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파리나 뉴욕 같은 선진국의 대표 도시와 비교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얘기가 문화시설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문화시설은 보통 박물관, 미술관, 음악당, 공연장, 도서관 등을 말하며 확대하면 체육시설, 공원, 역사적 사이트, 종교시설 등까지 포함할 수 있다. 서울은 분명 이런 시설들이 선진국 도시들에 비해 부족하다. 서울도 이럴진대 한국의 다른 도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서울을 비롯해서 한국의 주요 도시들은 문화시설을 늘리려 노력하고 있다. 요즘 들어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개인이 지어 개관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제주도에만 박물관과 미술관을 합한 숫자가 60개가 넘는다. 문화시설은 명품 도시가 되기 위해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그렇다면 문화시설이 많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크게 정량적 기준과 정성적(定性的) 기준 둘로 나눌 수 있다. 일단 가장 기초적인 기준으로 비율을 들 수 있다. 숫자로 표시되는 정량적인 기준이다. 문화시설의 개수, 소장품의 양이나 공연 회수, 방문객 수, 예산, 면적 비율 등이다. 한 마디로 도시 공간 내에서의 비율 문제이다. 문화시설이 반드시 도시에만 있으란 법은 없으므로 이럴 때에는 보통 인구를 기준으로 비율을 계산한다. 이런 정량적 기준에 의하면 서울을 비롯한 한국 도시들의 문화시설 비율은 아직은 부족한 편이나 그래도 많이 향상되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시설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두 번째 정성적 기준을 생각해야 한다. 크게 세 가지 내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도시의 중심 문제이다. 도시 공간의 중심을 어떤 종류의 시설이 차지하느냐는 뜻이다. 도시의 주인이 누구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화시설의 구성 비율이 참뜻을 갖기 위해서는 도시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한국의 도시들은 어떨까. 서울을 보자. 도시의 중심은 단연 상업공간이다. 명동이나 신촌 같은 강북의 오래된 곳을 필두로 강남역, 압구정 로데오, 학동 사거리, 가로수길, 삼성역의 코엑스 몰, 잠실 등 강남의 대표적인 곳은 모두 상업공간이다. 요즘은 여의도의 IFC 지하와 영등포의 타임스퀘어, 심지어 김포공항의 롯데 쇼핑몰까지 가세했다. 서울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며 서울을 소개하는 각종 안내서에 빠짐없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곳들이다. 이런 곳은 오로지 돈을 쓰기 위해서 존재한다.

문화시설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존재감이 전혀 없다. 딱히 생각나는 곳도 없다. 홍대 앞과 대학로가 문화공간을 표방하지만 이곳들도 여전히 상업공간일 뿐이다. 신촌, 홍대 앞, 건대입구, 이대 앞. 모두 상아탑과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을 낀 대학촌인데 문화공간이라 부를 곳은 없어 보인다. 돈 들고 와서 마시고 먹고 노는 상업시설만 공고히 성업 중이다. 서울의 주인은 상업공간이다. 그래서 온 국민은 물욕의 포로가 되어 큰 빚을 지고 허덕인다. 자기가 버는 것보다 항상 돈을 더 써야 나라경제가 안 망한다며 압박을 받는다.

서울에서 문화공간은 어디일까. 몇몇 개별 건물들은 떠오른다. 하지만 이런 건물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 인프라들이 모여서 공간이나 장소처럼 영역으로 발전한 곳은 정말 찾기 힘들다. 대부분 매표소 차려놓고 표나 팔고 있을 뿐이다. 하루 종일 썰렁하다. 초등학생 단체 관람 같은 의무성 손님 이외의 활용도는 급격히 떨어진다. 강북에 서울의 중심공간이 될 만한 몇몇 후보들이 있지만 이것은 시간상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한 데 따른 당연한 현상일 뿐이다. 공간의 활용도를 보면 변방에 불과하다.

서울이 이럴진대 다른 도시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서울 주변의 인천, 수원, 성남, 고양 같은 도시들의 중심공간도 거의가 상업시설들이다. 부천이 상동이나 중동 같은 환락가로 유명하다는 얘기는 서울까지 들리지만 살아 숨 쉬는 문화공간이 있다는 얘기는 정말 듣기 어렵다. 부산을 떠나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공통된 이유도 문화시설 부족이다. 부산에는 문화시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부산의 중심지는 남포동이나 서면이나 해운대지 문화공간이 아니다. 부산에 무슨 문화공간이 있는지 생각나는 것이 없다.

