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의 별자리를 더듬으며 이런 곤란이 생길 줄 미처 몰랐다. 한 호가 출간되자마자 별지기(무수히 쏟아지는 신간들 속에서 별과 같은 책을 찾아 그 색깔과 밝기의 등급, 항성인지 행성인지, 혹은 혜성인지 등을 살피고 가리는 일을 하므로 별지기라고 지칭하자)는 눈에 불을 켜고 귀를 쫑긋 세우고 후각을 예리하게 벼려가며 새로 나오는 책들을 탐색한다. 그리고 따끈한 신간 중에서 기왕이면 매번 다양한 분야와 형식의, 시의성이 있거나 새로운 감수성을 보여주는, 혹은 문제의식을 던져주는 책 하나를 고르려고 한다. 그런데 이번 호의 경우 그동안 했던 것처럼 책 한 권의 별자리를 그리는 것이 어쩐지 충분치 않았다. 우선은 격월간이란 잡지 특성상 정작 한해를 결산하는 11월, 12월에 글을 준비하여 1, 2월 신년호에 실리게 되니 연말연시라는 시기적 상징이화영성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즉 2013년의 소회도 담아내면서 새로운 ‘시작’의 의미도 살리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하지만 신간들 대개가 그 자체로는 좋은 책들이었으나 각기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하여 이번에는 두 달간 읽었던 책 중 몇 권을 엮어 거칠게나마 별자리를 그려보고 싶다.

‘세기의 겨울’을 보내며
플로리안 일리스의 『1913년 세기의 여름』, 한경희 옮김, 문학동네 刊

“나는 세계의 불황을 준비하는 계시록의 전령을,
현세의 연옥을 뜨겁게 달구는 몰락의 사자使者를 본다.”

―1913년 1월, 카를 크라우스

“…오늘, 지금 세기에 존재한다는 것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
문화, 아름다움, 색채의 모든 것이 약탈되고 있다.”
―1913년 섣달그믐. 오스발트 슈펭글러

2013년을 총체적으로 조감할 때 우리가 체감한 온도는 겨울이 아니었을까. 불안정과 불안, 안개 속 같은 미래의 불확실성, 그에 따른 두려움과 공포가 각양각색의 두께와 크기로 음험하게 개개인의 마음을 짓누른 한 해가 아니었을까. 목청 높여 박수를 치는 사람들의 살기 번득이는 눈빛 이면의 절박함이나,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자유로운 봄의 훈기를 희구하며 찬 길바닥에서 처절하게 땀과 눈물을 쏟는 사람들의 무릎에 시리게 감기는 냉기를 절감하며, 차라리 눈을 돌려 100년 전 1913년의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세기말^{fin de siècle}’ 혹은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라는 시대가 끝나고 진정한 20세기가 시작되었다는 해,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시간의 시작점인 1913년. 그해를 미술사가이자 문화사가인 플로리안 일리스는 ‘세기의 여름’이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1월부터 12월까지 월별로 정치, 문학, 음악, 미술, 건축, 연극, 패션, 사진, 영화, 과학 등 모든 영역의 300명이 넘는 ‘당대 인물’들-시대를 만든 인물들-의 일기, 편지, 사진, 예술 작품, 신문, 잡지의 글 등의 행적을 통해 정교한 입체퍼즐 조각을 맞춰 나가듯 시대의 풍경과 히스토리(역사, 이야기)를 흥미롭게 직조해낸다.
“1913년 0시 1초. 총성이 캄캄한 밤을 깨운다.” 훗날 전설적 뮤지션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열두 살의 루이 암스트롱이 훔친 리볼버로 새해 인사를 했던 바로 이 사건으로 흑인 부랑자 소년원에서 트럼펫이란 악기(음악)와 조우한다. 그리고 그의 총성은 프라하에서 프란츠 카프카가 전하는 축포 소리로 연결되며, 악몽에서 깨어나 『변신』을 쓰기 시작하고 사랑하는 펠리체 바우어에게 ‘가장 우유부단한 망설임의 편지’를 쓰는 카프카의 주저와 설렘을 보여준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쇤부룬 궁전 공원에서 산책하다 우연히 마주치’거나,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이 쓰여지고, 프로이트와 융이 갈등을 겪고,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부 “스완네 집 쪽으로”를 끝마치는 때도 1월이다.
이런 식으로 마치 만화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 ‘마술적 리얼리즘’과 같은 세계 안에서 세기의 주인공들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 그들의 내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 그러다 훌쩍 물러나 대륙 차원에서 벌어지는 세계사를 조망하듯 독자는 흥미롭고 입체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동시에 그 성하^盛夏의 햇살처럼 뜨겁게 명멸했던 사랑과 모든 것이 새롭고 또한 내일이 없는 마지막 예술이 되었던 시절의 ‘몰락과 파멸의 장엄미사’를 목격하면서 100년이란 간격이 순간적으로 압축되는 인상을 받는다. “제국주의는 정점으로 치닫고, 민족주의는 점점 확산되고, 발칸전쟁을 비롯한 영토 분쟁이 끊이지 않고, 기술 발전은 속도를 더해가고, 도시는 자기소외와 신경과민에 시달리는 사람들로 득시글거리고, 모더니즘이 음악, 미술, 문학 등 예술의 전통 개념을 뒤엎어버린 바로 그해, 1913년.” “이 책은 재앙으로 치닫는 한 해로부터 현재성의 모험을 만들어낸다”(「슈피겔」). 그것이 파국의 징후가 도저한 2013년의 끝, 2014년 시작 지점에서 순간이 역사가 되는 생생한 경험과 역사적 순간으로서 오늘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는 드라마틱한 재현물로 이 책을 읽는 이유가 된다.

