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잠들지 않는 전사의 목을 벤 악기, 피리
노래가 없다면, 악기가 없다면, 음악을 꿈꾸는 사람이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황폐해질까. 음악을 다른 행동의 배경이 되는 ‘백그라운드 뮤직’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로 들을 때 우리의 영혼은 순정한 추상의 세계에 빠진다. 특히 가사가 없거나 가사 자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음악일 때, 음악의 투명한 추상성은 극대화된다.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음률 그 자체로 약동하는 순수한 추상의 세계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문득 해방되는 것을 느낀다. 그건 증오야, 그건 질투야, 그건 사랑이야, 그건 권력이야, 이건 슬픔이야, 이건 배신이야, 저건 불합리해, 저건 말도 안 돼…….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판단하고, 규정하고, 언어화하는 일에서부터, 우리는 해방된다. 음악 속에서라면. 음악 속에 빠져 있는 그 순간만은. 우리는 ‘무엇 무엇에 대한 생각’이라는 상태에서 놓여나는 것이다.
음악은 그렇게 대상과 언어 사이의 필연성을 해체한다. 대상을 언어로 분석하고 표현하는 일로부터, 음악은 우리 영혼을 해방시켜 준다.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격정을 이해하는 식이 아니라, 멜로디 자체로 격정에 공감하는 것. 무엇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엇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법을, 우리는 음악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이 외국어를 배울 때 개념과 정의를 연결시키는 사전식 학습법이 아니라 마치 음악을 듣고 외워서 노래를 따라 부르듯이 배우는 것을 보면 음악이 지닌 고도의 추상성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아이들은 언어조차도 음악으로 듣는 것이다. 뜻과 뉘앙스와 분위기로부터 해방된 음악 그 자체로서의 언어를,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이해한다.
이렇듯 음악은 의미로부터 해방된 도취, 대상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선물한다. 음악에 도취되어 자신의 책무를 잊어버리는 것은 음악을 이해하는 자의 특권이정여울다. 그리스 신화의 아르고스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아르고스의 임무는 바로 제우스의 바람기를 잡는 것이었다. 제우스가 사랑하는 여인 이오를 소로 변신시켜 자신의 ‘죄’를 숨기자, 제우스의 불륜과 변신술을 의심하는 헤라는 즉시 그 ‘소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온몸에 수백 개의 눈이 달린 아르고스는 잠이 들더라도 몇 개의 눈만은 반드시 뜨고 있었다. 이오를 감시하는 아르고스는 절대적으로 헤라의 명령에 복종하는 무적의 전사였다. 이런 아르고스를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 제우스는 묘안을 짜낸다. 바로 헤르메스를 시켜 아르고스를 잠재우려 한 것이다. 헤르메스의 무기, 그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갈잎피리를 든 목동으로 위장한 헤르메스는 무적의 전사 아르고스의 마지막 눈까지 감기는 데 성공한다. 아르고스는 음악에 도취되어 ‘나는 헤라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해방된 것이다. 아르고스는 그 순간 생애 처음으로 타인의 명령으로부터 해방된다. 음악의 최면에 걸린 아르고스는 암소로 변신한 여인 이오를 지키는 자신의 임무를 잊고, 처음으로 달콤한 잠에 빠져든다. 음악을 향한 순수한 몰입은 그렇게 우리를 의무감으로부터, 타인의 명령으로부터 놓여나게 한다.

2. 만파식적, 죽어서도 나라를 지킨 임금의 영혼
음악에는 고통을 잊게 해주는 주술적 효과가 있다. 배를 젓는 어부, 실을 잣는 여인, 김을 매는 농부들은 모두 노동요를 불렀다. 어떤 음악은 죽음의 고통을, 그리고 죽음 때문에 떠나야 할 세상을 향한 걱정과 미련을 잊게 해준다. 만파식적을 두고 떠난 신라의 문무왕 또한 그렇지 않았을까. 『삼국유사』의 백미 중 하나인 만파식적 이야기에는 죽음의 저편으로 건너간 아버지와 삶 이편에 살아남은 아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대화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신문왕은 돌아가신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세웠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신문왕은 ‘돌아가신 선왕께서 지금 왕께 커다란 선물을 주실 것이다’라는 계시를 받는다. 신문왕은 낮에는 둘로 가라지고 밤이면 하나로 합쳐지는 신기한 대나무를 발견한다. 둘로 쪼개졌던 대나무가 합하여 하나가 되더니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과 비가 심해져 8일 동안 어두웠다가 그 달 16일이 되어서야 바람도 개고 물결도 평탄해졌다. 신문왕 앞에 용^龍이 나타나 이 신기한 대나무의 유래를 알려준다.

