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근현대 인쇄전시관으로 가려면 몇 가지 시간의 단층을 건너야 한다. 중부고속도로 서청주 인터체인지를 나와서 왼쪽으로 돌면 길 양쪽으로 첨단의 현대가 펼쳐진다. 오른쪽에서 백화점과 복합쇼핑몰, 초고층 아파트가 소비와 생활의 현대를 전시하고 있다면, 왼쪽으로는 반도체 생산단지가 쉴 새 없이 디지털의 미래를 조립하고 있다.

이곳을 지나자 시간은 돌연 수십 년 뒤로 뒷걸음친다. 거리의 풍경은 운문의 유장함에서 경망스런 산문체로 바뀐다. 조금은 어수선하고 소란스런 70, 80년대쯤의 소도시를 지나고 있는 인상을 받는다. 쇼윈도 뒤편의 일상이 그러하듯이, 지극히 우아하고 세련된 소비를 위해서는 일상의 고단함과 노동의 굴욕을 참고 견뎌야 한다.

지루한 노동의 끝에 몽상이 열리는 것처럼, 이제 거리는 신화적인 시대로 건너뛴다. 고려시대의 신앙과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청주고인쇄박물관과 흥덕사가 바로 코앞이다. 고인쇄박물관과 금속활자 주조 전수관 사이를 지나면 목적지에 이른다. 근현대 인쇄전시관은 커다란 돌로 만든 납작한 상자 두 개를 포개 놓은 것 같다. 건물 전면에는 ‘1894 갑오개혁의 꿈: 근현대 인쇄출판 특별전’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원뿔 모양의 조형물이 서 있다. 노주환의 <바벨탑1446>이란 작품으로, 금속활자 수천 개로 탑을 쌓은 것이다. “찬란한 금속활자 문화를 꽃피우고,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한글을 만들어 사용한 우리 민족의 창조성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바벨탑을 세우려던 인간의 불경한 오만보다는 문자와 언어로 인류를 하나로 묶으려 했던 고대인들의 열망을 활자문화의 은유로 표현해낸 것이다.

1층 상설전시실은 먼저 사람에 대한 기념으로 시작한다. 입구 벽면에는 1992년 활판인쇄기 등 6점을 기증한 채복기를 비롯해서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인쇄기기의 기증자 17명(단체 포함)의 명단이 박혀 있다. 그들의 이름은 낯설지만, 이들의 아름다운 기증이 없었다면 이 공간은 미완이거나 불구로 남았을 것이다.

전시 공간은 크게 근현대 인쇄문화 발달사, 근현대 인쇄기 발달사, 현대의 인쇄, 미래의 인쇄 등 네 부분으로 나누어 근대 인쇄문화의 서사를 들려준다. 입구를 지나면 연표와 함께 조사시찰단 파견, 박문국 설립, 일제강점기의 인쇄소, 6·25전쟁기의 인쇄소, 국가재건기의 인쇄소 등 근현대 인쇄의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대목을 축소 모형으로 재현하고 있다. 인물의 표정이나 복식, 공간의 배치, 기계의 형태 등에서 고증과 생동감을 위해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줄지어 늘어선 납활자 인쇄 기기들은 상설전시관의 압권이다. 납활자를 제작하기 위한 원도와 자모부터 벤턴 조각기, 활자주조기, 문선대, 조판대, 활판교정기, 활판과 지형, 활판인쇄기 등에 이르기까지 납활자 인쇄술의 모든 공정을 담당했던 기계와 기기들이 원형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1880년대 박문국부터 1970년대 을지로 인쇄 거리까지 한 세기 동안 온갖 정신과 영혼의 골짜기들을 누비고 다녔던 활자와 기계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기계는 멈추고, 활자는 정신이 탈각된 채 물질로만 남아 있다.

현대와 미래의 인쇄를 보여주는 전시는 부록인 셈이지만, 젊은 세대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모니터 위에서 4가지 색이 재현되는 과정으로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오프셋 인쇄의 원리를 보여준다. 팝업북, 입체인쇄, 전사인쇄, 그라비어인쇄(화폐인쇄), 카드 인쇄, UV 인쇄 등 인쇄가 일상에서 얼마나 다채롭게 쓰이고 있는지 알려준다. 잉크·종이·글자가 없는 인쇄, 3D프린터, 플렉서블 디스플레이까지 인쇄의 미래도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상설전시실이 소멸될 운명의 기계문명에 대한 기념비라면, 2층의 기획전시는 세상의 광채와 인간의 고통을 빚어냈던 언어와 상상에 바치는 헌사다. 올해의 간지에서 착상한 ‘1894 갑오개혁의 꿈: 근현대 인쇄출판 특별전’은 개화기부터 해방기까지 당대의 저명한 출판사와 인쇄소에서 간행한 신문, 잡지, 단행본 120여 점을 모았다. 여기에 전시된 인쇄물들은 모두 아래층의 활자와 인쇄기의 빛나는 산물이라는 점에서, 공간과 전시의 완결성을 이룬다.

