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공식개막작은 로제 비트락Roger Vitrac의 <빅토르 혹은 권좌의 아이들>이었다. 파리에 있는 떼아트르 드 라 빌Theatre de la Ville-Paris이 제작하고 연출은 엠마뉴엘 드마르씨-모타Emmaneuel Demarcy-Mota가 맡았다. 그러나 이 작품이 공연 전부터 국내 관객으로부터 주목받았던 이유는, 작가를 비롯해서 이 희곡과 관련된 인물들의 면면, 그로 인해 이 작품이 갖는 연극사적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로제 비트락은 앙토냉 아르토와 함께 1927년 알프레드 자리 극단을 창단했던 인물이다. 비트락의 이 희곡은 1929년 아르토에 의해 초연되었고, 1969년에는 장 아누이가 다시 리바이벌했다. 그런 점에서 이 희곡의 주변에는 알프레드 자리, 아르토, 잔혹 연극, 초현실주의, 다다 등, 모름지기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연극을 대표하는 혁신의 흔적들이 모여 있다.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연극 관습을 허물고 새로운 연극, 새로운 실험을 주창했던 당시의 생각들이 이후 현대연극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르토와 함께 자리의 공식적인 후계자임을 선언했던 사람답게, 비트락은 세계를 더 이상 하나의 통합된 유기적 전체로 보기를 거부했다. 그때까지 서구 정신사를 지탱했던 합리주의의 이상이나 기독교적 가치는 한낱 허상에 불과했다. 아니 실재를 왜곡시키기까지 했다. 그래서 비트락은 자신의 시선을 더 이상 매끈해 보이는 현실의 표면 위가 아닌 그 이면을 향해 깊숙이 겨누었고, 그로부터 끔찍한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한 모순 덩어리인 현실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들춰냈다. 그런 점에서 <빅토르 혹은 권좌의 아이들>에서 세상을 향해 거침없는 냉소와 저주를 퍼붓는 어린 빅토르는 어찌 보면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아홉 살 빅토르의 악마성, 미친 세상을 조롱함  

주인공 빅토르. 아홉 살 생일을 맞은 그는 이미 키가 이미 180센티를 넘어버렸다.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한 마디로 광기 그 자체다. 자기보다 나이 많은 하녀에게 성적인 농담을 서슴지 않는가 하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값비싼 화병을 보란 듯이 박살내 깨버린다. 그리고는 하녀에게 누명을 씌워 성적인 요구를 하며 협박하고, 당황해 하는 하녀의 모습을 잔인하게 즐긴다. 하녀의 말대로 빅토르는 ‘아무 것도 존중하는 것이 없고’, ‘제대로 미쳐버렸다.’ 자신을 찾아온 에스테르와 어른들에 대한 은밀한 농담을 주고받던 중, 자기 아버지와 에스테르 엄마의 불륜을 알게 된다. 이후 생일 식탁을 앞에 두고 주변 인물들을 향해 빅토르는 한층 더 잔인하게 자신의 혀끝을 놀린다. 그 과정에서 당시 프랑스 사회를 지탱하던 모든 가치들의 본 모습이 폭로된다. 국가, 국가에 대한 애국심은 맹목적인 광기에 지나지 않고, 부르주아적 윤리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가족 또한 불륜과 배신, 속임수로 점철된 끔찍한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생일로 설정된 희곡의 시공간은 끔찍한 광기로 들끓는다. 오고가는 대화는 비틀어지고, 행동은 무절제하며, 감정은 제어할 수 없게 되어 극과 극을 오간다. 모든 논리적인 맥락은 파괴되고 이질적인 것들이 볼썽  사납게 충돌한다. 사실과 거짓이 뒤섞이고 현실과 꿈이 엉킨다. 이 과정에서 인물들은 점점 소란스럽고 속물적이며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이다 모르트마르트라는 여인이 느닷없이 나타나 끊임없이 독한 방귀를 뀌어댈 때, 무대는 광기와 부조리의 정점을 찍는다. 결국 어린 빅토르는 자기가 태어난 순간 다시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적 존재인 동시에 또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는 희생자이기도 하다. 또한 서구 사회가 낳은 기형아로서, 그 누구도 대면하기 싫은 거북한 타자다. 
 

