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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어떻게 질문하고 독자는 어떻게 응답하는가
통권 : 43 / 년월 : 2014년 1,2월 / 조회수 : 2690
- 정유정의『 28』을 통해 생각하는 2013년 한국문학

1. 문학 안의 이율배반 - 대중독자와 전문독자, 혹은 대중(장르)문학과 순(수)문학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이야기지만, 문단의 평론가들이 ‘좋다’고 평가하는 소설과, 일반 독자들이 환호하는 소설은 별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 괴리는 상당히 커서, 평론가와 일반 독자 사이에 어떤 접점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이것이 근래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것은 일반 독자들이 작품에 대해 직접 발언할 루트가 유례없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텍스트와 독자를 매개하는 평론 없이 지금 독자는 직접 텍스트와 만나고 소통한다. 전문독자를 자임해온 평론가는 옳은 말을 해도 점점 믿음을 사지 못하는 비운의 카산드라가 되어 간다.
이렇듯 전문/대중독자로 이원화된 구조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자주 문학의 태생적 조건을 떠올리게 된다. 오랫동안 문학은 인간의 지적, 정서적 활동의 산물이라고만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것은 문학 역시 시장 안의 상품으로 유통되는 근대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가령, 한국의 근대문학 초창기인 1920년 전후 동인지 체제에서의 문학이란 상징 자본의 의미만이 강했지만, 이내 발표지면이 신문이나 잡지 등의 매체로 이동하면서 문학의 환
금 가능성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때 아이러니한 것은 문학이 늘 시장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주장하고, 문학 담론 역시 시장과의 긴장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20년대 이래로『 개벽, 삼천리, 조광』과 같은 잡지마다 팔리는 문학에 대한 자사 광고는 넘쳐나지만, 그 잡지 내의 문학 담론은 자사에서 광고하는 목록에 무심했다. 자비自費로 동인지를 내던 이들, 자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출판사를 유지하던 당대의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실은 상징자본으로서의 문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문학’을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서는 팔리는 ‘다른’ 문학 진영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순수/대중문학 식으로 문학의 이원화라 할 만한 분위기가 공고해진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예지와 문학성(?) 있는 작품은 출판사의 상징적 얼굴이고, 그 적자투성이의 상징성은 ‘다른’ 문학의 판매와 이윤을 통해 가까스로 유지된다. 가령, 지금 전문독자(문단 관계자들)에게 무라카미 하루키란 영향을 받았을지언정 숨기거나 지워가야 하는 대상이지만, 동시에 문학 출판사에게는 저작료를 갱신하면서 영입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런 식의 이율배반은 비단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하루키에 대한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2011년 화제의 소설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에는 소설 속에서 언급된 책이나 앨범 목록이 책 말미에 따로 실려 있다. 그런데 그 중, 1980년대의 베스트셀러 서정윤의 시집 『홀로서기』는 유일하게 그 목록에서 빠져 있다.1) 필요하지만 지워야할 것, 혹은 문학 안의 또 다른 문학이어서였을까. 이것이 실수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그 무의식은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를 포함하여 전문독자를 자처해온 이들 안에 있는 이율배반이자 딜레마이기 때문이다.

2. 지금만큼 문학의 조건이 환기된 때가 있었나
늘 그래왔지만, 2013년 문학계의 이슈와 문학출판계의 이슈 역시 전혀 상이하다. 흥미로운 것은, 출판계의 현상에 대해 전문독자들(문단 관계자들)은 늘 심드렁하지만, 문학의 위기 이야기를 할 때에는 출판계의 현상을 강하게 의식한다는 사실이다.2) 문학 관계자의 위기감은 이미 책의 판매량, 일반 대중독자와 무관치 않다. 문예지의 담론에 하루키가 호출될 때에도 그렇고,노벨상 이야기가 오갈 때에도 그렇다.
