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문학의 정치성, 그리고 들뢰즈와 랑시에르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문학의 정치』Politique de la litterature에서 “문학의 정치는 작가의 정치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11). 정치문학론에서 주로 언급되었던 작가의 경향성이 문학의 정치를 가늠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분히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참여문학’에 대한 반론처럼 보이는 이런 생각은 사회정치적인 문제에 작가가 개입하는 것으로 문학의 정치성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literature?에서 ‘글쓰기’를 “자유를 원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정의하면서, 글을 쓰는 순간 사회적 문제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Sartre 47). 물론 사르트르가 이 문제를 단순하게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에 참여한다는 말인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기는 쉬울 것이다… 이 질문은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누구도 자신에게 물은 적이 없던 다른 질문,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사르트르가 내세우는 중요한 문제는 바로 ‘누구’라는 구체적인 존재를 향한 글쓰기이다. 칸트적인 의미에서 작가는 ‘만인’all men을 위해서 글을 쓰는 존재이다. 칸트에게 작가는 ‘학자’이자 곧 ‘지식인’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한다고 간주할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공적인 이성의 사용은 언제나 자유로워야 하며, 이런 공적 사용만이 “인류에게 계몽을 가져올 수 있다”(칸트 16). 칸트는 명백하게 공적인 이성의 사용을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독자 대중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라고 진술한다. 사르트르는 이런 칸트의 지식인론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참여론을 전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르트르에게 중요한 것은 칸트의 지식인론에서 전제하는 ‘계몽을 통해 자유로워진 작가’라는 존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지식인 또는 작가는 “자유에 대한 자신의 발언이 천박하고, 기만적이며, 실효성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자유 또한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Sartre 49). 그래서 그는 그 순수하지 못한 자유를 ‘깨끗하게 만들 책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바다처럼 끊임없이 “나 자신을 뿌리 뽑히게 만들어서 해방시키는 운동”이라는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르트르에게 참여는 현실의 비본래성을 넘어서서 본래성으로 나아가는 행위를 의미한다. 현실의 처지라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저항의 노력이야말로 사르트르에게 글쓰기의 의무사항이다.

그러나 이런 사르트르의 주장과 달리, 랑시에르의 입장에서 본다면, 문학은 ‘문학으로서’ 정치를 수행하는 것이다. 물론 랑시에르가 순진한 문학주의나 형식주의를 설파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랑시에르의 주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문학 자체, 또는 문학성literariness이라는 개념이다. 랑시에르는 문예belle letters와 문학literature를 구분하면서 문학을 재현적 미학체제와 다른 새로운 글쓰기로 간주한다. 랑시에르에게 재현적 미학체제라는 것은 순수미술과 동격에 놓이는 ‘시학’poetics과 같은 것이다. 이런 시학적 미학체제는 ‘모조’imitation의 수단이자 동시에 재현representation과 모방mimesis이라는 범주 내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와 작업을 포괄한다(Aesthetics 22). 이런 방식으로 재현의 미학체제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위계적 구분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주장에 따르면 재현의 미학체제야말로 공동체와 유비를 이루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다. 이런 까닭에 문학 이전에 존재했던 문예는 신분과 지위, 또는 학식의 유무라는 공동체의 위계를 구현하는 글쓰기였다고 볼 수 있다. 아무나 글을 쓸 수도 없었고, 아무나 글을 읽을 수도 없었다. 모든 글은 공적으로 ‘낭독’되어야 했고,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일종의 특권에 해당하는 자격을 필요로 했다. 이런 까닭에 문예는 당시에 학식 있는 모든 이들men of letters이 쓰던 글을 의미했다면, 이와 대조적으로 근대에 출현한 문학은 평등의 형상화를 통해 세계를 재분할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litterature 19).

