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 비열한 거리로 한 남자는 걸어가야 한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고,

타락하지도 않으며, 두려움도 없는 채로. (…) 만일 그 같은 사람이 많다면,

이 세계는 지나치게 따분하지 않으면서도 살아가기에 아주 안전한 공간이 되리라.”

─「심플 아트 오브 머더」 중에서1)

레이먼드 챈들러를 소개합니다

작가의 이름과 작품을 함께 접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름만 들어봤거나 작품 제목만 얻어 듣게 되는 경우도 많다.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 1888~1956)라는 이름은 오래도록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러 글에서(“레이먼드 챈들러는 나의 영웅”), 그리고 2002년 번역된 스티븐 킹의 에세이 『유혹하는 글쓰기』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작품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어디쯤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별이었다. 하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 역시 오랜 세월 가까운 지인의 끈질긴 권고에도 장르 소설이란 이유로 거들떠볼 생각이 없다가,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소설을 찾아보았다. 그처럼 장르 문학에 무심하여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을 읽어볼 마음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탐정소설이라니.

그런데 2004년 초 이글루스의 한 블로그에서 챈들러의 문학에 관한 포스트를 통해 그의 소설이 궁금해졌다. 그 블로그는 20세기 ‘대체 불가능한’ 작가들이지만 우리나라에선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던 리처드 브라우티건Richard Brautigan, 찰스 부코우스키Charles Bukowski, 트루먼 카포트Truman Capote를 비롯하여 페터 회Peter Hoeg 등 필자가 애호하는 작가들과 아직 출판되지 않은 그들의 작품을 재치 있는 입담과 세련된 글 솜씨로 번역, 비평해놓은 곳이었다. 이토록 화려한 문학적 성찬을 한 곳에서 맛 볼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즐거움이었고, 블로그 주인이 가진 문학적 감식안을 신뢰해 마땅했다. 장르문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참신한 열정이 느껴지던 그 블로거가 바로 2004년 1월부터 2005년 5월까지 북하우스에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 여섯 권2)을 번역한 역자였으니 안내자를 제대로 만난 것이다.

그렇게 접한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은 처음 스티븐 킹의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를 읽었을 때의 감동과 경탄에 버금갈 만큼 매우 우아하고 훌륭한 문학작품이었다. 그간 낮추어 보았던 추리•탐정소설에 대한 선입견을 단번에 깨뜨리는 간결하고 단단한 챈들러의 문장은 힘이 있고 속악하되 지적인 품위가 있다. 위선적인 부르주아와 지식인을 경멸하고 흔들림 없이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작가적 경향에 미국식 영어를 외국어처럼 숙지하고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에서 언어를 배운 작가의 이력이 겹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LA라는 삭막한 도시의 생생한 배경 묘사와 그에 대비되는 인간 존재의 남루한 리얼리티, 고대 비극의 신탁처럼 주어지는 비정한 현실이 사막의 거친 모래 입자처럼, 어두운 뒷골목 가로등에 안개 필터가 씌워지듯 전체적으로 우울한 정조를 띠며 그의 작품을 잊을 수 없게 만든다. 일단 책장을 펼치면 도중에 덮을 수 없는 챈들러의 작품들은 탐정소설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 즉 흥미, 오락 위주의 대중적 소일거리라는 협소한 시각을 무색하게 만드는 시대를 꿰뚫는 통찰과 인간과 공간에 대한 정서적 진동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한 독자의 말마따나 레이먼드 챈들러와 그의 페르소나인 필립 말로라는 인상적인 캐릭터를 만나면서 추리소설은 “이성의 한 조각에서 사회의 한 부분”(decca; howmystery.com 운영자)을 담지擔持 하는 문학형식이 되었다. 또한 “레이먼드 챈들러는 미국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내었다. 그 이후 미국을 예전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는 폴 오스터의 찬사처럼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적인 존재이자 추리소설이란 장르를 넘어 일반문학에서도 인정받은 대표적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하드보일드의 음유시인’인 레이먼드 챈들러가 51세인 1939년 처음 출판한 장편소설 『빅슬립』과, 1940년 출간한 『안녕 내 사랑』, 그리고 1955년 미국 추리작가협회 최우수작품상 에드거 상 수상작인 『기나긴 이별』은 탐정소설의 전범이 된 대표작들이다. 특히 『기나긴 이별』은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 로스 맥도널드의 『움직이는 표적』과 함께 하드보일드(hard-boiled) 3대 걸작으로 꼽힌단다(하지만 이번 신간에서 챈들러는 로스 맥도널드의 문장에 드러나는 허세에 관해 통렬히 비판한다). 아무튼 이 좁은 지면에서 이렇게 줄줄이 작가들의 이름과 제목을 나열하는 이유는 혹시라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런데 여전히 챈들러가 누구냐고요?3)

챈들러 방식Chandler Style, Chandlerism, Chandleresq

“나는 미스터리 소설 분야에서 내 몫은 다 했어요. 비록 다는 아니지만 많은 작가들이 내가 낡아빠진 수단을 그럭저럭 재창조했다고 인정해주고 있죠. 그리고 내가 아니었다면 그런 수단이 존재하기 어려웠으리라는 사실도.”4)

“챈들러의 문장은 모든 의미에서 지극히 개인적이고 독창적이며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챈들러 생전에도 사후에도 그의 문체를 흉내 내려는 시도는 수없이 있었지만, 대체로 성공하지는 못했다.”5)

