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어의 오염

최근에도 여러 차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극우 사이트 ‘일간베스트’(이하 ‘일베’)에서 ‘민주화’를 비추천, 혐오의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태는 단지 일베만의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대학에서 무언가 활동을 할 때 ‘연대’,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 등과 같은 언어들은 ‘운동권’ 용어로 낙인찍혀 버린 지 오래여서 단도직입적으로 사용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예를 들어 (모두로부터 동정을 받는) 열악한 임금과 대우를 받는 학내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에 학생들이 연대하는 상황을 ‘투쟁’과 ‘연대’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거부감을 일으킨다. 이러한 용어들이 가치 이전에 사실을 기술하는 것임에도 말이다.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더 좋은 용어와 표현을 찾아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연대’를 ‘연대’라고, ‘투쟁’을 ‘투쟁’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까지 영악해져야 좋단 말인가? 공자님의 말씀대로 어떤 의미에서든 ‘정명(正名)’이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민주화’라든가 ‘연대’와 같은 용어들이 오용되고, 금지되고, 억압되는 이와 같은 사태를 ‘언어의 오염’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와 같은 언어의 오염은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대안에 대한 사유를 가로막는 기제가 되고 있다. 한편 이와 같은 한계상황은 단지 어떤 금지나 억압의 결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언어의 오염은 어떻게 초래되었는가?

다시 일베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일베에서 ‘민주화’가 경멸적인 용법으로 사용되는 것은 일베에서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이 비하당하고 조롱당하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은 역으로 한국에서 민주화라는 용어가 5.18이라는 역사적 고유명, 혹은 광주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의 타락이 역사적 고유명이 환기하는 역사적 기억의 타락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필자가 『일베의 사상』에서 지적했듯이 5.18이라는 역사적 기억은 일베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지점들 중 하나이다. 일베가 그러한 역사적 기억을 헤집으며 그것을 조롱하고 격하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화’라는 용어에 대한 오용과 타락을 부추기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언어의 타락(예컨대 민주화의 경멸적 용법)은 바로 ‘고유명(예컨대 5.18)’의 문제로 귀착된다.

2. 고유명의 언어철학

그렇다면 고유명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고유명에 대한 언어철학적인 우회로를 취할 수 있다. 고유명의 사전적 정의는 한 인물, 장소, 사건, 등의 불가분individable의 개체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일본의 학자 가라타니 고진은 ‘고유명’에 대한 사유를 전개한 바 있다. 그는 고유명에 관해 말하면서 우선 ‘이 나’라는 고유명에 대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가라타니는 『탐구 II』에서 ‘이 나’의 문제를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나’라는 것이 아니다. 또 ‘이 나’가 특수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전혀 특수하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흔한지를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니라고 느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나’의 ‘이’이지 나라는 의식이 아니다. 따라서 철학 언어 속에 ‘이 나’가 빠져 있는 이상 ‘이것’이 빠져 있다고 바꿔 말해도 상관이 없다. 예컨대 내가 ‘이 개’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개라는 유(類, 일반) 속의 특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바둑이라 불리는 이 개의 ‘이’것임은 외양과 성질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다만 ‘이 개’인 것이다.”1)

이상과 같이 가라타니가 말하는 ‘이 나’ 혹은 ‘이것’은 특수하거나 유별난 성질을 지닌 개체individual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특수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類, 일반) 속에 있는 개별성에 지나지 않는다. 개체가 아무리 분할 불가능in-dividable한 성질을 갖는다 해도 그런 성질은 그것이 속한 상위의 일반적인 범주 속에 있다. 예컨대 바둑이는 얼룩덜룩한 개라고 해도 그것은 얼룩덜룩함이라는 일반적인 술어를 빌려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유명의 고유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답변은 버틀란드 러셀이 제안했던 대로 고유명을 확정기술로 대체하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여기서 지극히 일본적인 예를 든다. 가령 러셀과 같은 철학자는 개체의 고유명을 ‘확정 기술’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쓰메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쓴 소설가’, 후지산은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과 같은 ‘단칭명제’로 환언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후지산과 나쓰메는 러셀이 ‘논리적 주어’라고 말한 ‘이것’으로 지칭할 수 있다. 러셀은 여기서 말하는 ‘이것’이 뒤따라오는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쓴 소설가’라는 확정 기술에 의해 그 내용이 부여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서 ‘이것’은 결국 한 개체를 향한 의식의 지향으로 환원된다. 그런데 언어철학자 솔 크립키Saul Kripke는 다른 방식으로 이와 같은 러셀의 사고를 비판했다. 크립키는 『이름과 필연』에서 고유명이 러셀이 말한 확정기술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현실성-가능성이라는 ‘양상modality’의 문제를 끌고 온다. 여기서 고유명은 ‘가능세계’라는 한 가지 양상을 도입해야만 비로소 제대로 사고할 수 있다.

