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 때때로 저는 비평이야말로 인류의 촉각이어서 들끓는 현실의 문제 속으로 곧장 달려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예술이라는 상징과 은유의 문을 통과해서 말이지요. 정부나 시민단체가 거버넌스의 협의방식으로 문제의 해결을 찾듯이 비평은 삶 속으로 깊숙이 포복해 들어가 예술의 씨앗을 심는 것으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습니다. 이것은 비평이 예술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적 글쓰기와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비평이 스스로 예술이 되는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술의 현실이 삶의 실재를 형상화한 세계라면, 비평은 예술과 삶을 둘로 나누지 않고 미학적 접점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제 비평의 촉수가 얼마나 무뎌져 있는지를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최근 들어 더욱 심화되고 있는 비틀린 삶의 현실에 대해 어찌 할까 몰라 어물거리고 있었는데, 글쎄 학생들이 먼저 대자보 비평을 시작하더군요. 그것도 손글씨로 흰 종이에 직접 써서 말이지요. 그들의 언어는 따뜻했고 간결했으며 겸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표를 찌르는 힘은 아주 강했습니다. 저는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는 그 말에 그저 넋을 놓아야 했습니다. 제 비평 또한 안녕하지 못했으니까요.
천 : 아닐세. 20세기 내내 아시아는 안녕하지 못했다네. 그 안녕하지 못한 시대의 어둡고 우울한 그림자가 21세기의 서막에 잠시 드리워져 있을 뿐이야. 그림자는 결코 오래가지 못해. 이제 곧 새로운 세대의 현실이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지. 젊은 청년들이 격문의 투쟁어와 편협된 사상의 이데올로기를 내려놓고 고백과 격려의 언어로 대자보를 썼다지? 그래, 바로 그것이 21세기의 햇살이라네. 빛이라네. 예술의 언어가 터져야 하는 시간이니 곧 새로운 예술이 시작될 걸세. 이곳저곳에서 과거의 예술과 현재의 예술이 섞이고 동양과 서양을 갈랐던 철학들이 합쳐질 것이며, 자본으로 갈라놓았던 높고 낮은 예술의 기이한 계급구조도 허물어질 것이라네. 처음에는 낯설어서 갸우뚱거리겠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많은 것들이 그저 일상이 되지. 자네가 말하는 비평의 촉수는 바로 지금 시작되어야 해. 레이더를 곧추세우고 안테나를 바로 잡아야지. 그래야 숱한 말들의 진실에 닿게 될 것이야. 말 말 말, 그 말들의 진실로 비평을 써야만 비평이 날카로워진다네. 날카로운 글쓰기의 실체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말의 진실로 벼렸을 때만이 가 닿을 수 있는 아수라 같은 현실에 있다네. 자네가 넋을 놓았다던 그 대자보를 다시 보게나. 문자 언어의 말투는 어눌하나 안테나로 수신된 말의 진실이 얼마나 강한가!
천 : 사물이나 이미지를 문자언어로 바꾼다는 점에서는 미술비평과 시 창작이 다소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네. 다만 미술비평이 수행하는 문자화의 방식은 기술하기에 가깝고 시는 기술하기를 쉽게 건너뛰어서 은유로 가버린다는 것이 다르지. 미술비평에 있어 기술하기의 문제는 사실 그대로를 묘사할 뿐만 아니라 기술하기의 글 구성이 곧 비평적 해석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정교함에서 비롯돼. 묘사가 곧 일차적인 번역일 터인데, 세밀하게 묘사해놓은 번역어가 비평적 해석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그것은 묘사하나 마나 아니겠어? 글쓰기의 주체인 미술평론가는 그러므로 작품의 비평적 해석을 염두에 두면서 기술하기의 세밀함에 접근해야 해. 작품은 그것만으로 하나의 세계라네. 그 세계를 작품의 실재이자 현실이라고 생각해보게나. 그런 다음 우리가 앞서 논의했던 것처럼 현실을 직시했던 비평의 관점으로 작품을 투영시켜 봐. 자, 문자화의 번역이 일차적 과제라면 핵심은 그 다음이야. 우리가 보고 있는 작품의 표면이 실재하는 현실이라면 그 표면에 담긴 숨은 뜻이 곧 은유요 상징이지 않은가. 사실 미술비평이 자주 간과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라네. 작품 표면 뒤에 보이지 않는 작품의 숨은 뜻. 나는 그걸 우물의 깊이라고 한다네. 우물에 비친 우물 밖의 세계가 작품의 표면이라면 우물 밑으로부터 표상되어 올라온 이미지는 이미지의 심연이지. 자네가 삶과 예술을 둘로 나누지 않고 미학의 접점을 찾겠다고 했는데, 그 접점이 바로 우물의 밖과 심연이 마주친 우물 면 아니겠는가!
