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덧없다는 것. 이는 절망한 이들의 말이 아니라 결코 절망할 수 없는 이들의 말이다. (…) 희망을 내일에 거느니 오늘에 걸고, 희망을 거기에 거느니 여기에 걸겠다. 희망은 지금 사막을 뚜벅뚜벅 걷는 내 다리에 있다. 이 글을 쓰던 날, 나는 대한문 농성촌의 한 의자에 누군가 적어놓은 희망을 보았다.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 ‘책을 내며’ 중에서

글이 아니라 ‘말’이라 했다. 강연이나 사건의 현장에서 주고받은 말을 붙들어 담은 것이라 했다. 저자의 한 일간지 인터뷰1)를 보니 ‘진실한 말’을 좋아한단다. 그가 추구하는 ‘진실한 말’은 사실과 일치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말’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삶과 행동과 일치하는 말이 사회를 중요하게 변화시킨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삶과 행동을 따지다 보니 말과 글, 그리고 사유는 사건의 실제 상황과 지속의 과정, 그 실재의 삶과 생명에 근거한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말은 따로 꾸밈이 없이 담백하나 현장의 진동과 상황의 파동이 느껴지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개념과 용어로 단정하게 이야기, 혹은 논리를 전개하지만 그러한 말이 놓인 사유의 맥락은 입체적인 현실에 닿아있고 인간적인 온도는 높다.

‘철학’과 ‘철학하기’

저자는 우선 플라톤과 디오게네스의 사례를 통해 철학이란 삶과 일치해야 한다는 입장을 펼쳐 보인다. 두 철학자 모두 자기 삶으로 철학을 입증한 사람들이고, ‘철학의 실재는 바로 삶에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처럼 철학의 본질에는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던 플라톤과 디오게네스의 실제 철학적 실천으로서의 삶은 전혀 달랐다.

현실 정치에의 혐오와 스승의 처형에 따른 충격으로 플라톤은 다수의 시민보다는 ‘힘 있는’ 한 사람을 설득하여 세상을 바꾸는 편이 낫겠다는 ‘철인군주론’의 입장을 세우고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어 철학하는 왕을 찾고 만들려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견디기 힘든 좌절을 겪으면서도 두 번, 세 번 그는 말이 아닌 행동하는 철학자로서의 책임을 다한다. 그런 과정에서 플라톤은 ‘앎’이란 오랜 사귐과 공동생활을 통해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서 생겨나 스스로를 길러낼 것”이라는 가르침을 남긴다. 그에 반해 견유주의자로 분류되는 디오게네스는 권력자의 탐욕에 언제든 거침없이 이를 드러내고 물어뜯는 정찰병임을 자임했다. 그는 적은 물론이고 친구를 위해서라면 친구 역시 물어뜯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디오게네스는 이런 용기와 더불어 웃음과 유머를 겸비한 드물게 고귀한 철학자였다 한다.

책의 저자는 플라톤보다는 디오게네스의 입장에 마음을 기울인 사람이다. ‘길’에서 손수 샐러드를 씻는 디오게네스로부터 법 이전에 만물과의 ‘평등’함을, 어떤 이해관계나 사회계약 이전의 ‘연대’의 원리를 읽어낸다. 그리고 ‘궁정’으로 간 플라톤과 달리 그는 완전히 열려있는 공적 장소인 ‘길’을 철학하는 장소로 삼아 모든 행위를 공적으로 하고자 했던 철학자란 점에 주목한다. 또한 서로 상반되는 플라톤과 디오게네스의 입장에서 복종과 권력, 자율과 자기 통치 능력으로서의 서로 다른 힘과 자유개념을 집어낸다. 이 대목에서 철학의 목표와 정치의 목표가 수렴되고 따라서 우리는 ‘철학하는 왕’을 자신에게 요구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권유한다. 그것이 바로 철학과 정치, 민주주의가 함께 가는 길이며 그래서 ‘철학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간의 별지기인 필자에게 처음 플라톤의 철학을 가르쳐준 스승은 당시 대학에서 쫓겨난 거리의 철학자였다. 그 선생 역시 기왕에 알고 있던 ‘철학’이 아니라 동사로서의 ‘철학하기’를 일깨워주었다. 내가 배운 플라톤과 저자가 말하는 플라톤 철학은 그 내용은 같지만 실천적 앎으로서 서로 다른 지점에 밑줄을 그은 듯하다. 하지만 철학이 곧 그 사람의 삶이라는 저자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최근 출간하는 저서마다 베스트셀러가 되고 수많은 청중을 몰고 다니는 인문학 강의로 한 철학자가 새삼 열띤 비판과 옹호의 도마에 올랐다. 그리고 교수신문에 실린 한 비평에서는 그를 ‘대중 철학자’로 정의하며 이 책의 저자 고병권을 ‘거리의 철학자’로 대비시켰다.

철학의 외부에서 삶의 조각(彫刻)으로서 철학하기를 이야기하는 이 ‘거리의 철학자’는 대학에서의 ‘앎’과 ‘배움’의 본질에 관해서도 엄정한 현실 비판의 시각을 가지고 분석해낸다. 즉 ‘앎은 삶을 구원해야’ 하며, ‘어떤 선험적 권위나 제약을 인정하지 않는 무조건성 속에서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질문들을 던질 용기, 진리보다는 진리를 말할 용기, 진리의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를 여는 용기’를 배워야 한다고, 그런 실험의 장, 배움의 공동체가 바로 대학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함께—삶’, 배움 이전의 배움, 운동 이전의 운동

책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이 두 장이 철학과 대학에 관한 저자의 직접적인 생각이라면 그 다음 장에 실린 「탈시설, 그 ‘함께-삶’을 위하여」는 강연 내용을 옮긴 것으로 ‘시설’에 관한 일반 독자의 무지와 무관심을 일깨우고 우리 사회에 가려진 얼굴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안겨주는 매우 중요한 글이다.

또한 노들야학과의 만남의 경험과 노들야학 개교 20주년 강연을 정리한 <밤에 열린 어느 장애인 학교>, <책을 읽어주던 남자-배움의 사건으로서의 책 읽기> 등은 ‘가르친다’는 행위의 실제 의미, 진정한 ‘배움’이란 무엇인지, 지식이 아닌 각성으로서의 앎에 관하여, ‘상황’과 연계되는 ‘사건’으로서의 ‘독서’에 관하여 무척 감동적으로 독자를 설득한다. 중증 장애를 가진 학생들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함께 읽는 일화는 책을 덮고 난 후에도 흥분과 기쁨으로 가슴을 떨리게 했다.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의 내용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사실로 확인되는 ‘사건’이자, 강단에 서는 사람으로서의 원칙을 새삼 가다듬게 하는 반가운 모범이었다. 이외에도 월가 점거운동에 대한 보고 형식의 글, 밀양 싸움의 의미를 다룬 「탄원하는 노인들」, 그리고 전태일을 비롯한 ‘사람’들 이야기 모두 현장과 현실, 실천에 근거한 철학하기를 배울 수 있다. 무엇보다 분명 글을 읽는 독자에게 깨달음과 배움의 사유를 선사하는 책인데도 저자의 ‘말과 글’ 자체는 누굴 가르치려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다. 치열한 현장성과 정치한 사유를 담고 있으면서도 목청이 높지 않고 그 톤이 따뜻하다. 그것이 이 책에서 배우는 또 하나의 미덕이다.

“삶을 읽을 수 없는 책 읽기가 삶에 어떤 배움을 줄 수 있을까.”

이미지 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