“확정 기술이란 나쓰메 소세키를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쓴 소설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 따라서 기술이론은 고유명을 단칭 언명과 동일화하는 것이다. 현실세계의 관점에서 보는 한 이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따라서 고유명은 확정 기술로 치환될 수 있다. 그러나 가능 세계를 도입하면 이런 치환은 성립되지 않는다. 예컨대 나쓰메가 작가가 아니었을 경우(세계)를 가정해보자. 이 경우 ‘나쓰메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쓴 소설가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처럼 가능성 또는 가능세계를 고려해서 현실 세계를 보면 결국 고유명과 확정 기술의 차이가 확실해질 것이다.”2)

가라타니의 요점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쓰지 않은 나쓰메 소세키를 상정하더라도 그를 여전히 ‘그’ 나쓰메 소세키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은 ‘이러한 가능세계는 어디에서 오는가?’이다. 여기서 우리는 크립키의 가능세계론이 ‘SF’적인 세계관과 무관하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가능세계란 현실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가능세계와 변별되는 현실세계라는 것은 결국 여러 가능성들 속에서 파악된 현실이다. 우리는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왜 저렇게 되지 않고 이렇게 되었는가’를 자연스럽게 묻는다. 우리가 무언가를 현실이라고 말할 때 그러한 가능성들을 부지불식간에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 가능세계란 바로 그렇게 현실 속에서 음미된 가능성으로서 알려지게 된다. 가라타니 고진이 『탐구Ⅱ』에서 예시하듯이 이를테면 소설가가 아닌 ‘건축가’로서의 나츠메 소세키 역시 그러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건축가로 살아가는 나츠메 소세키라 하더라도 그와 같은 소세키는 그가 살아가던 당대의 일본의 역사적 공간 속의 가능성들을 살아가는 ‘바로 그’ 나쓰메 소세키일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가능세계 속의 소세키는 자의적인 설정 속의 인물일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요컨대 여기서 ‘가능세계’란 현실 속에서 음미된 가능성이며, 그것은 바로 고유명으로 지칭되는 인물과 장소 그리고 사건 등에 대한 기억을 갖는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알려지는 것이다. 또한 그와 같은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역사적 경험을 동반한다. 여기서 예로 든 ‘나츠메 소세키’는 일본의 역사적 경험을 환기한다. 그렇다면 ‘가능세계’와 ‘고유명’을 연관시킨 이와 같은 가라타니의 논의는 한국의 경험과 어떻게 대입될 수 있는가?

3. 열사의 이름

나는 ‘고유명’에 대한 가라타니의 논의를 보면서 곧바로 ‘열사’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었다. 한국에는 민주화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산화해간 여러 열사들이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열사’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여러 대학에서 열사의 이름을 딴 생활도서관(학생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인문사회과학 도서관)들을 보면서이다. 성균관대 김귀정 생활도서관, 서울대 법대 이소선 생활도서관, 연세대 이수석 생활도서관이 그 예이다. 무엇보다 고 김귀정과 고 이수석 님은 90년대 학원투쟁 과정에서 폭력진압으로 숨졌다. 이들 생활도서관은 열사에 관한 정기적인 추모제를 열고 있지만 오늘날 학내에서 추모제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추모사업 자체도 진행이 점점 어려워지고 실정이다.