김 : 그렇다면 우물 밑을 보기 위해 심안을 기르는 것이 비평가의 덕목인가요? 사실 저 또한 그것이 우물 밑이든 심연이든 현실의 본질에 이르기 위한 글쓰기야말로 비평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현실과 작품을 보고 있으면 현실은 현실대로 꼬여서 길을 찾기 힘들고, 작품은 현실을 반영하지 않아서 현실에 다다르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최소한 작품의 표면을 지나서 그 숨은 뜻의 우물 밑 심연으로 들어가려면 현실과 작품이 창조적 미학으로 만나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꼭 작품이 현실 반영의 결과가 아닐지라도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예술가는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구체적 진실이야말로 모든 예술의 씨알이니까요. 비평의 역할은 그러므로 예술가의 씨알에 대한 탐색이면서 동시에 그 씨알이 품고 있는 가장 깊은 곳의 세계를 현실로 불러내 밝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평가 스스로 그 세계를 밝히려는 노력보다는 자꾸만 사상의 노예로 전락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가져온 철학자와 사상가의 문장 속으로 쉽게 예술을 귀속시켜 버리는 비평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이죠. 스스로 사유하지 않는 비평을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천 : 스스로 사유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스스로 사유한 자들의 사유를 공부하는 것이라네. 그것을 그렇게 쉽게 나쁜 것으로 몰아가지는 말게나. 오죽하면 사유하지 못하고 사유한 자들의 말에 기대려고 하겠나. 스스로 사유하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네. 비평가는 늘 타인들의 사유에 귀를 기울여야 해. 특히 깊게 사유하는 자들의 말과 글은 오래두고 보면서 그 사유의 깊이로 들어가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네. 대리 체험이지. 그런데 그런 대리 체험조차 할 수 없는 비평가도 많이 보았어. 복잡한 생각들을 궁굴리면서 마치 그런 생각들의 밑바닥이 사유의 실체라고 믿거나, 깊게 사유한 자들의 글을 단편적으로만 해석해놓고 마치 그 사유에 도달한 듯이 떠벌리는 꼴은 참 우스워. 그러니까 사유가 깊지 않으면 스스로 사유한 자들의 말과 글도 한낱 문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일세. 비평가는 그것을 경계해야 해. 오늘날 비평의 역할은 지나치게 일차적 표면의 현상에만 매몰되어온 그간의 단 채널 언어를 우물 안팎의 경계를 열듯이 쌍방향으로 뚫어야 한다는 데 있어. 한마디로 샤먼이 접신해서 공수의 언어를 터트리듯 현실과 초현실을 가리지 않는 일종의 샤먼적 리얼리즘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야. 미술비평은 미학도 미술사도 아니라네. 미술비평은 또한 논문처럼 과학적 논증의 글쓰기는 더더욱 아니야. 비평은 어디까지나 사유의 결과물이라네. 미학, 미술사를 모두 보듬어서 사유하는, 살아 있는 문학이지. 말 하나 글자 하나 스스로 사유해서 얻은 말씀을 적도록 하게나. 한 줄 두 둘, 단 세 줄의 비평일지라도 그것이 말씀으로 오지 않은 것이면 억지로 쓰지 말라는 얘기야.