이것은 비유컨대 한쪽 손바닥을 치면 소리가 없고 두 손이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대나무도 합쳐야만 소리가 나니 성왕께서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대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대왕의 아버님께서 바다 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이런 값비싼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
-일연, 『삼국유사』 중에서

이 신기한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적병이 물러가며 질병이 낫고 또 가뭄 때는 비가 내리며 장마 때에는 비가 그치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가라앉게 된다는 것이었다. 왕은 이 피리를 국보로 모시고 그 이름을 ‘만파식적’이라 하여 소중히 하였다고 한다. 만파식적은 살아있는 자의 염원과 죽은 자의 염원이 만나는 마음의 매듭이 아닐까. 죽어서도 흩어진 백성들의 민심을 규합해 나라를 지키고 싶어 했던 김유신과 문무왕의 마음, 그리고 강력한 통치자가 세상을 떠난 뒤 갈 곳을 잃은 민심이 기대고 싶어 했던 신화적 믿음. 죽은 자의 믿음은 ‘내가 죽고 나서도 내가 이룬 것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면, 살아남은 자의 믿음은 ‘그가 떠나고 나서도 우리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오래 전 만파식적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산 자를 향한 죽은 자의 걱정이 더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살아남은 자의 그리움이 얼마나 컸으면 돌아가신 아버지로 하여금 ‘세상을 치유하는 악기’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아픔을 구슬리고, 매만지고, 치유하는 악기, 그것은 음악가의 꿈이자 음악을 듣는 모든 이들의 꿈이 아닐까.

3. 자명고, 단지 사랑이 아니라 영혼의 해방을 택한 한 여인의 꿈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 한가운데 놀라운 사물이 가로놓여 있다. 자명고. 그것은 나라의 위험을 알리는 무기이자 악기였다. 자명고가 울리면 적들의 위협이 목전 앞에 다가왔다는 뜻이었으므로, ‘적들이 언제 쳐들어올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최고의 전략이 될 수 있었다. 적들의 침략에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 대오를 정비하고 무기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번다는 것이야말로 더없는 승리의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낙랑공주가 호동왕자를 위해 그 북을 찢어버리고 만다. 호동왕자는 낙랑에게 일종의 최후통첩을 했다. 호동은 낙랑공주에게 사자를 보내어 무기고에 들어가서 자명고와 나팔을 부순다면 예를 갖춰 공주를 맞이할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맞아들일 수가 없다고 전한 것이다. 끝내 낙랑공주는 아버지이자 낙랑의 왕이었던 최리에게 용서받지 못한다. 그녀는 호동과 ‘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이 이야기는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더욱 급진적인 구석이 있다. 사랑을 위해 아버지의 명령은 물론 백성 전체를 지켜야 한다는 공주의 당위마저 잊어버리는 것이다. “로미오, 왜 당신은 로미오인가요?”라고 물으며 서로의 출신성분을 원망했던 셰익스피어의 커플보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는 더욱 급진적으로 ‘당신이 누구든, 무엇을 원하든, 난 당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라는 사랑의 절대성을 실현한다. 그런데 이 고구려 설화가 담고 있는 세계관은 ‘사랑’이 아니라 ‘짝사랑’인지도 모른다. 정말 낙랑공주를 사랑했다면, ‘네가 북을 찢으면 널 아내로 맞고 그렇지 않으면 널 아내로 대접해줄 수 없다’는 조건을 달았을까.

두 나라의 평화로운 공존을 꿈꾸며 금쪽같은 딸을 적국으로 보낸 낙랑왕 최리의 희망은 산산 조각나고, 나라는 물론 딸까지 잃은 최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명고는 사랑에 미쳐버린 한 여자의 손에 찢겨졌다. 하지만 찢겨져 울지 못함으로써 진정으로 우는 악기가 되었다. 악기가 지닌 최고의 숙명, 그것은 다만 타인의 마음조차 함께 울리는 자기만의 울음을 토해내는 것이다. 울지 않아도 우는 것만 같은 신비롭고 처연한 악기, 자명고는 그렇게 조용히 우리에게 사랑에 전 생애를 던진 한 여자의 숨죽인 흐느낌을 전달해준다. 자명고는 이제 더 이상 울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온몸으로 우는 악기다.

아버지, 저 여기 살아 있어요
그날 제 품에 숨긴 칼로 낙랑의 북을 찢을 때
제가 찢은 것은
자명고가 아니었어요
제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손으로 아버지 나라를 찢었습니다
맹목 속에 온몸을 던진
저는 그때 미친 사람이었어요
호동은 달처럼 수려한 사내
하지만 북을 찢고 제가 따른 건 호동이 아니었습니다
제 사랑은 전쟁의 아찔한 절벽에 핀 꽃, 세상에
파멸밖에 보여줄 수 없는 사랑이 있다니요
검은 보자기 홀로 뒤집어쓰고
손에 쥔 칼 높이 들어 북을 찢을 때
하늘의 별들 우르르 떨던
그 캄캄한 절망만이
온전히 제 것이었습니다
- 문정희, 「딸의 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