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朴壽根, 1914~1965) 탄생 100주년이다.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그는 5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 밖에 없습니다. (…)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청혼 편지의 내용이 헛말이 된 것에 대한 아쉬움과 헌신적이었던 부인에 대한 미안함을 뒤로 한 채.
타계 당시 그에 대한 세상의 특별한 추모는 없었다. 장례식이 예정된 5월 8일 동아일보 한 모퉁이에 실린 기사의 제목처럼 그는 ‘이젤조차 없이 가난 속에서 살다 간 예술가’였을 뿐이었다. 예술혼을 불태우다 세상에 이름 석 자를 알리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예술가는 숱하게 많다. 그럼에도 그는 무명으로 돌아간 다른 예술가들처럼 영원히 잊히지 않았다. 타계 후 반세기 만에 국민 화가로 부활한 그의 회회가 지니는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그의 삶은 격변기 한국사와 동선을 나란히 했다. 태어난 세상은 온통 일제의 것이었고, 해방의 날은 불쑥 손님처럼 찾아왔다.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날선 목소리가 창밖에 울리기도 했고, 급작스레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부정 선거에 반대하는 시위대로 거리가 가득하기도 했고, 총과 탱크를 앞세운 이들이 세상을 점령하기도 했다. 강점과 해방, 미군정과 한국전쟁,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 끝이 아니었다. 베트남 파병 원년이었던 타계의 해, 청량리 위생병원 창 너머로 그가 본 마지막 세상은 60년 만의 봄 가뭄으로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대부분이 변화무쌍한 나날들이었지만 모든 것이 변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뒤쫓은 가난과 아내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꾸준했던 것은 예술의 꿈이었다.
화가의 길은 양구 보통학교 졸업을 한 해 앞둘 무렵 시작된 꿈이었다. 멀리서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척박한 땅을 일구던 투박한 손을 모아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는 부부의 모습을 형상화 한 회화를 원색 도판으로 접한 후의 일이었다. 미국 선교사들이 종교적 삶의 이미지로 소개했는지, 강점기 일제가 순응적 세계관의 상징으로 유포했는지 밀레〈만종〉의 국내 유입 경로는 불분명했다. 그럼에도 국내 선교 사업의 최후의 보루였을 만큼 교통도 불편했고, 인구도 희박했던 강원도 오지 양구의 보통학교 학생이 인쇄물을 통해 접할 정도로 이 작품의 이미지는 국내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19세기 프랑스 화가의 회화 복제물은 보통학교 시절 도화시간에 흥미를 가진 것 이외에 예술과 관련해 남긴 남다른 에피소드가 없는 그에게 강한 감동을 주었다. 이후 위대한 회화의 세계는 불투명하기만 했던 그의 삶에 유일하게 명확한 이정표가 되었다.
예비 장인의 못마땅한 눈초리와 무능한 가장이라는 이웃들의 손가락질 그리고 미군 PX에서 간판장이 취급을 받으면서도 지속되던 예술의 길은 1957년 대한민국미술대전(이하 ‘국전’)에 출품한 야심작이 낙선하기 전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국전 낙방은 국내 추상미술가 단체인 ‘모던아트협회’와 국전 중심의 활동을 펼치던 중견작가들 위주의 ‘창작미술협회’ 그리고 국전에 참여를 거부했던 젊은 미술가들 중심의 ‘현대미술가협회’가 잇달아 출범되던 해의 일이었다. 미술인들이 단체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반복했지만 보통학교가 최종 학력이었던 지방 출신의 그는 미술계의 아웃사이더였다. 학연과 지연 그리고 예술적 지향과 무관하게 국전을 유일한 거점으로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던 그에게 국전은 각별한 의미였다. 낙선 후 1962년 국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파행에 가까운 심사 과정을 목격하며 좌절했지만 그 전까지 예술은 그가 가야할 확고한 길이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이미지를 즐겨 그린다.”

