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연탄으로 불을 떼는 아궁이가 있었다. 지금처럼 보일러에서 온수가 콸콸 나오지 않던 시절, 우리 가족의 목욕물은 모두 그 아궁이 위에 늘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는 ‘솥’에서 나왔다. 솥에다가 뜨거운 물을 끓이는 용도뿐 아니라 쥐포를 구워 먹거나 엄마 몰래 ‘뽑기’ 놀이를 할 때도 나는 아궁이와 마주해야 했다. 엄마는 연탄가스를 조심해야 한다며 늘 우리 자매들을 솥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셨지만, 호기심이 폭발하던 나는 틈만 나면 아궁이와 그 위에 놓인 커다란 양은솥을 지켜보았다. 엄마를 돕는다며 호기롭게 연탄불을 갈다가 연탄을 우당탕 깨뜨리기도 하고, 번개탄을 사오라는 심부름에 ‘네!’하고 달려 나갔다가 거스름돈으로 엉뚱한 불량식품을 사오기도 했다. 솥은 우리 집의 든든한 파수꾼이었다. 솥 안에서 보글보글 물이 끓고 있는 소리를 들으면 괜스레 마음이 푸근해지곤 했다. 무거운 솥을 번쩍 들어 연탄을 갈아내는 엄마아빠의 든든한 모습을 보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방학 때 시골의 할머니 댁에 가면 우리 집의 양은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가마솥이 있었다. 내가 평소에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양은솥의 위용이 한달음에 무너지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그 커다란 가마솥으로 별의별 요리를 다 해내셨다. 가마솥에서 10인분 이상의 밥을 짓는 것은 물론이고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서는 호박전과 동그랑땡을 해주시기도 했고, 사람을 위한 먹거리뿐 아니라 집에서 키우는 소들의 콩죽과 여물을 만들어내기도 하셨다. 나뭇가지를 긁어모아 꺼져가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내는 할머니는 눈물을 뚝뚝 흘리시면서 매운 내를 참아내셨다. 내 눈에 비친 할머니는 거대한 장작불의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여전사 같았다. 도시의 연탄보다 훨씬 뜨겁고, 커다랗고, 오래 가는 장작불 아궁이의 위용은 불이 거의 다 꺼질 때쯤 그 안에 고구마나 감자, 밤을 넣어 천연 오븐으로 활용할 때 최고의 진가를 발휘한다. 언제 고구마와 밤이 다 구워질까 노심초사하며 가마솥 아래쪽만 줄기차게 바라보던 손녀들을 향해 씩 웃어주시며, 할아버지가 나뭇가지로 톡톡 재를 떨어내어 밤과 고구마를 하나씩 손에 쥐어줄 때. 우리 자매들은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아궁이와 가마솥은 환상의 콤비가 되어 뭇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따뜻하게 해주고, 배부르게 해주는 일상의 마법이었다.

이제는 온갖 화려한 기능을 강조하는 형형색색의 냄비들 때문에 빛을 잃어버린 가마솥의 추억은 단지 어린 시절의 향수를 넘어 ‘우리가 잃어버린 모종의 따스함’을 환기시킨다. 이제는 실제 생활에서 찾아보기 정말 어려운 가마솥의 추억을 나는 문학작품을 통해 되새겨보곤 한다. 김유정의 「솥」은 솥단지 하나가 한 가정에서는 얼마나 커다란 의미를 가졌는지를 가슴 시리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남편 근식은 들병이 계숙에게 홀딱 빠져 집안 살림을 하나둘씩 빼다가 그녀에게 갖다 줄 정도로 물색없는 짓을 일삼지만, 아내는 남편의 행실을 묵묵히 참아내며 아들을 키우고 살림을 꾸려나가느라 여념이 없다. 들병이라는 특수한 직업은 말하자면 가난한 남자들이 최후에 선택하는 최악의 보루이기도 했다. 남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웃음과 술과 몸을 파는 일까지 감당해내는 상황에 치닫는 들병이들의 삶은 고단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중심에는 놀랍게도 ‘가족’이 있다. 계숙은 근식을 유혹하여 그와 연인처럼 지내면서도 항상 그 생각의 끝은 남편을 향한다.