문예와 달리, 문학은 무관심indifference의 영역을 만들어내는 민주주의적 글쓰기이다. 랑시에르는 이런 문학의 효과를 미학적 감각의 재배치와 같은 것으로 본다. 문학의 정치성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현실을 위계화한 차이를 무너뜨리면서 중립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문학성 자체에 내재한 정치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랑시에르는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 Flaubert의 문체를 문학의 정치성을 보여주는 실례로서 언급한다. 플로베르의 문체는 서술을 압도하는 묘사를 보여준다.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acs는 이런 묘사를 일컬어 정치적으로 수동적이고 반동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랑시에르는 루카치의 평가를 넘어서서 중립적 문체에 내재한 ‘평등주의’를 읽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가 루카치의 주장을 논파하는 논의는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이기에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 글은 중점적으로 문학의 정치성과 연계해서 랑시에르가 주장하고 있는 문학과 정치의 관련성에 대한 논의들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이런 문학의 정치성은 야누스적인 이중성을 드러낸다. 문학의 정치성은 리얼리즘이라는 형식에 내재한 민주주의성에서 발생하고, 동시에 이 민주주의의 확립은 문학의 정치성을 공동체의 감각체제에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리얼리즘의 출현은 사회적인 인식체계, 다시 말해서 지식생산체계 자체를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학의 쓰기는 곧 읽기의 문제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쓰기와 읽기의 방식은 직조된 천의 날줄과 씨줄처럼 받아들여진 것이다. 심지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처럼, 독자의 즐거움을 위해 작가의 글쓰기를 ‘전달의 기록’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랑시에르는 언어적 기표작용 이외에 다른 무엇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그 어떤 이론가보다도 가장 강력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문학이 삶의 구조를 바꾼다는 랑시에르의 주장이 어떤 맥락에서 가능한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산발적으로 문학과 정치, 더 나아가서 미학과 정치의 관계문제를 다루어왔지만, 최근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에 대한 논평에서 자신의 문학론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야말로 문학을 ‘징후학’symptomatology의 사례로 제시했던 철학자였고, 소수문학론을 통해 문학적인 실천과 미시정치학의 관련성을 흥미롭게 파고들었던 이론가였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에게 모든 글쓰기는 “건강”athleticism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다(Essays 2). 문학은 삶의 흐름을 단절시키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상성의 관점으로 보면 문학은 병든 것이지만, 그 문학 자체가 드러내는 병의 증상은 진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은 사회의 증상을 보여주는 진단인 셈이다. 들뢰즈의 용어법에 따르면 작가는 ‘병리학자’이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문학은 언어 바깥의 무엇을 드러냄으로써 “좋은 감각”le bon sens을 불법적으로 사용하는 사회적 정상성의 의미를 되묻는다. 문학이 표현하는 것은 “독특한 감각”으로, 이를 통해 새로운 질서에 대한 요구를 드러내는 것이다(Logic 75). 사실 이와 같은 주장은 별반 참신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들뢰즈는 문학의 문제를 내재성의 범주로 확대해서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들뢰즈에게 문학은 곧 “건강의 기획”이다. 여기에서 건강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말 그대로 몸의 강건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병든 상태를 의미한다. 정상성을 통해 좋지 않은 것이라고 판명 난 것들이야말로 사회의 증상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건강한 문학’은 지배적 제도의 재현에 저항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증명을 실행한다. 들뢰즈에 대한 랑시에르의 논평은 이런 들뢰즈의 진술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들뢰즈의 문학론조차도 사실은 반재현성이라는 아방가르드미학의 전략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사실을 랑시에르는 지적한다. 재현체제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문학의 관건이라고 생각했던 기존의 입장에 대해 랑시에르는 독특한 관점을 보여준다. 들뢰즈야말로 반재현성 자체를 정치적인 문학의 필수요소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랑시에르에 대한 들뢰즈의 평가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따라서 문학과 정치에 대한 랑시에르의 논의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들뢰즈에 대한 랑시에르의 독해라고 할 수 있다.