『충효경집주합벽』(광인사, 1884)부터 박두진·조지훈·박목월의 『청록집』(을유문화사, 1946)까지 각각의 책들은 저마다 지은이의 재현 불가능한 개성과 장정가의 세련된 미적 감각, 그리고 당대의 시대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한불자전』(요코하마 레비 인쇄소, 1880)에 담긴 서양 선교사들의 헌신적 열정, 『금수회의록』(안국선, 횡성서적조합, 1908)의 인간 세상의 어리석음에 대한 신랄한 조롱, 『근원수필』(김용준, 을유문화사, 1948)의 그 군더더기 없는 지적 통찰과 장정의 우아한 세련미 등은 오늘의 우리가 감히 모방할 수 없는 경지를 보여준다.

이 특별전은 청주고인쇄박물관과 근대서지학회(회장 전경수)가 공동으로 개최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근대서지학회는 근현대의 인쇄·출판·도서문화를 연구하고 책을 수집하는 이들의 학문적 공동체로서 학회지 『근대서지』를 발행해 오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근대 인쇄 출판의 연구와 수집에 전념해 온 이들의 폭넓은 지식과 안목을 전시 현장에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청주고인쇄박물관의 전략적 선택으로서 탁월한 것이었다.

지난 3월 20일 문을 연 근현대 인쇄전시관은 외화내빈의 천박함만을 과시할 뿐인 자치단체장의 치적전시용 박물관과는 전혀 다르다. 넓지 않은 공간을 최신 전시 기법으로 공들여 꾸미고 전시품을 효율적으로 배치했다. 각각의 전시품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인쇄 출판의 전체 맥락 속에서 그 기능과 역할, 의미와 가치를 정성 들여 설명한다. 근대 인쇄 출판의 개성과 다양성을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을 골라 진열한 특별전은 우리 활자 문화의 정수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인쇄박물관의 오랜 역량이 쌓여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개관과 전시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느라 그랬을 테지만, 아직 안내 책자도 없고 기획전 전시도록도 관람객들을 위해서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더욱이 전시를 안내하고 해설할 수 있는 전문 인력도 찾아 볼 수 없다. 특히 기계의 작동 원리를 알지 못하면 인쇄기는 그저 철로 만들어진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파주 출판도시의 활판공방과 서로 교류하면서 관람객들에게 수준 높은 전시 해설을 해줄 수 있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나라 인쇄 출판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전통의 지속과 단절이 거듭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목판 인쇄의 전통은 식민지 시대까지 장기 지속적으로 그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신라의 인쇄 문화 전통은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직지』로 표상되는 금속활자 인쇄문명을 낳았다. 조선시대는 활자문화의 절정기였다. 성리학적 교양을 체득한 조선의 국왕은 갑인자로 대표되는 금속활자 인쇄문화를 주도했고, 향교와 서원, 사찰, 문중은 저마다 목활자와 목판 인쇄로 인문적 사유와 유학의 전통을 심화·확산시켜갔다.

하지만 인쇄 문화의 뿌리 깊은 전통은 근대에 들어서 급격히 단절되고 만다. 정치의 타락은 문화의 쇠퇴를 낳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우리 근대의 박진감 넘치는 드라마는 그것의 살아 있는 증거다. 우리는 개항과 더불어 일본을 매개로 서양의 압도적인 근대문물을 수입하는 데 급급했다. 전통적인 인쇄 방식은 자취를 감추고 서양식 납활자 인쇄술이 득세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 세기의 영광도 갑작스레 종말을 맞이했다. 1980년대에 활판인쇄 전통도 맥이 끊기고 이제는 오직 파주의 활판공방에서만 간신히 살아남아 버티고 있다. 오늘날은 오프셋 인쇄가 인쇄계를 평정하고 있지만, 디지털 시대의 압력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다.

활판인쇄 문화와 단절되면서 우리는 그 동안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종이 위에 꾹꾹 눌러서 박은 듯한 활자의 두드러진 촉감, 종이와 활자 사이의 선명한 대비감, 그것에서 생생하게 살아나는 입체감.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다. 오늘날 우리가 매일 만나는 오프셋 인쇄물은 종이의 평면을 미끄럽게 스쳐가기만 할 뿐 활자 고유의 개성과 삼차원의 감각을 충실하게 재현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어쩌면 비정한 기계가 수공업적 장인의 수고를 몰아내고서 성취한 역설의 전리품인지도 모른다.

인쇄와 출판이 인간의 정신에 담긴 지식과 상상을 지면 위에 되살리는 하나의 방식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그렇듯 입체적이고 개성적이며 생동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촉각적 입체성과 물질성을 버린 채 생산의 효율성만을 취하고 말았다. 어쩌면 그마저도 디지털 방식의 전자책이나 스마트폰 앱으로 흡수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인류가 생존하고 인간이 사유하는 한, 활자 문화의 오래된 전통과 거기에 담긴 지혜는 어떤 형식으로든 거듭 되풀이해서 읽히고 새로운 방식으로 생명을 이어 갈 것이다.

오늘날처럼 디지털 문화가 활자 문화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다시 청주로 가야만 한다. 인쇄출판문화의 전통과 현재와 미래를 근본으로부터 생각해 보고 상상해 보고 성찰하고 싶다면 그래야 한다. 거기에는 옛날 사람들이 꿈꾸고 상상하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여전히 손으로 더듬고 만질 수 있는 감각의 형식으로 살아남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