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성, 장소애, 장소상실.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내 사전에는 없던 용어다. 저 복합명사의 앞자리에 있는 장소는 낯익다 못해 진부한 단어였다. 그것도 언제나 ‘일시’ 뒤에 따라붙는 이차적 존재(일시 및 장소)여서 더욱 친애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장소가 갖는 의미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초청장에 장소가 기재되어 있지 않거나 약속을 정할 때 서너 개의 장소를 잡는다고 상상해 보라. 사회적 관계에서 장소의 역할은 무시할 수 없다.

이동통신이 일상생활 안으로 성큼 진입할 무렵, 한 기업의 광고 카피가 장소를 새삼 각인시켰지만 그때도 웃어넘겼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터진다는 휴대전화 CF말이다. 돌이켜 보면, 전화로 대화하는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 유선전화 시절에는 “누구누구 계세요?”라고 물었다. 수신자의 장소가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전화 받는 장소와 상황을 알 수가 없으므로 이렇게 묻는다. (상대가 연장자일 경우) “지금 전화 받기 괜찮으세요?” (상대와 친할 경우) “지금 어디야?” 이동통신 환경에 한정한다면 고정된 장소는 사라졌다.

장소의 의미가 내 사전에 등재된 계기는 한참 뒤였다. 뜻밖에도 시(詩)가 주선했다. 김소월과 백석의 시를 비교분석하는 논문을 준비하다가 장소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두 시인을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근거 중 하나가 근대성(modernity)이었다. 널리 알려졌거니와, 근대성을 구축해 온 핵심 요소 중 하나가 시간과 공간 의식이다. 근대는 시공간 의식을 급격하게 재구성하면서 전근대와 결별했다. 두 시인의 시에서 시공간 의식은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소월 시에서는 시간이, 백석 시에서는 공간이 우선으로 보였다. 그런데 백석의 공간은 엄밀하게 말해 공간이 아니고 장소였다. 백석 시는 장소에 민감했다. 장소애(場所愛)가 각별했다.

그때부터 장소는 내게 새로운 창(窓)이었다. 장소를 통해 도시를 새롭게 볼 수 있었다. 도시와 인간의 보이지 않는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장소라는 창을 통해 내 삶의 지도를 작성할 수 있었다. 내 삶의 영역에는 장소, 즉 좋은 장소가 없었다. 도시로 들어온 이래, 도시에서 밥벌이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이래, 장소에 대한 감수성은 빠르게 퇴화했다. 장소감(場所感)이 남아 있다고 해도 왜곡돼 있었다. 도시에서 사는 것은 장소를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이었다. 장소에 예민한 자, 좋은 장소에 대한 집착이 강한 자, 그러면서 통장 잔고가 없는 자, 도시에서 살아가기 어렵다.

누가 장소를 두려워하지 않는가

인간과 사회에서 장소의 위치를 재발견한 것은 지난 세기 중·후반 등장한 인문지리학이다. 이-푸 투안(Yi-Fu-Tuan)과 함께 인문지리학의 지평을 열어젖힌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는 장소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장소는 인간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가 융합된 것이고, 우리가 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의미 깊은 중심이다. (…) 장소는 의미, 실재 사물, 계속적인 활동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장소는 추상이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공간과 장소를 구분하지 않지만 인문지리학에서 공간과 장소에 대한 정의는 분명하게 갈라진다. 공간은 사막이나 무인도처럼 인간의 경험과 의식이 개입하지 않은 곳이다. 반면 장소는 고향집이나 오래된 도시처럼 개인이나 집단이 뿌리를 내리고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일궈내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집에서 태어나 마을에서 정체성을 형성하고 도시로 나간다. 우리는 작은-사적 장소에서 큰-공적 장소로 들어가면서 사회적 주체로 성장하고, 두 장소를 왕래하면서 자기 삶을 영위한다. 우리의 삶과 사회는 장소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로 넘어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근대도시가 ‘장소화의 역설’이라는 악순환에 갇히면서 우리는 좋은 장소의 주인이 되는 자격을 박탈당했다. 산업 자본주의의 본질인 팽창 욕구는 도시의 외형적 확장을 부추겼다. 도시는 자연, 즉 공간을 장소화하면서 몸집을 키운다. 문제는 도시의 확장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확장의 성격 내부에 있다. 재개발과 신도시 건설이 장소성을 상실한 ‘나쁜 장소’를 지속적으로 양산하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오래된 마을을 깔아뭉개고 아파트단지나 대형 할인매장, 또는 위락시설을 세우지만, 불행하게도 거기에는 장소성이 입주하지 못한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구축된 건물이나 시설, 지역(대부분 키치적 요소가 다분하다)에서는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안전하지도 않으며, 이웃과 관계를 맺기 어렵다. 그런 장소는 더 이상 장소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소성을 상실한 비장소가 증가하는 이유는, 도시 연구자들이 줄기차게 지적해 왔듯이, 공간을 장소화하는 주체, 다시 말해 도시 개발 계획(정책)을 수립하는 주체가 일반 시민이 아니고 소수 권력이나 자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가 커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시민을 위한 좋은 장소는 줄어든다.