올해 문학출판계의 이슈로, 많은 이들이 조정래와 정유정의 소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조정래와 정유정이 전문독자 사이에서 이야기될 때에는 언급했듯 『정글만리』(해냄, 2013)와 『28』(은행나무, 2013)의 판매부수나, 하루키 등의 팔리는 외국작가와의 비교선상에서의 비교일 뿐이고, 텍스트 분석의 대상으로는 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학 시스템 내에서, ‘문학적으로’ 담론화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은 이미 구조적으로 이원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학적 설명이 가능하다 아니다’의 문제 이전에, 그리고 작품의 ‘좋음’과 ‘나쁨’ 판단 이전에, 이미 암묵적 이원화 시스템 내에서 선별, 배제의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앞서 이것을 내 안의 이율배반이라고 표현했다). 담론의 대상으로 다룰 것인가 말 것인가의 여부가 무엇인지는, 의식·무의식적으로 배제하는 이들 스스로도 명쾌히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몇몇 주요 문예지의 발표 루트를 거친 후 출판된 것인가 아닌가가 밀접히 관련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조정래의『 정글만리』나 정유정의『 28』은 그 시스템과 무관한, 더구나 문예지를 가지지 않은 출판사의 산물이다. 그러나 전문독자들은 단지 그 현상에 주목할 뿐 대중에게 어필하는 텍스트 내의 요소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사정을 생각할 때, 최근 한 좌담회3)에서 “1만 부 작가 50명 만들기 프로젝트”에 대한 제언이 오간 것은, 한국문학의 미래를 위해 고무적으로 이해되는 것이지만, 사실 문학 안의 식민지, 2중대처럼 여겨온 소위 대중(장르)문학에 대한 재고 없이는 역시 미봉적이고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학은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지 오래고, 더구나 한국문학은 세계문학 사이에서도 경쟁력이 없다는 이야기는 상투적이다. 그러나 ‘어떤’ 문학과 대중 독자의 접점은 이미 다른 곳에서 활발하게 형성되어 있고, 매체의 발달로 이제는 그 나름의 지대를 눈에 띄게 만들어내고 있다. 판매 통계자료뿐 아니라, 인터넷의 무수한 독자 리뷰들을 떠올려보아도 쉽게 이해된다.
한편, 평론가가 해설을 하고 리뷰의 대상이 되는 소설이라고 해도, 그 소설에 대한 대중 독자의 감식안은 또 다른 방식, 내용으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전문독자(문단 관계자)는 대중독자의 선택에 개입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소설이 그것과 어떤 텍스트 내적 정합성을 갖는지에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문학의 시장종속성, 문학의 왜소화를 우려하면서, ‘독자가 없어도 괜찮아. 글쓰기는 세상과의 불화의 산물이니까’ 식으로 정신승리법만 구사해온 것이 지금까지의 한국문학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처럼 자주 문학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환기되는 즈음, 이 정신승리법은 어딘지 무력해 보인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문학 내의 식민지를 돌아보지 않고 한국문학의 미래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이전 시대 식의 문학을 둘러싼 환상이나 동경은 지금 통용되지 않는다. 이때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나를 포함하는) 당사자들의 향수나 안타까움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회고조의 어조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과는 엄연히 별개의 것이어야 한다.

3. 정유정의 『28』이 묻는 것, 그에 대한 응답들
한 출판평론가가 올해 정유정의 『28』의 선전善戰을 두고 ‘정유정은 새로운 현상이다’라고 이야기했다.4) 요지는 정유정이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이분법으로 말할 수 없는 작가라는 것이고 그 대중적 성공은 ‘이야기의 힘’에 있다는 것이었다.
