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소설가 노먼 맥클레인(Norman Maclean)은 그의 자전적인 소설 「강은 실려 간다(A River Runs Through It)」에서 아버지 맥클레인 목사의 말을 빌려 이렇게 얘기한다(브레드 피트가 주연한, 유명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을 인용한다). “…이렇게 서로 이해 못하는 사람과 산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 해도 우린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이해 없이도 우리는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지 몰라도 만약 그렇다면 정말 불가사의한 것이 우리의 삶이다.

  우리의 언어 습관만 보더라도 이것은 명확하다. 우리는 윤리와 도덕을 정확히 정의 내리지도 못하면서도 ‘직업도덕’이라고 말하지 않고, ‘직업윤리’라고 말한다. ‘사랑한다’는 말의 정의 없이도 정확한 상황에서 그 말을 쓸 줄 안다. 우리 몸 어딘가에는 언어를 활용하는 자동장치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공간과 장소도 그런 한 예이다. 우리는 공간과 장소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정확히 활용한다. 누구도 ‘우주 장소’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공간을 꾸민다’고 하지 ‘장소를 꾸민다’고는 잘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몰라도 소쉬르는, 우리는 무엇을 정의 내리기보다는 단지 차이를 알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차이를 알려면 당연히 대상이 있어야 한다. 나에 대에서는 정의하기 어렵다. 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나와 너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다. 나에 대한 정의 없이, 너에 대한 정의 없이도 말이다.

  그렇다면 장소(場所)와 공간(空間)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두 단어는 모두 영어로 하자면 Place와 Space인데 1860년 이후 일본에서 만들어진 번역어이다. 그 이전의 한자문화권에서는 찾기 힘들다. 쓰이지 않던 말이다. 그에 상응하는 한자로는 굳이 장소와 비교해서 곳(處)이 있고, 공간과 비교해서는 우주(宇宙)라는 말이 있다. 곳은 머무른다는 뜻이 강하다. 우주는 시간(宙)과 공간(宇)이라는 말이다. 동아시아의 고대인들은 시간과 공간을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 한자의 뜻이 둘 다 집을 뜻하는 것은 집이란 것을 우주의 축소된 형태로 축약했기 때문이다. 지상 주거의 가장 오래된 방식은, 지금도 시베리아의 유목민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만 나무를 세워 두르고 거기에 짐승의 가죽을 두른 형태였다. 나무를 둥그렇게 모아 세우는 것은 곧 시간을 세우는 것이고, 거기에 짐승의 가죽으로 덮는 것은 공간을 두른다는 의미다. 즉 시간을 세우고 공간을 둘러서 우리가 사는 3차원의 공간과 시간을 더해 사차원 시공간이 완성되는 것이다.

  ‘Space’를 ‘공간(空間)’으로 번역한 것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에서라기보다는 사물의 성격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강하게 보인다. ‘공(空)’은 비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아무 성격을 가지지 않음’을 뜻한다. 즉, ‘무자성(無自性; None Self-identity)’이다.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공간이다. 장소는 우리말이 있으므로 쉽다. ‘곳’이다. 어떤 특정한 지역이나, 지형, 혹은 인위로 만들어진 지리적인 실재다. 그렇다면 공간이 장소에 포함되는가, 장소가 공간에 포함되는가란 함의로 이 둘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도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대단히 모호하고, 그래서 그렇게 간단하게 이 둘의 관계를 놓고 볼 수가 없다. 크고 작음으로 구분하려 해도 장소 안에 공간이 있을 수 있고(예; 인사동에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 공간 안에 장소가 있을 수 있다(예;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인사동이라는 장소의 중요성). 선후로 봐도 반드시 공간이 먼저 존재할 것 같지만 장소가 만들어지고 거기 다시 공간이 생길 수도 있다(예; 그 카페에서는 2층 공간이 제일 편하다). 스스로 아무 성격을 가지지 않는 것이 공간이라고 했지만 그건 단지 번역어의 성립에 관한 문제고, 우리의 언어작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가 혹시 이 두 단어를 잘 못 쓰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언어는 정해지지도 않고 정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인식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가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그 단어를 어떻게 쓰고 있는 것인가가 중요하다. 지금 우리는 공간을 장소와 혼용해서 쓰고 있다. 그래서 두 단어의 차이를 알기 위해서는 여기에 시간을 넣어서 다시 언어를 작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4차원 시공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좀 더 간단해졌다. 공간은 시간이 배제된 장소다(물론 개념상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장소는 시간이 개입된 공간이다. 공간은 시간이 배제되어 있으므로 선후가 없다. 우리 인식 속에서도, 어떤 공간이 마음에 들고 아니고는 그래서 아주 자의적인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간이 빠져 있으므로 논리적인 증명이 필요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소에는 반드시 시간이 작용한다. 거기에는 시간과 함께 우리가 같이 지내온 추억이나 때 같은 것이 묻어 있다. 그래서 논리적 인과가 정확하게 작용한다. 시간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개입되었다고 장소가 끝까지 장소로 남는 것은 아니다. 모헨조다로의 유적이 그 누구에 의해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거기에 누구도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모헨조다로의 장소는 우리의 인식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 장소는 다시 공간이 된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역시 시간이라는 특수한 물리적 사건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공간과 장소, 시간의 문제를 도상으로 나타내 보았다. 0-0‘ 축은 공간 S의 가상축으로 삼고 공간 S를 시간 T의 축으로 굴리면 △00’T의 면적을 그려 볼 수 있다. 이 공간 S의 면적이 장소 P가 된다. 장소 P는 시간 T에서 다시 공간이 된다. 이 지점이 바로 우리의 인식 안에서 장소가 사라지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건축가가 만드는 것은 공간일까? 장소일까? 건축가는 장소를 만들지는 못한다. 시간을 만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건축가는 어디까지나 공간을 만들면서 그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좋은 장소가 되길 예상하고 바랄 뿐이다.

