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김포에서 강화로 가는 길이었다. 김포평야라는 말이 무색했다. 논과 밭은 보이지 않고 새로 들어선 고층아파트 단지가 도열해 있었다. 이름 하여 한강 신도시. 5분이 멀다하고 커다란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음식점, 부동산, 가구점…. 운전하는 후배에게 물었다. “저 간판 글씨를 소리로 전환하면 어떻게 될까?” 후배는 넌센스 퀴즈를 받아든 학생처럼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내가 답했다. “저 간판들을 소리로 바꾼다면 우리는 아마 다 기절하고 말 거야.” 후배는 시위를 진압하는 ‘음향 폭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굳이 소리로 전환하지 않더라도 신도시의 간판은 (건물도 그렇지만) ‘시각 폭탄’과 다름없다. 글씨의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크기에다 형태, 색깔의 조악함이 겹쳐져 그 강렬함이 증폭된다. 노란 색 바탕에 빨간 색 글자는 얼마나 강한가. 간판으로도 모자라 바람으로 움직이는 대형 풍선인형은 또 어떻고. 신도시 일대의 간판은 정보를 전달한다기보다 정보를 일방적으로 강요, 주입하려 든다. 이유가 없지 않을 것이다.

전문가들이 지적했듯이 자동차 때문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도 간판이 한눈에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글씨가 커지고, 색깔은 강해지고, 디자인은 튈 수밖에 없다. 자동차가 등장하기 이전의 간판을 떠올려 보자. 주막의 간판은 술 주酒 자 하나를 써놓은 작은 등 하나면 충분했다. 걷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간판이 필요 없다. 게다가 그 시절에는 이주와 이동이 흔치 않았다. 주막과 장터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주모의 음식 솜씨도 늘 한결같았다.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이동과 이주가 빈번해졌다. 도시가 팽창하면서 도시는 낯선 사람들로 넘쳐났고, 오래된 거리와 낡은 건물이 사라졌다. 도시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도시는 도시 주변의 들판과 산, 강과 바다를 택지로 둔갑시켰다. 새로운 도로, 새로운 상가, 새로운 주거단지는 자신의 존재를 빠른 시간에, 보다 많은 소비자에게 알려야 했다. 간판은 강렬해야 했고, 건물의 외형은 남달라야 했다. 간판과 건물은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말은 건축학개론에나 나오는 한가한 이야기다.

자동차보다, 도시의 팽창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간판과 건물의 그악스러움에는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힘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분단 이후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집단 무의식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피란민-판자촌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피란민 의식은 맥락을 무시한다. 현재를 미래와 연결시키지 않는다. 지금 이곳을 다른 지역과 연관시키지 않으려 한다.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남보다 먼저 싼 값에 구매했다가 가격이 오른다 싶으면 팔아 버리고 떠나면 그만이다. 피란민에게는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있을지언정, 현재의 장소에 대한 애정場所愛, topophilia은 매우 희박하다.

우리는 키치를 소비하는 ‘두 눈 인간’

신도시에서 마주치는 ‘시각 폭탄’은 경제논리에 의한 획일화의 한 증상이다. 김치 맛이 똑같아지고, 사투리가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전국의 모든 도시가 고유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잃고 있다. 오래된 도시의 외곽에 세워지는 신도시는 외견상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매우 풍부한 다양성을 지닌 세계 곳곳의 장소들이 (…) 단조롭고 혼란스러운 건물들의 의미 없는 패턴 아래서 급속하게 제거되고 있다”는 C.W. 무어의 지적은 1960년대 초반 유럽 도시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분석인데, 만약 무어가 21세기 한국의 도시를 목격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다. 신도시에서 간판과 건물이 저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획일화되고 있다. 이웃과 주변 환경을 무시하고 저마다 최고의 경쟁력(차별화)를 자랑하는데 전체적으로는 획일화를 벗어나지 못한다. 놀랍고 안타까운 아이러니다.

(신)도시 경관의 획일화를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있다. 다름 아닌 ‘장소성의 부재’다. 장소성이 없는 장소가 광범위한 스케일로,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다. 에드워드 렐프가 <장소와 장소상실>에서 지적한 것처럼, 저 ‘무장소의 자리’들은 토착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경제 논리에 의해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렐프의 관점에 의하면 장소성이 없는 장소는 키치를 통해 팽창을 거듭한다. 이때의 키치는 집, 관광, 매스컴, 대중문화, 디즈니화 등을 통해 진화를 계속해 나간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도시에 사는 것이 아니라 키치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아니고, 키치를 소비하는 키치적 주체다.