세헤라자드가 살아남기 위해 천 일 넘게 이야기를 했다는 설화는 어쩌면 소설의 궁극의 운명을 비유한다. 오늘날 세헤라자드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무수한 왕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요구한다. 그것이 재미있건 슬프건 궁금함을 자아내건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들에게 감응할만한 이야기를 요구한다. 소설가는 어쩌면 처음부터 세헤라자드의 운명이고 소설은 이야기의 운명을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궁금했다. 평론의 언어가 닿지 않는 『28』의 이야기와, ‘정유정 현상’에 게재된 독자들의 심상구조가. 지금 일반 대중독자는 문단의 담론과 무관하게 선택하고 스스로의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거기에 개입하는 마케팅의 힘, 인터넷 매체의 파급력이 절대적이라 할지라도, 분명 대중적으로 부응하는 텍스트 내적인 정합성이 없을 리 없다. 텍스트 내적인 구조는 비가시적이지만 독자들의 욕망과 관련된다. 그리고 그것은 심상의 어느 부분을 자극하고,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다양한 루트로 실현된다.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28』에 대한 독자들의 리뷰5)에는 우리 안의 뿌리 깊은 휴머니즘에 대한 감상, 성찰이 엿보인다. 이 소설은, 원인 모를 전염병의 확산 속에서 사투하는 이들의 재난물이다. 기존 평론의 프레임으로는 왠지 여기에서 ‘1980년 광주’의 이미지나, 일본의 3·11과 같은 재난 상황을 떠올리고 싶어질 것이다. 실제로 독자들의 반응 속에서도 그런 오버랩이 종종 발견된다. 하지만 이 재난은 『28』에서 어떤 알레고리로 존재하지 않고 리얼리즘적으로 축조되어 있다.
이때 소설 구조상 특이한 점 하나는, 소설 속 초점 화자가 총 여섯인데, 그 중 하나는 인간이 아니라 개라는 점이다. 인간 아닌 동물에게 인격이 부여될 때, 소설은 종종 우의(알레고리)나 판타지, SF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방금 말했듯 이 소설은 어떤 특별한 미학적 형식 속에서의 동물이 아니라 리얼리티 속에서의 동물을 그린다. 이때의 동물 역시 인간과 똑같이 감정과 내면을 갖고 사투하는, 엄연한 이야기의 주체로 그려진다. 동물에게 인간과 동등한 인격과 내면을 부여하고 그에게 화자의 역할을 맡긴다는 것은 소설 구성의 개연성 차원에서 썩 설득력 있는 것은 아니다. “스타의 이름을 잊지 않도록 마음 깊이 간직해두었다”6)와 같은 ‘내면’을 인간과 동등하게 동물에게 부여하는 것에서부터 (근대)소설적 룰에 익숙한 전문독자는 심히 불편해질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 소설의 사건들이 서사적으로 압축되는 결말 부분은 더욱 문제적이다. 개의 공격으로 가족을 잃은 남자(한기준)가 있고, 인간의 무자비함에 동료를 잃어 복수심에 불타는 개(링고)가 있다. 그리고 그 개를 가족 같이 돌보던 또 다른 인간(서재형)이 있다. 이들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 즉, 동물을 향한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과, 인간을 향한 복수심에 불타는 동물이 있고, 그들 사이에는 이 동물의 주인인 또 다른 인간이 있다. 현실 정서상, 이 설정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다. 실제였다면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개는 당연히 사살되는 쪽이 옳다고 우리는 여긴다. 어떤 경우라 해도 인간을 공격하는 동물이란 허용될 수 없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또한 인간과 인간 아닌 종 사이에서 생존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인간에게 있어왔다(하지만 죽음, 생존 앞에서도 모든 생명은 동등하지 않다는 사실은 따지고 보면 매우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이 대결은 정당하게 그려진다. 재앙의 희생양을 늘 다른 종에게서 찾고자 해온 인간, 인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희생양을 정해 무자비하게 살처분하는 인간. 소설은 내내 이 절망적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장면은 나름대로 서사적 정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과연 이들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을 때, 말 그대로 ‘생존’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작가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것이 이 소설에서의 가장 큰 서사적 모험이자 핵심이다.