김 : 샤먼적 리얼리즘이라고요? 그 말이 제 가슴에 바로 꽂히는군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샤먼이라는 말과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아요. 사실 완전히 차원이 다른 말들이기도 하고요. 샤먼이 초현실계의 주파수를 타는 사람이라면, 리얼리즘은 오래된 미학 개념이 아닙니까. 게다가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리얼리즘은 혁명적 낭만주의를 표상했던 사회적 리얼리즘을 떠올릴 뿐만 아니라 실제로 1980년대에는 그런 사회적 리얼리즘 미술운동으로서 민중미술이 전개되기도 했잖아요. 그런데 샤먼적 리얼리즘이라니 언뜻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초현실계를 상징하는 언어와 지극히 사회과학적 문예이론 개념인 언어가 하나로 그렇게 만날 수 있는 것입니까? 만날 수 있다고 쳐도 도대체 그 말의 속뜻을 알아차리기 힘들군요.
천 : 리얼리티가 무엇인가? 자네가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지, 그렇지? 자네가 여기서 경험할 수 없다고 해도 이미 경험한 세계로서 긍정 가능한 모든 실재는 리얼리티라고 할 수 있어. 그렇지 않나? 그러니 리얼리티를 우리는 다른 말로 쉽게 그냥 현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네. 이 현실의 낱낱이 다 리얼리티에 속한다는 것이야. 물론 미학에서의 리얼리티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표상된 것들만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 표상되지 않은 나머지는 리얼리티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 원칙적으로는.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네. 남겨진 나머지의 리얼리티는 기다림의 리얼리티일 뿐이야. 예술가들은 수시로 그 기다림의 리얼리티를 작품에 투영시키잖은가. 자, 이렇게 보면 리얼리티라는 것은 우물에 비친 현실의 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어. 그리고 그 풍경이 곧 예술이고. 지금까지 비평은 바로 그 풍경의 예술에 주목했던 것이라네. 풍경의 색, 풍경의 구도, 풍경 속 인물, 풍경의…. 서구 모더니즘 비평이 심화시켜온 방식은 그런 것들이지. 그런데 자네나 나나 우리 둘이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우물에 비친 풍경만이 아니라 그 우물 밑에서 표상되어서 올라온 풍경을 보자는 것이었어. 그렇다면 우물 면 밑의 심연은 어떻게 볼 수 있겠나? 그것을 볼 수 있는 방식은 오직 하나, 샤먼이 되는 수밖에는 없어. 샤먼의 눈과 혀로 보아야 해.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술가가 본래 샤먼이기 때문에 많은 예술 작품들이 그런 샤먼의 기운을 담뿍 담고 탄생한다는 점이지. 우리는 지난 20세기 동안 그것을 놓쳐왔던 것이야. 이제 해석의 지평을 넓히려면 샤먼적 리얼리즘의 작품들에 대해 똑같이 샤먼적 리얼리즘의 언어로 글을 쓰는 수밖에는 없어.