키치란 무엇인가. 렐프를 조금 더 인용해 보자. 키치란 기념품이나 선물로 팔리는 저속한 물건 혹은 가재도구, 음악, 문학, 건축 등에서 나타나는 저속한 형식을 가리킨다. 키치의 어원은 19세기 후반 독일 남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키치는 ‘낡은 가구를 주워 모아 새로운 가구를 만든다’는 의미였다. 이후 키치는 산업화, 도시화와 함께 무서운 기세로 대중화를 이뤘다. 예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시민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욕구보다 욕구를 만족시킬 수단이 많아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키치는 특유의 형식과 태도를 형성했다.

렐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키치는 장소가 물건으로 취급되는 진정하지 못한 태도이다. 이 경우 대개 인간은 장소로부터 소외되고, 하찮은 것이 중요하게 되고 중요한 것이 하찮게 되며, 환상적인 것이 현실이 되고, 진정한 것이 평가 절하된다.” 집이 가족의 유대와 가족 구성원의 휴식이 이뤄지는 원형적 장소에서 벗어나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로 전락한 것(바우만)이나, 관광이 여행이나 순례의 의미를 외면한 채 새로운 지구적 차원의 소비 상품으로 활개를 치고 있는 것도 장소에 대한 진정성을 잃어버렸다는 명백한 증거다.

장소애가 ‘장소 혐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김포에서 강화도로 진입하면서 눈에 띈 것은 펜션이었다. 강화도에는 대단위 아파트나 산업 시설이 없는 대신 외지인을 위한 음식과 숙박업이 번창하고 있다. 전망이 좋다 싶으면 어김없이 식당과 펜션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간판과 펜션의 양식이 전형적인 키치였다. 외지인의 눈을 사로잡기 위해 혈안이 된 디자인이다. 일찍이 키치적 형식과 태도가 응축돼 있는 건물을 J. B. 잭슨은 ‘타자 지향 건축물’이라고 명명한다. 강화도의 펜션과 같은 관광지의 건물과 경관이 대표적인 타자 지향 건축물이다. 문제는 이런 건축물이 기존의 경관을 파괴하고 “틀에 박힌 관광 건축물”을 들여앉힌다는 것이다. 펜션 건물은 강화도의 지역성과 연관된 진정한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경제논리와 결합한 “가짜 장소”이다.

김포 신도시나 강화의 포구에서만 ‘시각 폭탄’을 마주하는 것은 아니다. 6백 년이 넘었다는 서울에서도 오래된 장소, 좋은 장소를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궁궐을 제외하면 오래된 건축물과 장소가 얼마나 되는가. 내가 사는 경기도 고양시도 6백 년 역사를 공공연히 자랑하는데, 고양 6백 년을 확인할 수 있는 건물과 장소는 거의 없다. 조선왕조의 도읍지가 그러할진대, 서울의 신도시로 개발된 고양시가 기억의 분량을 늘리려는 노력은 안타까워 보일 정도다. 그래서 더욱 난감하다. 장소성, 장소감, 장소애를 강조하다가 도리어 장소혐오topophobia에 빠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장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일반적 정서는 장소혐오에 가까울 것이다. 전쟁과 분단,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쳐 오는 동안, 우리는 좋은 장소를 만들고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차단되어 왔다. 피란민 의식은 대도시 외곽에 급조된 판자촌이라는 최악의 장소에서 내면화를 거듭했다. 도시 유민이나 내국 디아스포라離散도 피란민 정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늘 이동해야 하는 ‘뿌리 뽑힌 자’들에게 장소감, 장소애는 사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좋은 장소에서 자기 생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 이것이 기본권의 핵심이어야 한다. 돌아보라, 도시와 시골을 막론하고 자본의 논리가 개입된 건물과 장소는 ‘시각적 폭력’을 행사한다. 좋은 장소에서 살기는커녕, 잠시 몸과 마음을 내려놓을 좋은 경관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장소혐오를 건강한 장소애로 전환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좋은 장소를 만들어내는 길은 멀리에 있지 않다. 내가 이웃과 함께 좋은 장소를 창출하는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민주주의는 장소라고 말해 왔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를 이웃이 있는 마을로 만들 수 있다면, 거기부터가 좋은 장소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곳이 좋은 장소다.