  시간은 시계판 위의 바늘처럼 일정한 존재가 아니다. 아인슈타인 이후 시간에 대한 인식은 크게 바뀌었다. 마이너스 시간도 존재하고,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진행하는 물체의 시간은 그렇지 않은 상태보다 더디 간다. 뮤온이라는 입자가 그것을 실제로 증명하고 있다. 뮤온은 우주광선이 대기 상층부와 충돌하면서 생기는 입자인데, 수명이 2/1,000,000초 밖에 안 돼 지상에서는 검출이 안 돼야 하는 입자다. 그런데 뮤온은 지상에서 수시로 검출된다. 이유는 뮤온 입자의 속도에 있다. 뮤온의 속도는 광속에 가까워서 지상의 시간보다 상대적으로 느리다. 그래서 지구 시간으로 따지면 고작 수 백 미터 내려오다가 사라져야 할 입자가 수 킬로미터를 도달해 지상에서 검출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도 젊은이와 늙은이가 느끼는 시간은 다르다. 흔히 늙으면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뇌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생체 시계 때문이다. 젊은이는 이 생체시계가 늙은이보다 빠르기 때문에 시간이 늦게 가고, 늙으면서 생체시계 또한 느려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간이 빨리 가게 된다. 물리적인 시간도 상대적이고, 생물학적인 시간도 역시 상대적이다. 우리에게 시계판 위를 흐르는 시간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양자의 세계로 까지 들어가면 거기에선 같은 입자가 동시에 두 곳에서 나타나기까지 한다. 
 
 시간에 관한 한 과학적 사실은 어떤 문학적 상상력보다 어리둥절하고 뛰어나다. 그러나 이 모두 공간/장소와 시간에 대한 문제들이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을 떨어뜨려서 생각할 수 있을까? 시간이 없는 공간을 상상해 볼 수 있을까? 한국어에서 ‘일어나다’는 것은 시간의 축에서, ‘벌어지다’는 것은 공간의 축에서 나타나는 사건을 말한다. 이것을 한자로는 ‘주(宙)’라고 하며 시간을 뜻하고, ‘우(宇)’라고 하며 공간을 뜻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이 일어나고 벌어지는 사건의 무대를 우주(宇宙)라고 일컫는다. 우주는 공간과 시간이 결합된 장소이며 공간과 시간의 집이다. 한자 宇는 중국어 발음으로 yǔ라고 읽으며 ‘공간의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자 宙는 중국어 발음으로 zhòu라고 읽으며 ‘시간의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 건축은 시간이라는 구조를 세우고 거기에 공간이라는 벽을 두르면서 이루어지는 우주다.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집의 형태인 움집은 나무 기둥을 원추형으로 세우고(시간을 세우고) 거기에 짐승의 가죽을 두르면서(공간을 두르면서) 완성된다. 우리는 3차원 공간과 시간을 더한 4차원 시공간에서 살고 있다. 시간과 공간은 떨어질 수 없으며 그래서 우리는 장소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느끼는 장소의 경험은 시간과 공간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시적 사건은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일치가 분리되는 순간적인 경험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시간이 배제된 공간을 상상할 수 없고, 공간이 배제된 시간 역시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시(詩)는 그럴 수 없음에도, 공간과 시간이 찢어지는 틈을 만들면서 시의 집을 세운다. 그래서 시의 우주는 굳건하지 않고 물렁물렁하며, 고정되어 있지 않고 출렁댄다. 하나의 의미가 여러 단어들 사이를 타고 넘어가며, 하나의 단어가 여러 의미를 피워내고 터뜨린다. 시적 사건이란 이런 불가능한 경험이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대부분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움직임에서 발생한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이동하면서 시간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질 문제는 아니다. 숨을 쉬고, 피부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시간이라는 가느다란 줄에 걸려 있는 물방울 같은 존재다. 종종 예술은 이 시간을 배제하고 자기 얘기를 한다. 예술이 우리에게 다른 경험을 주는 이유가 이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시간을 배제하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불가능할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매일 밤 시간이 사라진 공간을 경험한다. 그것은 꿈이다. 꿈이야말로 우리에게 불가능할 것 같은, 시간이 사라진 공간을 경험하게 한다. 꿈이 늘 어리둥절한 이유는 시간이 사라져 인과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푸줏간 주인이 아내가 되고, 갑자기 와 본 적 없는 공간에 있고, 이빨이 우수수 빠지고, 칫솔에 치약을 묻혔는데 변기솔로 바뀌는 등, 도대체 의미 불명이고, 맥락불통인 세계, 그것이 꿈이고, 시간이 사라진 공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꿈에서 깨면 우리는 언제나 시간과 같이 공간을 경험한다. 꿈에서 깨어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리고 꿈이라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예술이 그 어리둥절함을 의미로 간직하는 것은 시간의 한계를 떨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소가 시간의 의미작용이듯이 모든 예술이 시간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건축가는 그 한계에서 자유를 꿈꾸고, 시인은 언제나 그 한계에서 벗어나 자유를 꿈꾼다. 언제나 예술은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는 언어를 꿈꾼다. 그 일탈이야말로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펼치는 일, 그것이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