이처럼 문화시설이 도시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문화시설이 없지는 않다. 숫자만 보면 적다고 할 수도 없다. 계속 늘고 있다. 하지만 따로 시간을 내서 찾아가야 한다.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찾아가야 한다. 아는 사람만 간다. 전문가들만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간다. 초등학생들만 강제로 동원되어 간다. 다수의 시민이 쉽게, 아무 때나, 부담 없이, 종종 강남역 놀러가듯 갈 수 있는 곳들이 아니다, 아니 강남역보다 보다 더 쉽고 자주 갈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 반대이다.

파리나 로마나 런던이나 바르셀로나나 암스테르담이나 쾰른이나 비엔나는 어떨까. 그곳에도 상업공간이 있다. 하지만 도시의 주인은 단연 문화시설이다. 우리는 그 도시들의 상업공간은 모른다. 하지만 문화시설은 안다. 지면상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이런 도시들의 명성과 가치와 품격은 단연 이런 문화시설들에서 나온다. 상업공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둘째, 공공성 문제이다. 문화시설이 도시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는 곧 공공성을 띠어야 한다는 것, 즉 공공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일차적으로는 소유와 운영의 주체 문제이다. 건설부터 유지 관리 보수까지 생각하면 공공시설이 유리하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사적 주체도 얼마든지 훌륭한 문화시설을 지어 소유하고 운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용 양상은 반드시 공공성을 띠어야 한다.

건축시설이 공공성을 띤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한 마디로 도시 외부 공간과 함께 작동하며 열린 공간을 도시에 선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건물의 닫힌 문을 열어 젖혀 누구에게나 열린 개방성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외부 공간에서 건강하게 뛰노는 활동의 장을 제공해야 한다. 출퇴근길에, 점심시간에, 주말에 남녀노소 누구나 대중교통을 타고 쉽게 갈 수 있어야 한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노출되어야 한다. 시민들의 발길 동선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도시 생활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어야 한다. 길손이 잠시 쉬어가듯, 물 한잔 얻어 마시듯, 그렇게 부담 없는 일상의 친절로 작동해야 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 어떤 스님이 내려놓으라고 쓴 책을 들고 들러 하류의 여유를 무료로 사서 소중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도시 공간을 인식하고 사용하는 양상과 수준의 문제이다. 도시 공간 속에서 어떤 행위를 하고 어떤 가치가 오가며 어떤 목적과 이상을 추구하는가의 문제이다. 개인의 탐욕을 위해 악용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제외되어야. 개인이 돈 벌자고 여는 미술관은 문화시설이 아니다. 돈세탁을 위해, 미술품을 통해 재산을 증식하기 위해 운영하는 미술관은 문화시설이 아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화려한 건물 속에 들어 있어도 미리 예약을 하야만 갈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문화시설은 아니다. 매표소를 전면에 세우고 표 파는 여직원이 퉁명스럽게 째려본다면 미술관이라는 이름을 사용할지라도 진정한 의미의 문화시설은 아니다. 무전기 든 보안요원이 눈을 번득이며 방문객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죄 지은 것 같은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고급 호텔의 반열에는 들지언정 진정한 의미의 문화시설은 아니다.

공공주체가 운영해도 마찬가지이다. 공적 영역에 속한다는 것만으로 절대선이 되지는 않는다. 지자체에서 관광수입만을 위해서 짓는 것이라면 사적 영역에서 개인의 욕심을 위해 짓는 미술관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여전히 부족하다. 많은 예산을 낭비하고 실패한 공공 문화시설은 대부분 이런 수익의 목적으로 지은 것들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해야 죽지 않고 살아 숨 쉬게 되는지 등에 대한 진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셋째, 광장, 녹지, 공원 등 도심의 다른 열린 공간과 종합적으로 연계되어야 한다. 도시를 구성하는 다양한 열린 공간의 리스트에 들어야 한다. 열린 공간의 리스트를 하나로 묶어주는 바느질 역할을 해야 한다. 거꾸로 문화시설의 입지를 정할 때 가능하면 열린 공간 속이나 옆을 잡아야 한다. 문화시설은 도시 내 열린 공간과 어우러져 시민들에게 흥겨운 한판 축제를 만들어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존재 의미를 갖게 된다. 비로소 본연의 임무를 다했다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취약하다. 한국의 도시는 광장의 전통이 없거나 있어도 매우 약하다. 서울에서 일부 ‘광장’이라는 단어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미약하다. 시위 장소 이상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녹지나 공원은 더 취약하다. 녹지는 모두 아파트에 팔아먹어 버렸다. 서울의 도시림 비율은 세계 꼴찌 수준이다. 이런 판에 공원을 기대하는 것은 사치다. 있는 공원도 모두 죽여 놓고 있다.