2. 미학에서 미학체제로 들뢰즈는 물질적 표현의 속성을 강화하기 위해 재현적인 속성을 억압하고자 한다는 것이 랑시에르의 비판이다. 미학에 대한 들뢰즈의 기획이 정치적인 것에 대한 천착으로 나아오지 못한 까닭을 랑시에르는 여기에서 찾는다. 문제는 재현적인 속성이 물질적인 속성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라기보다, 전자를 통해 후자가 출몰한다는 사실에 있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서 미학적 차원을 통해 새로운 감각이 정치적인 것으로 출몰하는 것이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는 ‘미학적 재현의 아프리오리’가 없다면 정치적인 것은 물질화할 수가 없다. 이런 맥락에서 들뢰즈의 예술론은 자율적인 예술의 영역에 대한 주장이라기보다, 심리적이거나 인성론적인 차원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들뢰즈의 시학은 미학과 정치를 적절하게 연결할 수 없는 모순을 드러낸다고 랑시에르는 주장하는 셈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앞서 논의했듯이 문학성 자체를 긍정해야 정치로 나아가는 길이 열린다는 랑시에르의 문학론이다. 긍정해야 할 것은 문학성이라는 형식이지 삶이라는 내용이 아니다. 이처럼 랑시에르는 들뢰즈의 시학에서 빠져 있는 지점들을 통해 자신의 논지를 정립하고자 한다. 들뢰즈에 대한 랑시에르의 평가는 기본적으로 들뢰즈의 시학이 어떠한 공동체적 윤리도 거부한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랑시에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설의 인기는 또한 도래할 인민에 대한 약속이다. 이런 정치적 국면은, 편애의 원리에 좌우됨 없이, 문학이라는 기획 자체에 새겨져 있다. 모든 주체의 동등한 가치, 모든 재현의 위계를 됨이라는 거대한 평등주의적 권력으로 환원하는 것은 평등에 대한 문학의 관계와 관련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인가? 문학적 혁신을 정초하는 분자적 평등성과 현재화할 수 있는 정치적 공동체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이 문제에 대한 고전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플로베르였다. 그에게 정치적 평등은 계층을 변화시키거나 다른 단위에 대한 생각에 도달할 수 없는 환상, 재현적 독사doxa에 속하는 것이었다. 평등의 원자는 인간 개인이 아니다. (Flesh 157)
정치가 인간 개인끼리 ‘소통’하는 것이라면, 문학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평등을 강조한다. 랑시에르가 볼 때, 이것이야말로 “문학의 형이상학”에 내재한 정치politics이다. 이런 정치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인간 개인의 평등 문제를 분자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가난한 자나 노동자가 요구하는 평등보다 더 심오하고 진실한 존재론적 평등이 여기에 있다. 눈에 보이는 가식 너머에서 우주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랑시에르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개념인 공감compassion과 연결시킨다. 물론 들뢰즈는 이런 공감의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부한다. 들뢰즈에게 인민은 하나일 수가 없다. 문학이 창조한 인민은 우주적 물질의 지엽적인 정동으로 구성된 ‘인구’와 동일시할 수 없는 것이다. 분자적 혁명은 진정 우애의 원리라는 것이 들뢰즈 철학의 핵심이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우애는 이에 대한 플롯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애 자체를 수립하면서 가능한 것이다. 직접적 담론과 관계없는 문학이 이 기획을 실현시킬 수 있다. 작가의 눈에 비친 ‘독자의 평등’이라기보다, 소설적 특권에 대한 억압이 여기에 가로놓여 있다. 직접적이지 않아서 자유로운 담론은 스타일이라는 절대시점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비직접적인 담론이 만들어내는 것은 재현에 대한 현재적인 반대이다. 원자가 아니라 허구의 꾸밈fabulation을 통해 이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들뢰즈의 논리이다(Essays 3-4). 이런 논리에 따라, 분자적 혁명은 개인들 간의 평등이라기보다, 허구화의 권력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허구의 꾸밈은 반재현의 종착역이고, 소설의 반대에 놓이는 대립항이다. 당연히 내용과 형식, 예술과 삶은 이를 통해 일치를 이룬다. 그러므로 들뢰즈에게 예술은 삶의 존재방식으로 드러난다. 들뢰즈의 정치학은 니체에게 ‘넘어가는 자들’Ubermensch끼리 맺는 우애를 연상시킨다. 이 우애는 명백하게 위계적이다. 들뢰즈는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거부하지만, 그의 문제까지 해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쇼펜하우어에서 발견하고, 니체에서 더욱 정교해진 문제 - 어떻게 미친 신이 횡행하는 광야의 정의와 인간적 우애의 정의라는 모순이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그대로 남겨 놓은 채 들뢰즈의 시학은 ‘종결’된다. 