그렇다면 열사를 추모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열사를 추모한다는 것은 몇 날 몇 시 어느 자리에서 숨져간 그/녀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때 그곳에서 스러져가지 않았더라면 살아가게 되었을 그/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가라타니 식으로 표현하자면) ‘가능세계’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고인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면) 만일 그/녀가 그날 그 자리에서 산화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숭고한’ 열사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알 만한 사람들은 누구라도 알겠지만 어떤 이의 살아생전 운동하는 모습이 실제로는 그다지 숭고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숭고한 대의를 위해 운동을 하는 한 개인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천박하고 저속하게 행동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면서 어떻게 사람들과 갈등하고 어울렸는지를 알고 있다. 무엇보다 그와 같은 살아생전의 기억을 공유하는 것은 장례식의 중요한 (희극적인) 기능 중 하나이다. 그와 같은 기억에 기반하여 그 사람이 ‘여전히 살아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무슨 (농담 섞인 혹은 어이없는) 말과 행동을 했을까’와 같은 가능세계를 상정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그와 같은 농담이 장례식의 의미를 더욱 ‘무겁게’ 만드는데, 우리는 그와 같은 농담을 하면서 살아 있는 이들이 고인을 멋대로 미화하거나 의미부여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에 기반하여 역으로 생각한다면 열사 추모제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것은 그와 같은 살아생전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이 점점 적어져 간다는 것, 그리고 그에 기반한 가능세계를 상정해서 고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열사의 모습을 더욱 더 숭고하게 만드는 동시에 역으로 추모제의 의미를 점점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열사에 대한 살아 있는 이들의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오히려 살아있는 측에서 멋대로 이입할 수 없는 삶의 모습, 그들이 살아있었다는 가정 하에 열려 있는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열사를 추모한다는 것은 그/녀를 ‘고유명’으로서 명명하고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살아생전의 역사적 기억에 기반한 ‘가능세계’를 상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가능세계는 고인과의 기억을 공유하는 타인과의 연대 하에서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4. 고유명과 가능세계

결국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떤 고유한 단어가 오염되는 것은 그것이 원래 연결되어 있었던 ‘역사성’을 잃은 순간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그 언어가 원래의 역사적 경험에 기반한 ‘가능세계’와의 접점을 잃어버린 순간이다. 앞서 말했듯이 (적어도 어떤 세대에게 있어서는) ‘민주화’라는 것은 ‘광주 5.18’이라는 역사적 고유명에 대한 기억과 연관이 되어 있다. 그리고 특정 시기까지 민주화라는 단어의 활력은 바로 광주 5.18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과 별개로 그 사건이 알려준 (좌절된) 가능성, 즉 5.18 당시에 봉기한 용기 있는 시민들이 더 나아갈 수 있었던 지점들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에 기반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5.18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공식적인 의례로 추모되고 기려지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추모행사에서 5.18에 대한 역사적 기억에 기반한 ‘가능세계’들을 상상할 여지는 희박하다. 5.18과 더불어 민주화라는 단어가 넷 상에서 쉽게 희화화되는 것은 바로 ‘5.18’과 ‘광주’라는 고유명이 지닌 가능세계와의 접점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책임은 광주의 의미를 의식적으로 기리고 추모하는 사람들에게도 있다. 단지 소위 ‘일베충’들을 탓할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염된 언어에서 ‘정명’을 회복하는 좋은 방법은 어떤 다른 계몽작업에 의한 것만도 아니고, 의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만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해당 언어가 맺고 있었던 원래의 역사적 연관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역사적 연관을 회복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몇 번의 추모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몇 번의 행사를 더 여는 것도 아니고, 일상에서 그와 같은 역사적 경험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가능한 세계’에 대한 상상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정치적 실천과 그것이 동반하는 정치적 상상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여기서 가능한 구체적인 정치적 상상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언어는 어떠한 언어이든지간에 죽은 언어이다. 그러한 죽은 언어가 지닌 원래의 역사적 의미가 얼마나 숭고하든 간에 그것이 희화화되고 타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