열린 공간과의 연계는 서양의 도시들에서 문화시설이 주인 자리를 차지한 비밀이기도 하다. 서양의 도시는 일찍부터 광장을 중심으로 변화, 발전해 왔다. 개별 건물이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 꽁꽁 폐쇄된 대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도시 외부에 다양한 열린 공간을 확보해서 활발하게 사용해 왔다. 광장은 그 대표적 예이려니와 녹지와 공원도 마찬가지였다. 광장이 오랜 역사에 걸쳐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면 녹지와 공원은 19세기 이후 집중적으로 확보한 측면이 강하다. 이들의 근대성 프로젝트에는 녹지와 공원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문화시설은 당연히 이런 열린 공간들을 끼고 세워졌다. 사용 주체가 시민 전체이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 없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 문제에서 현재 한국사회는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주말마다 나들이 차량이 미어터지는 것을 보면 열린 공간에 대해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크게 보면 여전히 매우 위험한 양극단을 오가고 있다. 사적영역에서는 아파트라는 극단적으로 폐쇄된 공간에 갇혀서 답답한 생활을 하고 있다. 집밖을 나오면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상업공간을 찾는다. 답답함은 열린 공공공간에서 풀어야 하는데 아직 부족하다.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에 사람이 넘쳐 나는 것을 보면 이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시민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공간 비율이 이것을 못 따라가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쾌락을 좇아 상업공간으로 숨어든다.

원래 한국인의 주거 행태는 일상생활 자체가 외부공간과 소통하는 방식을 취했다. 한국의 전통주거에 나타나는 공간 특징이 그 증거이다. 방과 마당의 경계가 매우 불분명한데 이는 실내생활과 외부공간을 하나로 섞어서 함께 사용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에 따로 열린 외부공간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이는 서양과 반대이다. 서양에서는 실내·외를 확실히 구별해서 폐쇄적 실내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돌파구를 도시 외부공간에서 찾은 것이다. 그래서 서양 도시에서는 열린 외부공간이 발달했다.

현대 한국인은 위험하다. 자신들의 전통적인 주거방식은 깡그리 지워버리고 서양식 폐쇄 공간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서양 사람들이 그 대안으로 만들어 썼던 도시의 열린 외부공간도 함께 만들어서 즐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양쪽에서 나쁜 것만 택한 꼴이 되어 버렸다. 이것을 해결하는 돌파구는 문화시설이 되어야 한다. 도시 외부공간을 사용하던 습관이 없기 때문에 그냥 이런 것들만 주면 살리기 어렵다. 즐거운 유인요소를 함께 주어야 한다. 단, 건강한 유인요소여야 한다. 문화시설밖에 없다.

이상의 세 가지 정성적 조건을 종합하면 문화시설은 결국 도시 외부공간의 문제를 집약한 결과가 된다. 이것은 시민들의 의식수준을 도시공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결과이다. 문화시설을 짓고 사용하는 것은 결국 시민들의 몫이다. 문화시설은 계속해서 열심히 지어야 한다. 가일층 쌓고 모아야 한다. 하지만 이제 콘텐츠를 쌓기만 하는 시대는 지났다.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융합의 시대이다. 문화시설을 무엇과 융합할 것인가. 도시의 열린 공간과 융합해야 한다. 이것만이 도시의 주인자리를 상업공간에서 뺏어 오는 유일한 길이다. 열린 공간 속에서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문화를 즐기는 쾌감을 한 번이라도 맛본다면 자본과 이익의 논리가 지배하는 야비한 상업공간이 이처럼 도시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지금의 암울한 시대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