80여 년의 시간차를 넘어선 리바이벌 - 원작에 대한 오마쥬 

엠마뉴엘 드마르씨-모타가 연출한 이번 서울 공연에서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무대다. 삼면으로 둘러싸인 거실 공간은 아래층과 위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장식 없는 모던한 거실의 공간을 채우는 붉은 색과 푸른 색 계열의 조명은 이 공간을 비현실적인 무중력 상태로 만든다. 무대 천장으로부터 바닥을 향해 거꾸로 매달려 있는 세 개의 커다란 나무들에서는 생명 같은 것은 없는 메마름과 함께 기괴스러움이 느껴진다. 빅토르가 이 층 공간으로 올라가 커다란 유리 화병을 높이 집어 들고 “다다의 알”이라며 아래쪽으로 던져버릴 때,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튀는 유리 파편은 그 자체로 더 없이 파괴적이다. 빅토르가 발산하는 폭력적이고 악마적인 존재감이기도 한 어떤 것이, 새로운 전환과 변혁을 요구하는 분노와 저주의 외침이기도 한 어떤 것이 극적으로 분출되는 장면이다. 천장에 매달린 나무들은 극이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바닥으로 낮게 내려앉는다. 이는 공연의 흐름에 따라 안쪽을 향해 서서히 밀려들어왔다 밀려나가는 삼면의 벽과 함께, 확장되고 비틀어지는 인물의 심리 상태를 공간에 시각적으로 투사시키는 역할을 한다. 조명의 각도와 채도에 따라 무대 벽에 투사되는 배우들의 커다란 그림자나 긴장을 자아내는 음향 또한 그렇다. 무대 앞쪽에 설치된 웅덩이의 물에서는 흔히 연상될 법한 생명이나 신선함, 정화 등의 느낌은 애초부터 없다. 빅토르와 에스테르가 자기 부모의 불륜 장면을 이야기할 때, 그리고 자신들의 불륜이 들통 난 당사자들이 서로에 대한 욕정을 발산할 때, 이들의 몸을 축축이 적시는 물의 질감은 오히려 음습하고 축축하며 추악하고 불쾌하다.
시각적인 무대 장치를 제외한다면, 그리고 인물들이 기괴한 느낌의 마스크를 쓰고 생일파티를 하는 장면이나 빅토르가 장군의 등에 올라 타 말놀이를 하는 장면, 앙투안의 발작이 폭발하는 장면 등 몇몇을 제외하면, 그 외 배우들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전체적 미장센은 소위 ‘정상적인’ 내지 ‘평범한’ 외양을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다. 대신 공연은 극적 상황의 부조리성을 대부분 ‘말’로부터 끌어내고자 했다. 예컨대 “단어를 수천 개로 잘라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작가에 대한 오마주인 듯, 공연은 원작의 몇몇 장면을 생략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조합될 수 없는 원작의  단어와 문장들을 그대로 가져와 채워 넣었다. 인물들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대사는 단순한 말놀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발화하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더 없이 잔혹한 폭력처럼 느껴진다.

비트락을 만난 즐거움, 비트락을 넘어서지 못한 아쉬움

문제는 불어에 낯선 한국 관객에게는 이 발화에 내재된 파괴적인 폭력성이 후반부로 갈수록 밋밋하게 사그라진다는 것이다(여기에는 장면과 맞지 않게 지극히 문학적인 투의 자막 번역도 일조했다). 공연이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 희곡의 언어는 해체적이고 비논리성의 극치를 보여주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언어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사전 정보들을 동시에 요구하는 언어다. 이런 식의 표현이 전제하고 있는 대상, 즉 언어적 관습을 비롯해서 문화적으로도 소위 그 ‘논리’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을 최소한 알고 있어야, 이것이 어떤 식으로 해체되고 공격당하면서, 어떻게 뜬금없는 맥락 속으로 들어가 조롱거리가 되는가를 지켜볼 수 있다. 따라서 언어적, 문화적 장벽을 넘지 못한 관객으로서는 정보를 내포한 말들을 발화하고 급하게 해체시켜버리는 휘발성 강한 이 공연 특유의 언어적 리듬을 따라가기가 버거울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 남다른 연극사적 의미를 안고 있는 비트락의 희곡을 서울의 한 극장에서 만난 것은 즐겁고 행복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21세기 한국사회의 관객들에게 얼마만큼의 울림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비트락의 희곡언어를 재현하는 교과서적 수준에 머물 것이 아니라, 이 희곡을 오늘날의 비틀어진 가상을 폭파시키는 ‘21세기적인 초현실주의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한 지독한 고민들이 더 절실하게 있어야 했다.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부조리하기로는 오늘날의 현실이 20세기 초반 비트락을 분노하게 했던 그 현실보다 몇 배가 앞서는 게 사실 아닌가. 우울한 사실이지만, 그 당시 엄청난 파괴력을 가졌을 이 희곡의 상황들은 우리에게는 오히려 익숙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 희곡이 초현실주의와 다다 등 아방가르드의 후광을 업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만 아니라면, 솔직히 논리의 맥락을 파괴하는 해체적인 글쓰기라는 비트락의 작가적 전략 역시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아울러 오늘날 희곡의 언어가 내포하는 연극성은 80여 년 전 비트락이 자신의 언어에 부여하고자 했던 연극성과 다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언어를 공간화하기 위해 가져온 무대 디자인이나 배우들의 움직임 등 공연의 전반적인 운용도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 결국 하나의 작품이 시간적 간격을 넘어서고,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서 어떻게 관객과 연극적으로 소통해야 하는가라는 중요한 화두를 놓고 본다면, 아쉽게도 이 공연은 지나치게 프랑스라는 역사 문화적 맥락, 그리고 20세기 초반 로제 비트락의 시각 안에 머물고 있다. 희곡이 씌여진 시대와 문화를 넘어서서 현재를 향한 깊은 울림이 되는 것, 그것이 오늘날 고전을 공연하는 중요한 이유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