박수근이 회화로 궁구했던 것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이었다. 그는 현실과 예술 모두에서 말과 글 같은 기록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과묵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예술의 지향만큼은 명확했다. 짧은 글의 행간에는 착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믿음과 순박한 이웃들에 대한 신뢰가 담겨있다. 젖먹이 아이, 더벅머리 소년, 단발머리 소녀, 길 가는 아낙네, 고개를 숙인 남정네, 거리의 노인네 등. 그의 예술에 보편적 삶을 영위했던 이 땅의 타인들에 유독 많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격변의 시대였던 탓일까. 그의 회화에서 타인들의 삶은 풍요로움과 거리가 멀었고, 한국전쟁 이후는 그 강퍅함이 강도를 더했다. 전쟁은 타인들의 어깨에 더 많은 결핍을 짐 지운 사건이었다. 남북한 인구는 3천여 명이었던 한국전쟁 당시 사망 인구는 4백만 명에서 5백만 명에 달했다. 전쟁 참가가 6명 중 1명이 희생된 셈이었다. 사망자의 숫자는 누군가가 잃은 아들과 아버지의 숫자이기도 했다. 전쟁은 학살과 폭발, 폐허와 훼손 때문에만 폭력적인 것이 아니다. 전쟁의 비극은〈할아버지와 손자〉와 같은 전후의 일상으로 지속되기도 한다. 탄식과 한숨 소리 하나 없이 1세대와 3세대 사이에 있어야 할 2세대의 부재로 잔혹한 전쟁의 이면을 들춰내는 그의 회화는 묻는다. 〈할아버지와 손자〉를 에워싼 헛헛함은 과연 이들 감내해야 할 이들 운명의 형벌인 것일까.
전쟁은 부모 모두를 앗아가기도 했다. 전쟁 중에 고아가 된 아이들은 당장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부모가 있다고 해서 상황이 더 나은 것도 없었다. 전쟁은 농촌의 궁핍함의 정도를 더했다. 가계 부담을 덜기 위해 어린 딸들이 제일 먼저 가정에서 방출되었다. 고아가 되거나 농촌에서 상경한 소녀들이 도시의 식모와 보모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어느 집이든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것이 아이 업은 소녀이다.” 1956년 방원철의 글에서처럼 전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전쟁고아들과 농촌 출신 소녀들의 도시 유입은 계속되어, 1959년에는 도시와 농촌의 문맹률 격차가 미미하기도 했다. 1950년대 초부터 타계의 시점까지 그의 회화에는〈아기 보는 소녀〉들이 대거 등장한다. 하지만 당대 언론 보도 내용처럼 그의 회화는 애보기 소녀를 인격 모독과 체벌, 부당 대우와 성적 학대 등의 문제에 노출되어 있는 가련한 아이들로 단정 짓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이들이 처한 결여의 상황을 아기를 업고 담벼락에 서서 또래인 〈놀고 있는 아이들(유동)〉을 먼발치에서 응시하는 단발머리 소녀의 서성임으로 대체한다.
그의 회화는〈아기 보는 소녀〉처럼 실직자들 또한 단지 우리와 별개인, 언짢은 사건의 딱한 피해자로 규격화시키지 않는다. 구직은 당대의 가장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 그는 평안남도의 도청서기와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일했고, 이후에는 미군부대 초상화가로 생계를 책임지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에는 한시적이고, 불안정한 직업들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실업은 심각한 사회 문제 중 하나였다. 해방과 함께 일제 주도의 산업이 와해되었고, 전쟁으로 공장이 파괴되어 문을 닫았다. 분단의 상황이 가속화한 산업 구조의 기형화와 다량 유입되던 미국 원조 물자의 급속한 감소는 원자재 구입 경로의 폐쇄로 인한 공장 도산을 초래했다. 부족한 자본, 낙후된 기술, 미국 의존적 경제 구조가 초래한 상황은 대량 해고와 실업자의 양산을 뜻했다. “1950년대의 남한은 누구도 극도의 궁핍과 오욕을 피할 수 없는 끔찍이 암울한 곳이었다.”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현대사』의 한 대목에서처럼 1950년대 실직자의 수는 420만에 달했다. 현실에서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실직자들의 약탈과 구걸이 이어졌지만 그의 〈실직〉에는 이런 아귀다툼이 없다. 노동 기회를 박탈당하고, 사회적 역할이 거세된 이들의 〈실직〉을 그는 침묵과 기다림으로 형상화한다. 그의 회화에서 〈실직〉이 배고픔과 동정해야 할 빈 밥그릇의 문제로 남지 않는 까닭이다.