사실 이런 설정, 장면 자체가 ‘장르적인 것’임을 반증하는 것인지 모른다. 서사를 팩트로 나열했을 때의 우리 안의 심적 저항감을 충분히 상쇄시킬 만큼 설득력 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음에도, 결정적 선택의 순간 앞에서 인간을 둘러싼 우리 안의 믿음은 꽤 공고하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인간과 관련된 가치들이 오랜 세기에 걸쳐 간신히 얻어낸 것이며, 그 정당성을 얻기 위한 희생은 결코 감상이나 상상만으로 부정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믿음을 회의하게 만드는 경우는 이제는 별로 낯설지 않다. 인간 종의 안전을 위해 살처분되는 가축, 태어나자마자 쓸모없다고 분쇄기에 넣어지는 수평아리, 인간 세계의 발전을 위해 맞춤형 실험도구로 태어나는 동물들. 소설 속 세계와 오버랩되는 탓에 감정적, 충동적 접근을 충분히 경계했음에도, 여기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오직 인간의 논리라는 것은 쉽게 말할 수 있다.
근대 미학은 재현에 근거하는 리얼리즘 미학에서 출발했고, 그것은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속에서 구현되어 왔다. 따라서 경험 가능한 현실이 아닌 시간(미래), 인간 아닌 존재 등에 대한 이야기란, 관습적으로 우의, 판타지, SF의 몫이었다. 소위 순(수)문학과 ‘다른’ 문학의 영역에서 그것은 우리 안의 검열 없이 이야기되어 왔다. 경험, 지각 가능한 리얼리티라는 것, 세상의 모든 존재 중 ‘인간’이라는 것, 인간의 인간다움을 확인시켜주는 ‘인간성’이라는 것. 이것이 충족되지 않는 소설은 애초부터 근대적인 가치 바깥의 것, 소위 ‘장르적’인 것이었다. 이 소설책 말미에 놓여 있는 정여울의 해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이야기하는 것도, 개개인의 감식안의 차이 이전에 놓여 있는 이런 사정을 함축한 것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작가의 선택은 어떠한가. 소설은 표면적으로 인간(한기준)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과연 작가가 전적으로 그럴 생각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아 보인다. 대결하던 개(링고)는 혼자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결 장면에 개입한 또 한 명의 인간(서재형) 역시 함께 죽는다. 작가는 인간 쪽에 손을 들어주었지만, 동물에 속죄하고자 하는 또 다른 인간의 죽음이 조건으로 붙어 있다. 인간을 둘러싼 가치가 어떻게 해결되고 있는가에 대해 이제 쉽게 말하기 어려워진다. 표면적으로는 휴머니즘일지언정, 정작 소설의 이야기 전개상 설득력은 휴머니즘을 떨치는 쪽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도 자기 안의 검열을 의식했을 것 같다. 구원 없는 세계, 단지 파멸을 향해서만 치닫는 세계로 끝맺는 것은 문학을 둘러싼 일반적 정서상 불가능하다. 심정적으로 ‘차라리 인간 따위 멸망해버려’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소설로 실현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난감하다. 이 딜레마는 독자들의 감상에도 잘 나타나 있다. 독자들은 이 소설에 대해 “우리 안의 나치즘”,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중, 인간이라는 존재가 끔찍할 만큼 잔인했다. 더욱 잔인한 점은 이 모든 행동이 인간답다는 사실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끝까지 삶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성의 승리”, “생존을 향한 인간들의 갈등 그리고 화해, 구원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7) 이 상반되는 듯 보이는 해석의 딜레마는 정확히 이 소설의 포즈와도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4. 전문독자에의 제언-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을 구별하기 이전에
지금 인간, 휴머니즘을 둘러싼 딜레마에 대한 판단은 이 글의 몫이 아니다. 하지만, 2013년 하반기 문학시장의 한 현상이었던 정유정의 『28』이 독자를 감응케 한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이 휴머니즘에 대한 아슬아슬한 상상력이라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독자들이 한 결 같이 말하는 것은, 내가 속한 종 자체를 반성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소설의 텍스트 내적 요소들이 그 반성능력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다.