김 : 작가이자 비평가인 박찬경도 아시아고딕이라는 개념어를 쓰더군요. 샤먼과 리얼리즘처럼 동서양의 언어가 충돌해서 새로운 비평적 해석과 글쓰기를 요구하듯이 아시아고딕도 그런 개념일까요? 아시아와 고딕이라니 샤먼적 리얼리즘보다 더 그로테스크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아시아와 고딕은 너무 커서 쉽게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천 : 그가 말하기를 아시아 고딕이란 전통문화 현대화라고 하는 오래된 논의를 다른 각도에서 보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고 하더군. 고딕이라는 서구의 개념을 차용해서 슬쩍 아시아에 들이밀어보는 거야. 일본의 공포영화, 괴담, 그림들을 보면 고딕적 표현들이 자주 등장해. 일본 근대사회의 불안을 은유하고 있는 셈이지. 중국의 무협영화에는 전통 산수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암괴석이 등장하기도 해. 20세기 말부터 지어진 한국사회 아파트 정원이나 교각 밑에 설치한 인공폭포나 괴석산도 비슷한 양상인데, 폐허, 재난, 초자연적 현상, 거대자연, 외계와 같은 고딕적 현상들이 들쑥날쑥 드러나잖아. 그런 이미지들이 왜 등장하는지 알겠나? 개발주의 근대화나 초자본주의 유토피아가 낳은 깊은 트라우마 때문이라네. 박찬경의 말을 직접 들어 보게나.
"또 더 근저에는 지역의 문화나 자연, 역사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의도도 있겠죠. 어떻게 우리는 지역문화, 전통문화를 이토록 더 낯설게 느낄 수 있을까. 전통문화를 보면 '저게 뭐지'라는 느낌을 받는다는 거죠. 이것은 서구인들이 우리 전통문화를 보는 것과 같은 이국적인 느낌은 아니에요. 프로이트가 말하는 운하임리히(unheimlich), 두려운 낯설음이라는 개념에 오히려 잘 맞아요. 그러니까 친숙하기도 하지만 뭔가 두렵고, 체험에 남아 있지만 여전히 뭔가 이질적인 대상이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장 친숙한 것이 아주 잊어버릴 정도로 억압되었을 때, 그것은 일종의 트라우마로 되돌아옵니다. 전통문화도 그런 것이죠. 물론 예술에 여러 가지 길이 있겠지만, '아시아 고딕'이라는 조어로 어떤 툴, 어떤 신선한 시각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예를 들면, 김지하 선생의 저술이나 김기영 감독의 영화도 그렇게 보면 새롭게 보일 거예요."
김 : 저는 얼마 전 인천문화재단이 발간하는 문예잡지 『플랫폼』의 문화비평상 심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심사를 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젊은 신진 비평가들이 신진의 비평언어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하나같이 학습된 언어로 잘 구성된 리포트를 작성했다는 인상이었습니다. 최소한 비평을 시작하려는 신진들의 문장은 다소 덜 여물었더라도 싱싱하게 벼린 푸른 문장들이었어야 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죠. 본질에 육박해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칼(펜)을 손에서 놓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심사를 다 마치고서는 문제가 거기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아무도 미술비평이 무엇인지, 그것의 실체에 대해 면밀하게, 적확하게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죠. 비평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미술 잡지에 실린 글들조차도 비평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또 전문 미술비평을 수행하는 비평가의 수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샤먼이 되라고, 우물 밑을 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난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천 : 대자보가 대자보로 이어져서 빛이 될 것이 분명하다면 아직 희망을 버리지는 말게나. 세대가 세대로 이어지면서 과거가 현재가 되고 미래가 현재가 될 것이네만, 어제가 옳고 오늘이 그른 것은 아니라네. 침묵했던 다수가 억압으로부터 귀환하고 있는 현상을 보게나. 다행히도 귀환의 주체가 과거의 귀신들이 아니라 오늘의 청년들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하네. 그렇게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고 새로운 예술이 터질 것이며 또한 새로운 비평이 시작될 것이네. 21세기는 20세기와는 다른 현실이 기다리고 있어. 그 다른 현실의 이면을 새로운 세대들도 보게 될 것이야. 그때 그들이 그 현실의 이면을 어떻게 해석하고 비평해야 하는지 알려주시게나. 자네가 오늘 현실에 없는 나를 불러서 마치 공수를 타듯이 내 말을 타전했듯이 말이야. 안녕하지 못한 현실을 "안녕들 하십니까?"로 묻는 그들이 있어서 자네가 있는 현실이 아직 안녕하다는 사실도 명심하시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