늘어나는 1인 가구와 늘어나는 커피숍

‘집은 사는 것이 아니고 사는 곳’이라는 격언이 있다(격언이 세상을 바꾸는 경우는 드물다. 오래된 격언일수록 더욱 그렇다). 집이 거주지가 아니고 부동산으로 전락(경제 논리에서는 반대로 격상)하고, 주거 형태가 단독 주책에서 아파트로 이동하고, 그리하여 평균 3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되자, 집안에서 좋은 장소는 사라졌다. 30평대 아파트만 해도 중년의 가장을 위한 자리는 없다. 거실 소파를 독차지하고 리모컨을 독점할 수만 있어도 ‘가부장’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환경에서 자기 삶을 성찰하고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자기만의 장소가 집안에 있다면, 도시에 좋은 장소가 많지 않아도 견딜 만할 것이다. 반대로 도시 곳곳에 혼자 쉴 만한 장소가 있다면 설령 집안에 자기 자리가 없어도 지낼 만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일상적 삶에 괄호를 치고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혼자만의 장소는 고사하고 산책을 할 수 있는 거리, 자전거를 타고 오갈 수 있는 도로조차 만나기 힘들다.

도시가 요구하는 다양한 탈(persona)을 벗어버리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심각한 사태를 유발하는 근본 원인이다. 열악한 실내·외 환경은 그대로 그 환경을 경험하는 당사자의 내면으로 투사된다. 좋은 장소가 없으면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없고, 좋은 장소-시간을 확보할 수 없으면 좋은 ‘나’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다. 외적 장소의 질적 수준은 결국 개인의 내면, 즉 정신건강의 문제와 연관된다. 나쁜 장소는 나쁜 감정을 북돋운다.

최근 몇 년 사이 도심은 물론, 대학가와 주택가 곳곳에 하루가 다르게 커피숍이 늘어나는 현상도 장소성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1인 가구가 400만을 넘어섰단다. 물론 그 중 절반이상이 노년층이다. 나머지 200만에 가까운 1인 가구 대부분이 고소득 전문직이라면 모르겠지만, 그중 상당수가 비정규직일 것이다. 이들이 밤늦게 혼자 들어갔다가 아침 일찍 나오는 곳은 원룸이나 고시텔, 옥탑방 중 하나일 것이다.

1인 가구의 반인간적 주거형태와 불안한 고용 형태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비무장지대’가 커피숍이다. 대다수 1인 가구에게 커피숍은 값싸게 이용할 수 있는 사무실이자 응접실, 거실이자 서재다. 집과 일터에서 찾을 수 없는 쾌적함이나 안전감을 커피숍에서 대신 누리는 것이다. 커피숍을 즐겨 찾는 계층은 또 있다. 미래가 불안하기만 한 대학생들도 강의실과 하숙집을 오가는 사이에 커피숍을 찾는다. 대학생들에게도 커피숍은 도서실 혹은 자기만의 방 구실을 할 것이다.

좋은 장소가 많은 도시가 좋은 도시

며칠 전 오후, 광화문 광장을 걸었다. 약속시간까지 30여 분 여유가 있어 오랜만에 미음완보할 수 있었다. 차를 타고 지나칠 때나 세종대로를 건너갈 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광화문 광장은 참 이상한 장소였다. 공공성이 강한 장소인데도 나무 한 그루가 없고, 앉아서 쉴 곳도 없었다(완공한 다음에 이순신 장군 주변에 벤치를 설치했다). 광장을 찾는 이들은 크게 두 부류였다. 관광객과 행인. 횡단보도를 이용하는 행인이야 그렇다 쳐도 관광객 대부분이 멈춰 서지 않고 걸어 다녔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을 때를 제외하면 관광객들은 끊임없이 부유하는 무리들이었다. 시선을 붙잡는 ‘볼거리’가 거의 없었다. 광장은 관광객을 위한 거대한 보도(步道)였다.

광화문을 등지고 남산 쪽을 바라보는 두 동상도 문제였다. 세종대왕 동상이 들어서면서 동상의 메시지가 더 부각됐다. 두 동상은 전후좌우를 위한 온전한 입체가 아니었다. 두 동상은 정면과 아래쪽에서만 의미가 발생하는 불구적 형태였다. 특히 앉아 있는 세종대왕 동상은 뒤에서 보면 거대한 의자에 불과했다. 두 동상의 방향에서 일방향적 권위주의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두 동상의 시선은 경복궁(과거)과 청와대(현재)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정확히 일치한다.

광장, 그것도 한 국가의 수도 중심부에 있는 광장이 지닌 상징성은 실로 크다. 국가의 정체성, 국가 권력의 행사 방식, 국민의 정서를 표상한다. 광화문 광장에 가득한 비장소성과 두 동상의 권위적 시선을 도시에 대한 국가(지자체)의 의지 혹은 태도와 연결하는 것은 확대해석일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광장, 그것도 한 국가의 수도 중심부에 있는 광장이 지닌 상징성은 실로 크다. 국가의 정체성, 국가 권력의 행사 방식, 국민의 정서를 표상한다. 광화문 광장에 가득한 비장소성과 두 동상의 권위적 시선을 도시에 대한 국가(지자체)의 의지 혹은 태도와 연결하는 것은 확대해석일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광장이 시민을 배려하고, 동상이 좌우와 후면의 시선을 고려했다면, 도시가 지금과 같이 장소성을 배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광장에서, 동상의 뒤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친구와 함께 냉면집을 향하면서 새삼 깨달았다. 피맛골이라는 오래된 장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수십 층 오피스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장소감, 장소성, 장소애가 지표(땅)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변형된 장소들이 있다. 장소 역할을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냉면이나 추어탕과 같은 음식, 두만강이나 낙동강을 노래하는 대중가요 또한 엄연한 장소다. 영화나 소설, 사진도 빼어난 장소의 저장장치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는 반드시 좋은 장소와 연관되어 있다. 시민들이 좋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가운데, 새로운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 이 일이야말로 장소의 기억을 장소의 창조로 승화시키는 기획일 것이다. 우리는 비록 비장소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건조하고 차가운 비장소야말로 좋은 장소를 꿈꿀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일지도 모른다.

이미지 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