여기에서 랑시에르가 들뢰즈를 지칭해서 “예술의 미학체제에게 부여된 운명을 충족시켰다”고 발언했던 이유를 알 수가 있다(“Deleuze” 2-3). 랑시에르가 높이 사고 있는 것은 들뢰즈가 모더니즘처럼 예술작품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방식과 다른 관점에서 재현적 미학체제와 완전히 결별하는 새로운 미학체제를 수립했다는 사실이다. 들뢰즈에게 예술의 자율성은 타율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룬다. 자유로운 예술가의 의지 같은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범주 같은 것에 항상 이 자율성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뢰즈가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들뢰즈는 비자발적인 내재성이라고 불렀다. 들뢰즈의 내재성은 절대적 내재성으로서, ‘사유의 환경’을 의미한다. 절대적 사유이미지 - 다시 말해서 결코 사유될 수 없고, 오직 사유를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이 들뢰즈의 내재성 개념이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들뢰즈는 단순하게 내재성 개념을 제시하거나, 그것을 가지고 예술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절대적 내재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그렇게 하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재현적 속성’을 부득이하게 차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눈에 선하게 ‘그려서’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허구의 꾸밈’이라는 들뢰즈 특유의 개념화로 출현한 것이다. 카프카나 프루스트, 또는 멜빌에서 ‘소수 언어’를 발견하기 위해 그는 순수한 허구의 속성을 빌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들뢰즈가 취한 전략이 바로 전통적인 구분법에 따라 분별되어온 내용과 형식을 하나의 ‘쁠랑’plane으로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이 쁠랑이야말로 표현의 순수 국면이고 과정이다. 이 내재장에서 내용과 형식은 뒤섞이고, 허구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으로 ‘변신’한다. 허구적인 속성과 물질적인 속성이 동격에 놓이는 것이다. 허구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동일시한다는 측면에서 랑시에르와 들뢰즈는 비슷한 관점을 드러낸다. 그러나 또한 이 지점에 결정적으로 랑시에르와 들뢰즈의 차이가 놓여 있다.
3. 랑시에르의 미학론 랑시에르에게 미학이라는 것은 “예술들을 인식하고 그 인식을 반영해서 구성된 구체적인 체제regime”이다(Politics 10). 독일낭만주의 비평이론이 미학의 문제를 ‘타당성에 대한 역사적 평가체제’로 보았던 것과 유사한 관점을 랑시에르는 보여주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랑시에르는 미학과 예술을 분리하는 ‘반미학’을 무의미한 것이라고 파악한다. 미학 없는 예술은 성립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미학이라는 감각의 체계가 없다면 예술은 식별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랑시에르가 감각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감각적인 것은 어떤 이미지이다. 인식을 지배하는 이미지라는 개념은 실제로 ‘본다’는 것을 앎과 동일시했던 고대적 사유체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플라톤은 ‘글’written word을 공동체 질서를 위한 보충적인 요소라고 보고, 문자 자체를 ‘고아의 말’이라고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다. 물론 이런 플라톤의 생각은 『파이드로스』Phaedrus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글이라는 것도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특성을 갖고 있다는 걸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파이드로스. 그림은 시작부터 그곳에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서 있지만, 무엇인가 물었을 때, 조용히 홀로 침묵하고 있는 법일세. 문자도 이와 마찬가지일세. 자네에게 그것들이 마치 무언가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글에 담긴 것들 가운데 무언가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서 질문을 던지면 글은 언제나 똑같이 하나만을 가리킨다네. (Plato 552)