가장의 사망과 실직은 생계에 대한 책임을 전쟁미망인과 아내들에게 이양했다. 방 안에서 아기 젖을 물리고, 집안에서 아이를 업고 절구질을 하고, 비탈진 산에서 나물을 캐고, 마을 인근 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아낙네들은 가장의 무고한 죽음을 붙들고 오열한 겨를도, 남편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할 새도 없이 가족의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충분한 교육도, 이렇다 할 기술도 없는 여성들의 변변치 않은 장사 밑천은 삶의 의지뿐이었다. 아낙네들은 동네 골목, 골목을 머릿짐을 이고, 길거리 모퉁이, 모퉁이마다 좌판을 폈다. 하루 벌이를 위한 거래 품목은 손수 짠 기름에서 소금에 절인 고등어, 미역, 더덕, 콩나물 같은 찬거리에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양담배, 양주, 양과자 등 다양했다. 동대문 시장, 남대문 시장, 천변 시장 등 가족들의 더운 밥 한 그릇을 위해 물건을 팔러 나온 아낙네들이 세상을 메우던 시절, 그의 회화는 텅 빈 거리에 어정쩡한 태도로〈앉아 있는 여인〉을 한 명의 장사치가 아닌 하나의 존재로 포착해 낸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타인, 현실적 이유에서 어린 나이에 노동 현장에 선 타인, 일자리를 기다리는 타인, 가족의 끼니를 벌기 위해 거리로 나온 타인 등. 박수근 회화의 일관된 화두였던 타인들은 오늘날 매스미디어 안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이윤 축척과 상품 경제에 근간을 둔 현 사회에서 여전히 타인의 삶에 충만한 것은 부재와 결핍이다. 이혼 가구와 노령 인구 증가로 가족의 해체와 1인 가구의 수가 확대되고 있고, 미성년자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노동하고 있다. 실직 뿐 아니라 구직의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청년 실업의 시름은 깊기만 하고, 여성들의 노동 현실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매스미디어는 이런 타인들의 주름진 얼굴과 창백한 낯빛, 비탄에 잠긴 눈빛과 두 볼에 흐르는 눈물을 고해상도 카메라로 클로즈업해 이들의 결여를 낱낱이 구경시키고, 연민을 효율적으로 부추긴다. 동시에 매스미디어 앞의 우리들은 타인의 가난과 질병을 관람하고, 타인의 공포와 슬픔을 동정한 후 책임을 다했노라 안심한다. 이에 대해 수잔 손탁은『타인의 고통』에서 타인에 대한 연민은 자아의 무력함이자 세상에 대한 기만이라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박수근 예술에서 타인은 매스미디어가 제공하는 것처럼 하룻밤의 유흥거리도, 한나절의 구경거리도 아니었다. 타인은 가파른 세상에 엄존하는 선함과 진실함의 증표였고, 확증이었다. 따라서 타인은 존엄한 인격이자, 이해의 대상이었다. 그가 회화로 궁구했던 것은 손자와 거리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상심, 아기를 보는 소녀의 애처로움, 일자리를 기다리는 남성의 허기, 좌판을 벌인 여성의 막막함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의 예술의 지향은 근심과 고됨, 굶주림과 버거움의 상황과 마주하고 있는 존재와 이들 실존과 관련된 문제의 형상화에 있었다. 이러한 그의 예술 의지는 타인을 일시적 연민의 대상이 아닌 지속적 공감의 상대로 전제했던 그의 태도와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사회적 삶에서 진정성이 점점 더 뒷걸음질치고, 다양한 관계들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의 기술이 더욱 더 저하되고 있는 스펙터클한 관음증의 시대, 그의 회화가 제기하는 질문은 집요하게 지속된다. 타인은 나에게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