이번에 소개하는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보낸 개인적인 편지 묶음이다. 챈들러는 자신이 받은 편지를 모두 불태웠지만, 다행히도 그가 독자, 편집자, 동료 작가 등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들이 남아있어 골라 엮은 것이다. ‘폭력적 사건을 감정과 수사를 배제한 채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게 특징’인 하드보일드 작가의 대표인 그답게 편지 역시, 아니 오히려 더욱 거칠 것 없이 솔직하고 냉정하다. 그는 주관이 뚜렷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아가 어떤 글을 써야 옳은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작자다. 하여 비정할 만큼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돌직구로 표현하는 그의 편지는 요즘말로 ‘셀프 디스’도 서슴지 않고 작가로서의 심상6)과 삶에서 중요한 점7), 자신과 다른 작가의 작품에 대한 작품론8), 작가의 자세9) 등을 오롯이 드러낸다. 그 꼿꼿한 심성과 자기 확신은 일견 오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작가적 자의식에서 크게 벗어난 정도는 아니다. 그보다는 부조리하고 비열한 세계 속에 내던져진 보잘것없지만 인간적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의와 올바름이 무엇인지, 현실과 이상의 경계는 어딘지 집요하게 묻고 요구하는 그, 혹은 필립 말로의 가치관이 그런 당당함과 다른 작가들로부터 수없이 모방되는 그만의 독창적 스타일을 낳은 것이 아닐까 싶다.10)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나에겐 항상 고독한 거리에서, 고독한 방에서 살며,

당황할 때는 있지만 결코 패배하지는 않는 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필립 말로는 우리보다 훨씬 명예로운 남자입니다.”

짤막한 편지글로 이루어진 아담한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작가의 깐깐하면서도 깊은 인간성에 기인한다. '20세기 LA의 고독한 기사' 필립 말로는 하나같이 하찮은 인생일지라도 인간으로서의 긍지와 순정으로 빛나는 사람들을 마음에 담는다. 하지만 비열한 현실(거리)에서 그들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챈들러 자신의 정의처럼 필립 말로는 정의롭기에 가난한 현실 부적응자이고, ‘평균적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남자다. 그는 ‘선택받은 고귀한 자는 절대로 아니지만 용감하게도 또는 어리석게도 매번 진실과 인간의 가치를 찾아 헛된 탐색을 떠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챈들러 작품의 “깊은 바닥에 있는 테마는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중요한 것들은 이미 오래 전에 썩어 더러운 웅덩이 밑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다.”11) 바로 이 점이 챈들러가 말하는 씁쓸한 세상의 리얼리티이고, 그의 글을 읽는 우리가 매혹당하는 까닭이리라. 더불어 “하루하루 정직하게 몸을 부려 글을 써내는 모습이 순수한 글 노동의 정수를 보여준다. 막노동 글꾼이라고나 할까”란 한 친구의 지적처럼, 스티븐 킹이나 마루야마 겐지(『소설가의 각오』를 보라)의 글 쓰는 자세와 오버랩 되는 그의 태도는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물론 글을 읽는 독자의 척추를 곧추세우고 신경을 팽팽하게 긴장시킨다.

원래 신간의 별자리를 이번 커버스토리의 주제와 상통하는 책으로 잡아보려고 했다. 그런 의도로 고른 책은 데이비드 하비의 『반란의 도시』와 지그문트 바우만의 대담집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였다 (지면 상 따로 설명을 드리진 못하겠지만 이 두 책도 꼭 찾아 읽어보면 투자한 시간과 에너지가 아깝지 않을 것이다. 무려 근대적 공간과 모더니티를 명쾌하게 논했던 데이비드 하비 아닌가!).

그런데 마찬가지로 불친절하고 불평등하며 비열하기 짝이 없는 문제투성이의 도시 공간에서 “그것은 아름다운 세상은 아니지만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고, (……) 거친 재치, 그로테스크에 대한 감각, 위선에 대한 혐오, 비열함에 대한 경멸을 표할 것”12) 이라는 챈들러의 여전히 현재적인 탐정 이야기가 불안하고 피곤한 우리에게 색다른 문학적 휴식과 감성적 기운을 제공해 주리라 느껴져 급하게 방향을 바꿨다. 더불어 편지들에는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며 느낀 신랄한 감정들과 18세 연상의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 오랫동안 그와 함께 한 ‘코끼리도 탐낼 정도의 기억력’을 가진 고양이 타키의 이야기도 들어있다. 애틋하며 감미로운 재미도 있다는 말씀이다. 거의 모든 페이지에 밑줄을 긋는 즐거움은 어느 책에서나 만나는 행운이 아니다. 각설하고 이 책을 읽는 독특한 기쁨에 관해 한 페친(염신현 님)의 글로 별자리를 마감하련다.

“약국에서 받은 알약 같다. 세 페이지씩 탁탁 입에 털어 넣고 물 한 모금 탁, 고개도 뒤로 탁 젖히며 꿀떡 삼키는 무지개 색 알약 같다. 그리곤 뭔가를 삼킨 악어처럼 소화가 되길 기다리는 거지. 주위를 둘러보며 이런저런 멍한 생각이나 하다 다시 세 페이지씩 읽어나가는 거다. 그만큼 쉬.엄.쉬.엄. 현미 오곡밥처럼 꽁꽁 잘 씹어서…. 그래야 어울리는 책도 있다. 보통 사람 많은 곳에서는 책을 잘 안 보는데 (왜냐하면 대개는 책보다 사람이 재밌거든. 관광객이 관광지보다 훨씬 더 재밌는 것과 같다), 근데 이 책은 사람이 눈에 안 들어온다. 읽는 동안에는 딴 게 절대 안 들어오고, 안 읽는 동안에는 자꾸 생각나게 한다. 그럼 좋은 책이다. 3분 동안 생각에 빠지게 한다. 그럼 난 이만, 약 먹을 시간.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