랑시에르는 이런 플라톤의 주장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항상 말할 수 있는 것이 규정하고 있는 글을 ‘평등의 언어’라고 말한다. 물론 랑시에르에게 평등의 언어라는 것은 플라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침묵의 언어이기도 하다. 이 개념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가 말하는 ‘공통적인 것’과 유사하지만, 이보다 더 ‘언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네그리와 달리, 랑시에르는 공통적인 것을 합의된 것들로 파악하면서, 이것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본다. 글을 통해 사람들은 소통하고 공통성을 구축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랑시에르는 글을 감각적인 것을 나누는 ‘적절성의 논리’로 파악한다. 이 적절성의 논리야말로 랑시에르가 말하는 미학이며, 이런 맥락에서 미학은 결코 정서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적인 것이다. 이 인식은 기본적으로 체제적인 것이고, ‘보편적’이다. 이 글은 랑시에르의 미학론을 깊이 있게 다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이론에서 문학작품과 이론의 관계 문제를 해명할 수 있는 논거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랑시에르의 주장처럼, 미학이 인식적인 것이라면, 궁극적으로 이론 없는 예술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고 할 수 있는 미학은 예술을 억압한다. 사실 새로운 예술은 이런 미학의 억압을 뚫고 태어나는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은 철학적이라기보다 이론적인 측면을 갖는다. 특히 랑시에르의 주장처럼, 미학이 언어의 공통성 위에서 구축할 수 있는 ‘평등’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 평등에 의문을 제기하고 소음을 만들어내는 문학은 하나의 체제로서 훨씬 적극적으로 이론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정치적인 것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결정하는 미학은 공동체의 규율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민’은 미학을 통해 인식의 적절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문학작품이 출현하는 것은 이런 적절성을 판단하는 기준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 변화는 기존의 지식체계에 균열을 초래한다는 측면에서 언제나 정치적이다. 플로베르의 리얼리즘은 세계를 민주주의적으로 인식하는 관점의 출현을 의미했다. 플로베르의 문학이 공공연하게 정치성을 표방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플로베르가 추구한 중성적 스타일neutral style의 출현에서 위계적 습속의 체계를 탈가치화하는 정치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칸트, 임마누엘. 『칸트의 역사철학』. 이한구 편역. 서울: 서광사, 2009. Badiou, Alain. Deleuze: The Clamor of Being. Trans. Louise Burchill. Minneapolis: U of Minnesota P, 2000. Benjamin, Walter. Reflections: Essays, Aphorisms, Autobiographical Writings. Trans. Edmund Jephcott. New York: Schoken, 1978. Deleuze, Gilles. Essays Critical and Clinical. Trans. Daniel W. Smith and Michael A. Greco. London: Verso, 1998. - - -. The Logic of Sense. Trans. Mark Lester and Charles Stivale. Ed. Constantin V. Boundas. New York: Columbia UP, 1990. - - -. Pure Immanence. Trans. Anne Boyman. New York: Zone Books, 2001. Jameson, Fredric. Brecht and Method. London: Verso, 1998. Plato. "Phaedrus." Complete Works. Ed. John M. Cooper. Indianapolis: Hackett, 1997. Ranciere, Jacques. "Deleuze Fulfills the Destiny of the Aesthetic." Magazine Litteraire: L'effect Deleuze. February 2002. - - -. The Flesh of Words: The Politics of Writing. Trans. Charlotte Mandell. Stanford: Stanford UP, 2004. - - -. Politique de la litterature. Paris: Galilee, 2007. - - -. The Politics of Aesthetics: The Distribution of the Sensible. London: Continuum, 2004. Sartre, Jean-Paul. What is Literature? Trans. Bernard Frechtman. London: Routledge, 1993.
#저자 약력
1968년 경북 칠곡 생. 문화평론가, 경희대학교 영미어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 영국 셰필드 대학교 대학원 영문학 박사. 저서로 『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영단어 인문학 산책』 등.
tglee@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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