파국의 징후, 사냥꾼들의 밤
돈 드릴로,『코스모폴리스』조형준 옮김, 새물결 刊
코맥 매카시,『카운슬러』김시현 옮김, 민음사 刊

"돈은 전혀 딴 것이 되었기 때문이야. 모든 부는 부를 위한 부가 되었어.
그것 외에 막대한 부라는 것은 없어졌어. 돈은 이야기적인 성질을 잃어버렸어.
딱 회화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돈은 자신에게밖에는 말을 걸지 않아."
—돈 드릴로『코스모폴리스』

말키나: …사냥꾼이 하는 일은 다른 존재를 죽이는 거예요.…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길을 가기에 부적합한 것 같아요. 부적합할 뿐만 아니라 준비도 제대로 안 되어 있죠. 그 모든 피와 공포를 베일로 덮어버리고 싶어 하니까. 그래서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심약한 마음 탓에 모든 현실에 눈을 감아버렸죠. 그리고 그 결과 우리의 운명이 정해졌고요.…비겁한 인간보다 더 잔인한 것은 없어요.
그리고 다가올 대학살은 우리 상상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크죠.
—코맥 매카시『카운슬러』

‘세기의 겨울’을 부정적 측면에서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파국’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상태로 간다면 과연 우리가 무사할 것인가. 쓰나미와 같은 자연의 보복은 물론이고, 핵에너지의 일상적 위협, 천재지변보다 더 끔찍한 경제적 불평등, 자원의 고갈과 인구 문제에 여전한 야만적 전쟁 등 언제 무엇이든 곧 폭발할 것 같은 위기감이 숨통을 조인다. 소위 ‘대안’이나 ‘해결’의 실마리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심연에서 ‘사냥꾼’의 탐욕과 ‘사냥감’의 절망은 무한한 기세와 골을 이룬다. 잠복기의 바이러스처럼 정체 모를 불안감이 의식을 잠식하는 나날, 두 작품을 각각 영화로 먼저 접하고 바로 원작을 찾아 읽었다.