근래 인간의 인식 속에서 동물의 위상은 ‘가축’에서 ‘가족’으로까지 변화하고 있다. 이것은 감정적 기술記述이 아니다. 지금 독자들은 인간 아닌 존재와 관련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심지어 ‘주민의 재산권’과 ‘동물의 생존권’이 충돌하는 시대8)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사회학적 팩트와 인습적 가치로서의 휴머니즘은 이전과 같이 공존하기가 어려워진다. 자연스레 인간을 둘러싼 조건도 액상화液狀化하고 있다. 이런 토대 하에서 사람들은 『28』을 읽는다. 대중독자들 스스로, 전문독자들이 담론 층위에서만 이야기해 온 ‘포스트 휴먼’을 자기 경험과 감정 속에서 환기해내고 있는 것이다.
문학계의 담론 속에서 ‘근대적’ 인간, 문학 등이 유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그와는 별도로 지금 독자들은 자신들의 방식과 이야기로 이 담론의 추상성, 관념성을 보충한다. 독자는 그저 마케팅이나 소문에 휘둘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대중이고 독자이기 이전에 개개의 고유한 인식 능력과 감응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다. 외부의 판단과 교섭하고 자기의 판단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진 존재다. 우리는 모두, 텍스트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지금 ‘정유정 현상’을 통해 다시 확인한다. 나아가, 정유정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감응은, 오랫동안 흥미나 오락물의 혐의를 받아온 소설적 요소들의 성취와 가능성을 증명한다. 또한, 문학 제도 내에 애초부터 존재한 이원화된 시스템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도 반증한다.


근대적 의미의 문학은, 시장을 아버지 삼아 출발했음에도 늘 스스로를 아버지(시장)와 불화하는 방식으로 자기 존재를 주장해왔다. 그러나 문학의 위축, 왜소화가 이야기되면서 비로소 문학의 애초의 조건(시장 안의 문학)이 본격적으로 환기되는 중이다. 문학의 이원 체제, 문학 안의 엘리트주의 역시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었다. 지금 한국문학의 좋았던 옛 시절을 염원하는 문단의 전문독자들은, 텍스트를 둘러싼 ‘현상’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는 텍스트의 내적 요소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개개인의 심상에 작용하고 시장 안에서 순환하는지까지 고려해야 하는 시대이다. 문학은 이미 담론의 관념성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는 구조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물론 문학의 시장 종속성, 출판사와 문예지 사이의 긴장감 없는 공모에 대한 경계는 늘 필요하다. 그러나 문학의 이런 조건 자체를 하찮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또한 독자는 전적으로 이 조건, 시스템 하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일반 대중독자들이 선택하는 문학 역시 의식·무의식적 교섭의 산물이다. 시장 안의 존재 역시 문학의 주체다. 그들의 의식·무의식의 구조를 주목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전문독자(문단의 관계자들)에게 적극 요구되는 역할인지 모른다.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을 구별하는 미의식 자체가 본래 역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약력
金美晶
1975년 강원 생. 2004년부터 문학평론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 전후라는 이데올로기』가 있다.
metanous@naver.com

#주석
1) 이 점을 처음 지목한 것은 이명원의 글「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그 명랑함에 묻는다」『( 프레시안』, 2011. 7.15)이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0715134650
2) <문장 웹진>「 연속좌담1. 어떻게 문학이 변하니? 변화하는 문학 환경, 변화를 향한 모색」, 2013.12.
http://webzine.munjang.or.kr/archives/9463
3) <문장 웹진> 앞의 좌담.
4) 한기호, 「정유정은 새로운 현상이다-하루키 현상과 정유정 현상」, 『기획회의』349호, 2013.8.5.
5) 인터넷 서점 ‘알라딘’과 ‘yes24’의 독자 리뷰를 참고했다. 그 중 몇 개를 본문에 인용했다.
6) 정유정, 『28』(은행나무, 2013) 43쪽. 화자인 개(링고)가 내면, 사유능력을 가진 인격체로 그려지는 첫 장면이다
7)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독자 리뷰를 참조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6607036#CommentReview
8) 「지하실에 숨을 자유, 그것도 민주주의」, 『한겨레신문』, 2013.12.13.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15312.html

글쓴이 : 김미정
작성일 : 2014/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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