그런 들병이의 복잡한 속내를 알 리 없는 근식은 아내의 눈을 피해 그릇이며 옷이며 온갖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들을 곶감 빼어먹듯 계숙에게 가져다주며 그녀의 환심을 사려 한다. 급기야 계숙과 야반도주를 결심한 근식은 그녀의 가장 큰 걱정이 바로 ‘솥’에 있음을 알게 된다. 당시 찢어지게 가난한 농촌 사람들에게는 솥이야말로 살림의 시작이자 끝이었고, 들병이 계숙에게는 솥단지 하나 없는 뼈아픈 가난이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솥단지 하나라도 있어야 살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계숙의 서글픈 푸념에 마음 졸이던 근식은 급기야 아내가 잠든 틈을 타 자기 집 솥단지를 스스로 훔쳐오고야 만다. 이미 근식을 통해 함지박, 맷돌은 물론 옷가지까지 살뜰하게 챙긴 계숙은 이제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계숙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남자가 아니라 단지 ‘솥단지’였다는 것을 근식이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날이 활짝 밝았다. 계숙의 남편은 떠나자며 제법 재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솥, 맷돌, 함지박, 보따리들을 한데 묶은 것이 무거워보였으나 계숙의 남편은 조금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아주 홀가분한 몸으로 덜렁덜렁 밖을 향하여 나선다. 근식은 얼빠진 사람처럼 서서 웬 영문을 모르고 뒤따른다. (…) 계숙은 앞에 가고 계숙의 남편은 그 뒤를 따른다. (…) 이때 산모퉁이 옆길에서 두 주먹을 흔들며 헐레벌떡 달겨드는 것이 근식의 아내였다. 일은 벌어졌으나 말을 하기엔 너무도 기가 찼다. 얼굴이 새빨개지며 눈에 눈물이 불현 듯 고이더니 “왜 남의 솥을 빼가는 거야?” “누껀 내가 알아? 갖다주니까 가져가지.” 하고 계숙은 근식이 처만 못하지 않게 독살이 올라 소리를 지른다.

솥, 맷돌, 함지박, 그리고 수많은 보따리들. 근식을 유혹해 얻은 계숙의 전리품들은 하나같이 아내의 뼈아픈 한숨과 눈물이 묻어 있는 정든 세간붙이들이었다. 자고 일어나보니 가장 아끼는 살림살이의 중심, 솥단지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 아내로서는 얼마나 청천벽력이었을까. 아내는 “왜 남의 솥을 빼가는 거야?”하고 눈물바람을 일으켜보지만, 당찬 들병이의 자기 변론도 만만치 않다. “누껀 내가 알아? 갖다주니까 가져가지.” 누가 갖다 주길래 가져갈 뿐, 누구 것인지는 내 알 바 아니라는 것이다. “왜 남의 솥을 빼가는 거야, 이 도둑년아!” 근식의 아내는 싸늘한 눈밭 위에 처량하게 주저앉아 목 놓아 울음을 터뜨리지만, 근식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아내를 다독인다. “아니야 글쎄, 우리 것이 아니라니깐 그러네 참.” 한 사람은 삶을 다 바쳐 가정을 지켜내려 하고, 한 사람은 어떻게든 가정을 버리고 쏜살같이 도망치려 하다가, 결국 두 사람 모두 ‘솥’으로 상징되던 가정의 평화를 속절없이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정말 눈앞에서 생생하게 목격한 것만 같은 아련한 솥의 기억도 있다. 이현수의 소설 「추풍령」은 신기하게도 과부들이 많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자라난 한 여인의 이야기다. 여인의 엄마도 역시 과부였는데, 그녀에게는 심각한 방랑벽이 있었다.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어김없이 벌어지는 엄마의 실종 사건에 딸은 이골이 난 나머지 하나밖에 없는 엄마를 무섭게 증오하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엄마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따뜻한 배려로 동네 여인들은 물론 딸의 원한 서린 마음까지 녹여버렸는데, 그것이 바로 엄마표 감자탕이었다. 엄마표 감자탕은 단지 입맛을 돋우는 음식이아니라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과 좌절된 사랑, 육체적 열망마저도 잠재우는 치유의 음식이었다.

추풍령 산비탈에서 캔 투실투실한 감자의 껍질을 벗겨 넣고 핏물을 뺀 돼지뼈와 파랗게 데친 무시래기를 넣어 시남시남 한나절을 고았다. 이윽고 국물이 질박하게 졸면 새빨간 고추와 금방 간 들깨 같은 향이 짙은 양념을 넣어 당면과 함께 한소끔 끓인 것을 뚝배기에 담아 집집마다 돌렸다.

-이현수, 「추풍령」, 『장미나무식기장』(문학동네, 2009), 59쪽.

커다란 무쇠솥을 집 밖에 걸어 놓고, 돼지뼈와 온갖 야채를 넣어 하루종일 고아내는 엄마표 무쇠솥 감자탕. 이 감자탕은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과부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고, 엄마의 방랑벽 때문에 늘 혼자인 딸의 뼈아픈 외로움까지 치유한다. 감자탕을 끓여내는 무쇠솥은 단지 음식을 조리하는 도구가 아니라 과부를 향한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과부촌 여인들 스스로의 고통을 극복하는 아름다운 치유의 마법을 간직한 비밀스런 도구였던 것이다. 이제 거대한 아파트촌이나 원룸 속에서 이웃의 얼굴도 모른 채 고립을 자초하며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은 이 따스한 가마솥의 마법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일까. 틈만 나면 수십 년째 대대로 내려오는 ‘엄마표 맛집’을 찾아 헤매는 현대인들의 이 뜨거운 열정이야말로 가마솥의 노스탤지아가 변형된 또 다른 집단적 그리움의 흔적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