 갈등을 다룬 심상치 않은 드라마라는 점도 암시한다.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한 영화는 언뜻 보기엔 일반 케이퍼 무비Caper movie, 범죄자들이 무언가를 강탈 또는 절도 행위를 하는 모습과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는 영화의 공식을 따른다. 1998년 봄, 각기 다른 장기를 가진 다섯 명의 범죄자들은 범죄를 모의한다. 일반적인 상업영화라면 치밀하고 상세하게 범죄 장면을 보여줬을 텐데, <화이>는 약간은 어설픈 범죄 장면에 이어 2012년 겨울로 돌아와 미스터리 드라마의 색깔을 덧입힌다. 이제부터 1998년 범죄 당시 납치한 소년 화이와 다섯 범죄자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그려진다.

화이는 학교를 다니고 있지 않지만 무엇 때문인지 교복을 입고 다닌다. 어느 날 만난 소녀에게서 첫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화이는 범죄자 아버지들로부터 범죄 기술을 전수받아 사격에 재능을 보이는 반면 미술에도 재능을 보여 범죄자 아버지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자 한다. 그렇다고 지난 14년간 익혀온 범죄자의 생리를 벗어날 수 없다. 부드러운 얼굴이지만 나무에 붙어 있는 벌레를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은 화이에게 내재된 또 다른 면을 암시한다.

성장한 화이의 현재 모습을 보여준 장준환 감독은 자신이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내놓기 시작한다. 석태(김윤석 분) 일당은 자신들과 한 통속인 형사로부터 한 가지 사건을 의뢰받는데, 이들이 제거해야 할 대상이 화이와 관계가 있다. 석태는 화이에게 이 사건의 현장에 데려가 직접 방아쇠를 당기게 한다. 이들이 제거해야 할 대상은 화이의 친부모였고, 화이의 친아버지는 과거에 석태와 좋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 석태 일당은 모두 화이의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고아원의 원생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친아버지는 죽고, 친어머니는 병실로 실려 간다.
화이와 석태, 그리고 친부모와의 미스터리가 조금씩 풀려가며 영화는 단숨에 액션 드라마로 장르를 전환시킨다. 진실을 알게 된 화이는 친아버지의 복수와 친어머니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범죄자 아버지들을 차례로 살해하며 점점 인간에서 괴물로 변해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석태와 마주한 화이는 인간과 괴물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석태는 화이에게 “괴물이 돼야 괴물이 사라지는 거야”라고 말한다. 과연 마지막에 화이는 괴물이었을까, 아니면 인간이었을까?

자신의 독특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화이>에서 장준환 감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존재하는 괴물의 존재와 그 괴물이 만들어내는 과정을 아주 끔찍한 인간관계 속에서 보여준다.
우선 화이의 친아버지와 석태의 관계는 마치 형, 동생이 뒤바뀐 카인과 아벨의 관계 같기도 하다. 석태는 아주 못된 짓을 저지르지만 아버지의 부재가 준 트라우마는 스스로를 괴물로 만들어냈고, 결국 아이를 납치해 인간에게 내재된 괴물을 발현시키고, 완성시키려 한다. 반면 선한 인물 화이는 그에 맞서며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인간 의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화이는 자신도 모르게 존속살해를 한다. 석태는 화이에게 인간으로써 가장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함으로써 괴물에게 더 다가가게 만든다. 만일 화이가 친부모의 존재를 몰랐다면 석태의 계획은 이뤄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핏줄은 속이지 못한다.
화이는 다섯 범죄자 아버지에 대해 분노·복수심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길러준 부정父情 사이에서 갈등하며 괴물이 되어가야 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화이가 지난 14년 간 어떻게 자라왔는지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그가 느끼는 부정의 실체를 느끼기 힘들다. 겉으로는 친한 것 같아도 화이가 다섯 범죄자에게 부르는 ‘아버지’라는 호칭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영혼 없는’ 것처럼 들린다. 그래서 마지막에 화이가 석태에게 총구를 겨눌 때 느끼는 갈등이 크게 와 닿지 않는다.

많은 감독들은 관객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키고,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게 생략과 비약을 하거나 끝맺음을 열린 구조로 만들곤 한다. 단서나 복선을 통해 미뤄 짐작을 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 진행이나 구조는 영화를 세련되어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장치가 지나치면 물음표가 가득한 공감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
<화이>가 그런 식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했던 화이의 성장 과정이나 석태가 고아원 시절 어떤 연유로 괴물이 되기 시작했는지가 궁금해진다. 또한 고아원에서 석태가 저지른 못된 짓 때문에 화이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해 설왕설래할 수 있고, 다섯 범죄자와 함께 사는 영주(임지은 분)의 존재는 무엇이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아마 이런 것들을 다 이해하려면 적어도 2번 이상 영화를 보며 힌트로 제공되는 슬쩍 지나치는 단체 사진이나 대사에 담긴 행간의 뜻을 파악해야 할 듯하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장준환 감독 특유의 기발함과 유머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구를 지켜라!>에서 보여준 기발한 영화적 아이디어와 유머 코드를 좋아했다. <화이>의 경우 주제가 무겁다보니 중간 중간 관객들의 긴장을 이완시켜주는 유머가 섞였으면 좋지 않았을까 한다.
김윤석의 캐스팅도 한번 생각해볼 점이다. 카리스마 있는 연기로 정평이 있는 김윤석은 지난해 <도둑들>에서 범죄자들의 리더 역을 맡아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영화의 정서와 인물의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이번 <화이>에서도 역시 범죄자의 리더 역할이다. 무뚝뚝하게 툭툭 던지는 말투는 두 영화에서 강도의 세기 차이는 있지만 비슷하다. 물론 전체 드라마의 중심을 든든하게 잡아주는 무게감은 여전히 묵직하지만 말이다.
반면 여진구의 연기는 기대에 부응한다. 1997년생이기 때문에 내재된 괴물의 본성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김윤석을 비롯한 쟁쟁한 선배들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았을 터다. 하지만 여진구는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숨겨졌던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는 장면이나 마지막에 김윤석과 맞대결하는 장면의 얼굴은 그 나이 또래의 배우가 표현하기 힘든 연기를 보여준다. 또한 어려운 액션 신도 훌륭하게 소화해 나이가 들수록 더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활약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앞서 지적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10년 만에 신작을 내놓은 장준환 감독이 건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반갑다. 아쉬움은 기대치가 워낙에 높았던 것에 따른 반대급부다. <화이>는 무게감 있는 주제와 꼼꼼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플롯, 범죄 드라마와 액션을 오가는 장르의 변주, 인간의 심리를 보여주는 앵글, 배우들의 연기 조합 등의 장점이 돋보인다. 장준환 감독이 다음 세 번째 영화에서는 훨씬 진화된 영화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큰 기대를 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