코맥 메카시가 최초로 쓴 시나리오인『카운슬러』는 그의 작가로서의 직관이 세계에 대한 '파국'을 감지하고 그런 가망 없는 한기^寒氣의 지옥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욕망이 탐욕으로 경계를 넘는 순간 들어서게 되는 ‘사냥꾼들의 밤’. 그곳은 한낮에 꾸는 악몽처럼 눈부시지만 거기엔 온도도 없고, 출구도 없으며, 두께도 없이 무한 반복되는 시스템의 ‘처리(삭제)’만 존재하는 연옥이다. 그 누구의 운명이건 상관없이 가볍고 섬뜩하게 옭아매는 불길한 조종弔鐘처럼 순식간에 피를 얼어붙게 만드는 이 하드보일드 소설은 돈 드릴로의『코스모폴리스』와 소재는 다르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21세기의 지옥도를 무척이나 세련되고 ‘에지^edge’있게 그려냈다.
‘21세기의『율리시즈』’이자 새로운 ‘개츠비’의 탄생이라는 찬사를 받은 돈 드릴로의『코스모폴리스』는 에릭 패커라는 인물의 ‘생각하기’를 따라가며 이미지적이고 시詩적으로 금융자본의 ‘파국’을 보여준다. 에릭 패커는 자본의 흐름을 도표화하여 예측 가능한 패턴 모델을 개발해서 억만장자가 된 인물이자, 그 자체가 자본의 의인화이다. 자본주의의 현 단계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전^全지구적 차원에서 전횡을 일삼는 금융자본의 지배에 놀아나는 막장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금융자본의 정점을 표상하는 에릭 패커의 사유를 통해 ‘화폐’도, ATM도 ‘화상검색’, ‘컴퓨터’ 등 우리의 현재를 이미 구시대의 유물로 밀어내면서 작품은 혼란스러운 근^近미래를 은유한다. 2003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2008년 월가 위기와 ‘점령하라’ 시위를 놀랄 만큼 정확하게 예언했는데, 실제보다 더 객관적이고 냉철한 통찰로 그런 ‘세상을 뒤흔든 사건’들이 결국은 자본의 자가 논리에 따른 것이란 점을 설파하며 현대성의 본질에 대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분석과 상통함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모든 것이 유지되는 걸까? 중력과 시간에 의한 습관이. 이 새롭게 유동적인 현실에서.”
―돈 드릴로의『코스모폴리스』

가망 없는 시대의 희망 잡기
지그문트 바우만,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이택광  박성훈 옮김, 자음과모음 刊

“삶이라 불리는 피할 수 없는 이 패배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현대세계의 특징을 유동성으로 파악한 88세의 사회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64세 때 펴낸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로 처음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우리에겐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 좋은 반응을 얻어 이젠 거의 신드롬이라 일컬어질 만큼 인문학계에서 핫이슈가 되어 2013년에만 7권의 저작이 번역 출간되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2010년 9월부터 2011년 3월까지 쓴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는 제목처럼 일기가 아니다. 그가 첫 일기에서 밝혔듯이 ‘지나치게 신념이 강한’ 그는 ‘무엇 때문에’ 일기를 쓴다. 그리고 글쓰기가 곧 생각하기이고 행동하기 위해 생각하자면 의무처럼 소명처럼 글을 써야만 하는 그는 신변잡기를 늘어놓는 일기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우리 모두를 향해 분석 기사처럼, 성명서처럼,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처럼, 전방위적으로 전지구적 차원에서 거의 대부분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또 다른 책 『모두스 비벤디』에서 우리가 사냥꾼의 삶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패배와 배제의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기괴한 유토피아에서 삶의 의미를 사색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다고 일갈한다. 그런 진단을 내리는 노학자가 일기 아닌 일기를 쓴다. IT강국인 한국의 젊은이들에겐 선택의 여지조차 없다는 안타까운 시선을 보여주고, 국가가 국민을 대상으로 거짓 사기를 치는 이유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날린다(그런데 이 책 심히 유감스럽게도 번역이 너무 나쁘다). 어쩌면 바우만의 이런 노력이 파국에 직면한 우리 무력한 개인에게 일말의 희망이 아닐까. 깨어 있을 것, 사유할 것, 그리고 편지든 일기든 무엇이라도 꾸준히 써나갈 것.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지난 연말 “더 이상 우리의 삶을 파괴하지 마라. 더 이상 우리의 언어를 더럽히지 마라. 더 이상 우리의 사랑을 착취하지 마라”는 작가들의 선언이 있었다. 그러니 신년 벽두에 오염되고 빼앗긴 언어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이런 소박하나 거창한 계획 하나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